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
한 어르신이 새 신자 교육을 듣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왜 갑자기 나가세요?” 어르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길 70년짜리 네비는 안내 음성이 참 친절했는데…교회 네비는 ‘좁은 길’만 계속 안내하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요즘은 넓고 편한 길 좀 추천해 주는 데 없소?” 우스갯소리 같지만, 오늘 날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풍경입니다. 현대인은 빠르고 편하고 즉각적인 길을 원합니다. 길이 좁아 보이면 ‘오류’라 생각하고, 오르막이 나오면 ‘다른 루트’로 갈아타고, 기다림이 길어지면 ‘신호가 약하다’며 앱 자체를 꺼 버립니다.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아 하나님조차 ‘즉시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앙마저 소비재처럼 취향에 맞지 않으면 교체해 버립니다. 교회의 상처를 곧바로 예수님에 대한 실망으로 연결하고, 고난을 견디는 힘은 약해져 조금만 어려워도 믿음을 내려놓기 쉽습니다. SNS 시대는 남의 간증과 내 현실을 비교하게 하고, 상대주의는 예수님을 많은 선택지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지나오며 우리는 낯선 통계와 마주했습니다. 교회를 떠난 성도가 30%를 넘었다는 소식,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2천 년 전, 갈릴리 해변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열광하던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기대와 다르자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그때 텅 빈 해변에 남은 열두 제자를 향해 주님이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사람들은 왜 떠날까요? 성경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고 반응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거칠고 불편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왕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의 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과 실제의 하나님 사이의 괴리.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말한 ‘인지 부조화’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은 떠났습니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교회의 모습이 실망스러울 때, 신앙생활이 손해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문득문득 ‘떠남’을 고민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고체 근대’에서 ‘액체 근대’로 넘어간 시대라고 설명합니다. 연결은 원하지만, 책임과 헌신은 부담스러워하는 시대입니다. 클릭 한 번, 팔로우 한 번이면 관계가 시작되지만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차단·언팔·탈퇴가 가능합니다. 신앙 또한 하나의 가벼운 선택지가 되어버린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라는 물음 속에는 “너희는 자유다. 억지로 따를 필요는 없다”는 존중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선택하겠느냐?”는 깊은 사랑의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신앙의 위기를 겪는 모든 이들을 위한 이정표가 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의 고백은 ‘맹목적인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 다른 대안을 찾아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성공도, 쾌락도, 인간관계도 영혼의 허기를 채울 수 없음을.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고 했지만, 베드로는 떠날 자유가 있어도 예수님 없이는 갈 곳이 없는 ‘거룩한 막막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단순한 정보가 아닌, 존재를 살리는 ‘생명의 실재’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선택의 과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앙조차 내 입맛에 맞게 고르거나 유예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나치의 교수대 앞에서도 조국에 남기를 선택하며 남긴 말은 우리에게 서늘한 도전을 줍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십자가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스물두 살의 젊은 어머니 페르페투아는 믿음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혔습니다. 아버지는 갓난아기를 안고 와 울부짖었습니다. “딸아, 아이를 위해서라도 신앙을 부인해다오.” 그 순간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결국 콜로세움으로 끌려간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료를 일으켜 세우며, 두려움에 떨던 병사의 손을 잡아 자신의 목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안이 너와 함께 있기를.” 모두가 떠나는 시대 속에서도, 페르페투아는 끝까지 예수님을 선택한 사람의 얼굴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도 떠나려느냐? 혹시 지금 신앙의 여정이 버겁게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아 떠나고 싶은 유혹이 듭니까? 주님은 억지로 붙잡지 않으십니다. 다만, 조용히 물으실 뿐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질문 앞에서 베드로처럼 정직하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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