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기 게임, 티끌과 들보
어느 마을에 두 집이 있었답니다. 한 집은 일곱 식구인데도 늘 화목한데 비해 다른 한 집은 세 식구밖에 안되는데 항상 불화가 잦았답니다. 어느 날 시끄러운 집의 주인이 화목한 집주인을 찾아갔답니다. "댁은 식구가 많은데도 언제나 명랑하고 화목하게 지내시는데 그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집주인이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했답니다. "댁에는 잘난 사람들만 모여 사시니 시끄러우실 테고 우리 집은 못난 사람들만 사니 조용할 수밖에요." 찾아온 사람이 이해를 잘 못하자 주인은 다시 설명했답니다. "우리 집에는 누가 컵을 깨뜨렸을 때 깨뜨린 사람이 제 잘못이라고 사과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애초에 컵을 그 곳에 놓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말합니다. "허 참, 우리 집과는 정반대군요. 무슨 일이 잘못될 때마다 서로가 상대방을 탓하면서 혼자 잘났다고 하는 게 버릇이니 말입니다."
요즈음 나라가 세 식구가 사는 집안 같습니다. 인사 청문회를 앞두고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죽이기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이기 게임은 컴퓨터 게임 속에서만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 현장에서 날개를 달고 돌아다닙니다. 교육 현장에서 출세라는 옷을 입고 활보하고 있고, 경제 현장에서 성공과 돈이라는 명분을 달고 새벽부터 뛰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 현장에까지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되어 팔리고 있습니다. 죽이기 게임의 대표적인 특징은 상대의 티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상대의 티끌이 드러나며 드러날수록 자신이 게임에서 이길 확률은 높아집니다. 죽이기 게임 문화 속에서 살다보면 사람들은 티끌을 보기에 더 익숙해지고, 자신의 들보보다 상대의 티끌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의 눈은 자신을 보기보다는 다른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고, 자기 소리보다 남의 소리를 더 잘 듣도록 귀는 되어 있고, 입은 자신에게보다는 타인을 향하도록 되어 있는데, 죽이기 게임을 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살면 사람들은 더욱 자신의 들보보다 다른 사람의 티끌을 잘 보게 됩니다.
하얀 종이에 검은 점 하나가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얀 종이보다 작은 점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이나 “소경이 개천을 나무란다”라는 속담이 말해주듯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중년 남자가 이비인후과 의사와 심각한 상담을 했답니다. 자기 아내가 청각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답니다. "오늘 집에 가거든 정문에서 아내에게 큰소리로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라고 물어보시오. 그래도 아무 소리가 안 들리면 두 번째로 거실 문에서 같은 질문을 하시오. 그래도 대답이 없으면 세 번째는 부엌문에서 같은 질문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네 번째로 아내의 귀에 대고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물으십시오." 그 중년 남자는 그대로 실천했답니다. 세 번째 질문까지 그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네 번째 질문하자 그는 아내의 음성을 듣게 되었답니다. "여보, 김치찌개라고! 대답한 것이 벌써 네 번째입니다." 청각 이상이 있는 사람은 아내가 아니고 바로 중년 남자 자신이었답니다. 늘 타인의 티끌만 보며 불평불만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늘 목사의 티끌, 장로의 티끌, 교인들의 티끌, 교회 제도의 티끌만 보며 비판하며 이 교회 저 교회 종교 쇼핑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행복한 삶,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 주어진다 해도 시간 지나면 불평거리, 비판거리를 발견할 것이고 이상적인 회사,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어디에 가도 파라다이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6:41-42)”
신앙생활이란 남의 티끌을 보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들보를 보는 삶에서 출발됩니다. 내 집 창문 청소를 하지 않으면 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습니다. 미세한 타인의 입 냄새는 쉽게 감지할 수 있지만 자신의 입에서 나는 악취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신선한 음식도 시간 지나면 썩습니다. 호숫가에 앉아 있는 커다란 푸른 가슴 왜가리의 멋진 날개에 감탄하여도 실상 자기 집 정원에 왜가리가 사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더러운 오물을 배설하는 그 새가 자신의 정원에 앉아 있는 것을 그저 황홀하게 감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죽이기 게임, 상대의 티끌을 보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보가 있는데도 그 들보를 드러내지 않고 감싸주시는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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