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결핍
늦은 밤, 최고급 오피스텔의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보석처럼 쏟아집니다. SNS 알림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주식 앱의 초록색 숫자는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성공했음’을 증명합니다.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이룬 듯한 밤. 그런데 문득,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한 공허함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부유했던 한 왕이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는 부와 쾌락, 지식과 권력의 정점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솔로몬의 시대로 퇴행하고 있습니다. 채울수록 더 큰 갈증을 느끼고, 가질수록 더 공허해지는 이 시대의 역설. 그 ‘의미의 결핍’이라는 병의 정체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더 많이 가져라, 더 빨리 누려라, 더 높이 올라가라!” 손가락 하나로 우주의 모든 지식을 불러오고,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는 시대.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선택지와 기회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하버드 의대 연구진의 보고서는 지난 100년 전보다 여가 시간은 2배 이상 늘었지만, 행복감은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소유’와 ‘경험’의 양을 늘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담을 ‘의미’라는 그릇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눈은 더 화려한 것을 봐도 만족할 줄 모르고, 귀는 더 자극적인 소리를 들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는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한다”(전 1:8)는 수천 년 전의 통찰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풍요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끝없는 갈증을 유발하는 소금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나치 수용소라는 극한의 절망 속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인간 존재의 핵심을 꿰뚫었습니다. “인간은 쾌락이나 권력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존자를 결정한 것은 건강한 체력이나 지식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 즉 삶의 의미를 끝까지 붙잡은 의지였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의미를 찾는 수고 대신, 값싼 자극을 소비하라고 유혹합니다. 15초짜리 영상이 주는 즉각적인 쾌감, ‘좋아요’ 숫자가 주는 순간적인 인정, 가벼운 ‘밈’과 농담이 주는 찰나의 웃음. 우리는 이런 도파민의 향연 속에서 잠시 공허를 잊지만, 자극이 사라진 후에는 더 깊은 허무와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드리웁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의미의 결핍’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자극의 과잉’으로 아슬아슬하게 덮어놓은 모래성과 같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린 사회는 조용히 병들어갑니다. 최근 급증하는 우울증, 번아웃, 그리고 안타까운 극단적 선택들은 단순히 개인의 나약함이나 경제적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그 이면에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영혼의 절규가 숨어 있습니다. 목적지가 사라진 경주처럼, 의미 없는 성공은 성취감이 아닌 공허함만을 남길 뿐입니다. 이처럼 의미의 결핍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병리 현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깊은 허무의 골짜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인생의 모든 실험을 마친 솔로몬은 단 한 문장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기독교적 관점에서 ‘의미’란 내가 애써 만들어내는 조립품이 아닙니다.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선물’입니다. 내가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는 나를 설계하신 분의 설명서를 펼쳐볼 때 가장 명확해집니다. 전도서 3장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세상의 그 어떤 쾌락이나 성취로도 채울 수 없는,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신적인 공간(God-shaped void)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대인이 회복해야 할 것은 통장의 잔고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나는 왜 살아가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질문에 흔들리지 않는 세 가지 기둥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나의 직업, 가정, 재능이 더 이상 나를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때, 우리의 모든 일상은 의미로 가득 찹니다. 둘째, 이웃을 향한 삶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진정한 의미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헌신 속에서 발견됩니다.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고 상처를 보듬을 때, 우리는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셋째, 영원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가치는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에 고정될 때, 우리는 일시적인 쾌락을 넘어선 영원한 의미를 붙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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