대나무는 태풍에 부러지지 않습니다
일본 총독부는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우리 민족에게 신사참배를 집요하게 강요하였습니다. 다른 종교는 대부분 신사참배를 했지만 기독교만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하였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신사에 참배하든가 폐교를 하든가 선택하라고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그러자 일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폐교하였고 일부는 신사참배를 하며 학교를 유지하였습니다. 일본 경찰은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세워 일반신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 강화하도록 하였습니다. 일선 경찰력을 동원해 개교회뿐 아니라 노회, 총회 등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결국, 기독교계도 그들의 폭력적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장로회 총회는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습니다. 명분은 종교로서의 신사와 국가의례로서의 신도를 구분해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례일 뿐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신도(神社神道)에는 이렇게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신의 나라이고, 최고 신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이며, 가장 실질적인 신은 천조대신의 손자이며 현인신인 천황이며, 그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다. 이 천황에게 국민은 죽음으로써 충성할 것이며, 천황의 조상신들을 모신 신사에 참배치 않는 것은 비국민이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 총회 임원과 23명의 노회장은 신사참배 결정이 되자마자 평양신사에 가서 절을 하였고, 1938년 12월 12일, 한국교회의 각 교파 대표들은 일본에 가서 참배를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회 3개월 후에는 총회장 명의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무리는 처벌해야 한다는 공문을 개 교회에 보냈습니다. 이 공고에 의해 각 노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들과 선교사들 또는 성도들을 제명하거나 노회원 자격을 박탈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굴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여러 차례 구금 취조를 당했고, 안이숙(安利淑) 사모와 함께 일본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기독교의 국교화, 신사참배 강요 금지, 양심적 교역자 투옥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경고장을 단상을 향해 투척하였습니다. 이 일로 박관준장로는 6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45년 3월에 순교했으며, 안이숙은 광복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습니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성도는 대략 2,000여 명, 폐쇄된 교회는 200여 개가 되었으며 50여 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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