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아도 빛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화가 폴 고갱은 파리의 소음과 문명의 허위, 심지어 신(神)마저 등진 채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향했습니다. 그가 찾은 것은 순수한 야성이었지만, 그가 마주한 '낙원'은 이미 상처 입은 곳이었습니다. 고갱은 분노했고, 제도 교회를 조롱했으며 의식적으로 신앙을 밀어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평생을 신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그의 붓끝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강렬하게 신비의 영역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브르타뉴 시절의 <노란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는 현실의 원근법을 무시하고 강렬한 색채로, 감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고갱의 이 역설은 오늘 우리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눈부신 과학과 합리의 시대, "증명할 수 있는가?"가 신조가 된 시대에 삽니다. 효율과 성과, 데이터가 모든 가치를 매깁니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지적했듯,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긍정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증명하도록 내몰립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이 '투명 사회' 속에서, 증명할 수 없는 가치들—사랑, 겸손, 신앙—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쉽게 밀려납니다.
심리학이 마음을 분석하고 자기계발서가 성공을 알려주지만, "나는 왜 존재하는가?" 라는 영혼의 가장 깊은 질문에는 답을 주지 못합니다. 빅터 프랭클이 경고했던 '실존적 공허'가 풍요의 한복판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빛이 사라질까요? 빛은 우리의 동의 여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고갱이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영적 갈망처럼,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이 세상의 어떤 성취로도 다 채워지지 않는 거룩한 빈자리가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이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 너머의 '본향'을 위해 지어졌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일상의 공허함, 성공의 정점에서 오는 불안감. 이것은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를 부르는 '빛의 신호'입니다. 그림자가 짙다는 것은, 빛이 존재하며 단지 우리가 그 빛을 등지고 서 있을 뿐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감정적 도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빛을 다시 바라보기로 결단하는 '용기 있는 응시'에 가깝습니다. 닫혔던 마음의 눈을 뜨는 결단입니다. 고갱이 평생 외면하려 애썼지만 결국 그의 마지막을 감쌌던 그 빛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열린편지/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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