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섬기는 언어

섬기는 언어

게시글 검색
기다림의 닻을 어디에 내릴 것인가?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237 추천수:1 218.147.218.173
2025-08-17 15:36:20

기다림의 닻을 어디에 내릴 것인가?

새벽 5, 병원 응급실 대기실. 소독약 냄새와 커피 향, 째깍이는 시계 소리만이 공간을 채웁니다. 사람들은 각자 가장 무거운 걱정을 안고 앉아 있습니다. 초조하게 다리를 떠는 남자, 텅 빈 복도를 응시하는 할머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아주머니. 똑같은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절망에, 누군가는 희망에 붙듭니다.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기다림은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구의 삶에도 찾아오는 손님입니다. 우리는 매일 기다립니다. 출근길 오지 않는 버스를, 합격 통지서를, 사랑하는 사람의 보고 싶다는 한마디를. 하지만 모든 기다림이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다림은 영혼을 갉아먹는 독이 되고, 또 어떤 기다림은 사람을 더 단단하게 빚어내는 숫돌이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부릅니다. 마틴 셀리그먼의 실험이 대표적입니다. 개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는 전기 자극을 피할 방법을 주고, 다른 그룹에는 피할 방법이 전혀없게 했습니다. 후자의 개들은 반복된 시도와 실패 끝에 결국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고, 나중에 도망칠 기회가 주어져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 앞에서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이 마음 깊이 자리 잡으면, 기다림은 더 이상 희망의 시간이 아니라 고통을 연장하는 형벌이 됩니다.

10년째 승진에서 고배를 마신 직장인의 경우, 처음 몇 년은 다음엔 내 차례겠지라는 기대를 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기대는 체념으로 변하고, 마음은 점점 굳어갑니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마음이 떠난 연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일입니다. 회복 불가능한 질병 앞에서 기적만을 바라며 현실을 외면하는 기다림도, 어쩌면 가장 필요한 받아들임의 시간을 놓치게 만듭니다. 소망 없는 기다림의 끝에는 무력감과 우울, 깊은 허무만이 남습니다. 반면 소망이 깃든 기다림은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미국 긍정 심리학자 C.R. 스나이더는 희망이 두 날개로 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분명한 목표(Goal)’, 둘째는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경로(Pathway)’입니다.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부부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소파에 앉아 달력만 세지 않습니다. 함께 태교 음악을 듣고, 아기 방을 꾸미고, 서툰 솜씨로 배냇저고리를 만듭니다. 기다림의 순간들이 모두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준비의 시간이 됩니다. 무명의 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세상이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 주길 막연히 바라기보다, 오늘도 캔버스 앞에 서서 붓질을 거듭합니다. 어제보다 나은 색감을 찾기 위해, 실패한 스케치를 찢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처럼 능동적인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 소비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씨앗을 심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소망의 닻을 내려야 할까요? 인류의 오래된 지혜들은 한결같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치 않는 것에 두라고 가르칩니다. 성경 역시 기다림의 두 얼굴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대국 이집트나 앗수르에 의지했을 때, 그 기다림은 번번이 배신으로 끝났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스러질 육신에 의지하며,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난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17:5) 그러나 절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붙든 이들의 기다림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잃은 순간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이제 저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나의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39:7)

절망의 기다림을 소망의 기다림으로 바꾸려면, 첫째,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언젠가 행복해지겠다가 아니라, ‘건강한 관계를 배우겠다’, ‘전문가가 되겠다처럼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십시오둘째, 능동적으로 준비하십시오. 취업을 기다리며 공부하고, 건강을 기다리며 작은 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셋째,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대 사회에서 기다림은 비효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씨앗이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시간 없이는 싹도, 꽃도 없습니다. 사랑, 신뢰, 지혜 역시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소망 없는 기다림은 우리의 시간을 도둑질하지만, 소망 있는 기다림은 평범한 시간을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바꾸는 연금술입니다. 오늘,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 기다림의 끝에 무엇이 있기를 바라십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 그 기다림의 닻은 어디에 내려져 있습니까? 만약 그 닻이 흔들리지 않는 소망 위에 있다면, 그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욱 나답게 빚어가는 창조주의 손길이며, 언젠가 그 열매를 맛보는 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을성 있게 견뎌낸 그 모든 시간이야말로 인생이라는 이름의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할 것입니다.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5.8.17.
SNS 공유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