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산 자를 위한 문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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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883 추천수:3 112.168.96.71
- 2000-10-01 08:37:07
우리 나라 천주교 초기 신자로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759년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24세의 나이로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정약용의 권유로 청나라에 가서 "견진 성례"를 받고 올 정도로 신앙이 깊었습니다. 그가 정조 15년 1791년 고향으로 내려온 지 2년이 되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죽은 자를 위한 문화는 종교적인 것처럼 당시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유교적 전통에 의해 장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장례식을 하는데 천주교인이 되기는 되었으나 유교적인 관습을 하루아침에 없애기 어려워 어머니의 혼백을 모시고 조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외종 사촌 동생 권상연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더욱 신앙에 철저한 자였습니다. 비록 동생이었지만 형님의 장례식에 대한 신앙적 태도를 보고 "천주교인은 혼백을 모실 수 없다"고 충고를 하였습니다. 동생의 말을 듣고 이튿날 어머니의 혼백을 모신 궤연을 뜯고 상복 등을 가지고 산소에 가서 불살라 버렸고 집에 돌아와 조상의 위패도 모두 없애 버렸습니다. 얼마 뒤 권상연의 모친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을 과감하게 한 것입니다. 문상객을 받지 않고 천주교 의식에 따라 기도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사건은 조정에 알려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목베임을 당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신해 사옥이라는 대대적인 천주교 핍박이 있었습니다.
홍문관에 있던 서양 서적은 다 불태워졌고 훗날 다시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신유사옥 때 정순 왕후는 '오가 작통법'을 발동하여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 통장을 세우고 천주교인들을 철저히 색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분 차별의 철폐를 부르짖는 기독교의 평등 사상은 당시 양반, 상놈, 중인, 천민 등으로 나뉘어진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지배층에게 있어서는 가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내세관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도층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기초 원리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과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유교는 무질서한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며 발생하였습니다. 도덕과 양심은 뒷전에 밀렸고 부하가 상전을 찌르고 배반과 반란이 춤을 추던 시대였습니다. 백성들은 질서에 목말라있었습니다. 어떠한 폭력과 비리도 제사만 열심히 올리면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때공자가 나타나 인과 예를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은 아랫사람과 윗사람을 분명하게 못박는 질서였습니다. 왕과 신하, 노인과 아이, 부모와 자녀 등에 관한 분명한 질서를 확립하게 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이 사상은 당대 힘센 자가 권력을 잡아 왕이 되려고 서로 싸우던 때에는 빚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되자 다스리는 계급의 사람들에게 체제 안정을 위해 크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일부 특수층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봉건주의적 사상으로 맹렬히 비난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계급사회를 인정하여 동양 제국의 강력한 왕권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법과 형벌주의를 중시한 이사의 말을 듣고 정치한 진시황제 때에는 모든 서적이 불사름 당하고 460명의 유생이 산채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한나라가 천하 통일한 후부터 공자의 가르침은 크게 번성하여 동양 사회는 유교 문화의 삶의 양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문화는 사람의 삶의 질에 도움을 주었지만 철저한 신분제도에 의한 문화, 백성보다는 왕 중심 문화, 산 자보다는 죽은 자 중심 문화를 만들어 사회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추석이 되면 전국토가 술렁이며 되도록 그 전 날에 고향을 찾습니다.
이유는 날이 밝기 전 다례를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씨족의 종가에 모여 씨족조와 선조에게 제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성묘를 갑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민족 풍습으로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 속에는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효의 연장으로, 한 해 농사를 잘 짖게 한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여 행하는 의식입니다. 제사 드리는 것은 물론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13세기 이후 유교의 영향을 받은 외래 문화입니다. 제사가 우리의 전통적 풍습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유교 제사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이조 시대 때부터입니다. 유교에서는 효자로서 어버이를 섬기는데 있어서 3도를 말합니다. ① 살아계실 때에는 봉양하고 ② 돌아가시면 그 상복을 입고 ③ 상이 끝나면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이 조상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가장 큰 불효라."했습니다. 왜 죽은 후 제사를 강조합니까? 제사가 끊어지면 영원히 죽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중시 여기는 사람들의 혼령관은 입귀, 귀신, 명신(신명)으로 나누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입귀는 짐승의 혼과 구별되는 것으로 영혼이라 지칭하는 '귀'입니다. 귀신은 전생에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고 충분한 학식을 소유한 자로서 죽기 전 생존시에 획득한 특수 지위로 말미암아 사후에 일반 귀보다 나은 영혼입니다. 명신 또는 신명은 귀신들 중 천상에 살고 있는 귀신입니다. 후손들의 제사로서 궤양을 풍족히 받는 영혼은 오래 동안 사나 제사가 끊어지면 주림에 못이겨 제 2차 죽음으로 결정적으로 적멸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상 제사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상제사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문화는 아닙니다. 이집트. 중국. 페르시아. 로마. 그리이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반적 현상입니다. 그들은 믿기를 죽은 조상이 신으로 화해 그의 가족과 종족을 적으로부터 지켜주며 상선 벌악을 하는 존재로서 죽어서도 변함없이 돌봐주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문화는 죽은 자보다는 산자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 부모 효는 살아계실 때 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후 고기밥 해드리는 것 보다 살아 계실 때 전화 한 통화가 더 중요합니다●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