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저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삶에 ‘실패’라는 붉은 딱지가 붙습니다. 성실하게 쌓아 올린 사업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건강을 자신하던 몸에 예고 없이 질병이 찾아옵니다. 화목하던 가정에 금이 가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날아온 배신이 심장을 꿰뚫습니다. 캄캄한 방에 홀로 남아, 혹은 병상에 누워 희미한 천장을 바라보며, 우리는 목이 메어 한마디 질문을 토해냅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저입니까?” 수많은 사람 중에 왜 저여야만 했습니까.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믿음 없는 자의 불평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정직한 영혼의 절규이며,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 앞에서 신음하는 한 인간의 솔직한 탄식입니다. 이 절망적인 질문 앞에서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계신 듯하고, 그분의 침묵은 우리를 더욱 외롭게 만듭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가장 처절하게 외쳤던 한 남자를 만납니다. 동방의 의인 욥.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큼 온전하고 정직했던 그의 삶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녀를 한날한시에 잃었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성 종기가 퍼져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위로 대신 날카로운 정죄의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절규합니다. 그의 긴 탄식은 “어찌하여”, 즉 “왜(Why)”라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 욥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 불렸던 이어령 박사는 평생을 의지했던 자신의 지식이, 암과 실명으로 고통받는 딸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음을 깨닫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그우먼 이성미 씨는 세상의 손가락질과 차가운 시선 속에서 미혼모로 살아가며 깊은 우울증의 터널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들 역시 수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제 딸입니까? 왜 저입니까?”
이 질문의 가장 고통스러운 지점은 ‘이유를 알 수 없음’에 있습니다. 내 잘못으로 인한 결과라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쉽겠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우리는 길을 잃습니다. 마치 정교하게 짜인 내 인생의 설계도가 누군가의 실수로 찢겨 나간 듯한 기분.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따져 묻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절망적인 질문의 자리가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지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26살의 아름다운 모델, 6개월 된 아들의 엄마였던 캐서린 울프의 이야기입니다. 완벽했던 어느 날 오후, 터져버린 뇌혈관은 그녀의 삶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16시간의 대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오른쪽 전신 마비, 안면 마비, 심각한 시청각 손상이라는 끔찍한 후유증을 안게 되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 아들조차 안아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절규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데려가시지 그러셨어요!”
그녀의 “왜 저입니까?”라는 질문은 병상의 모든 밤을 채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질문을 심어주셨습니다. “만약 ‘치유’가, 내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진짜 치유는 망가진 몸이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깨어진 몸을 가지고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응답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캐서린은 그때부터 자신의 상처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은 자신의 모습이, 안면 마비로 비뚤어진 미소가, 더듬거리는 말투가 더 이상 저주의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Hope Heals(희망이 치유한다)’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깨어진 삶은, 역설적으로 전 세계의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기나긴 질문 끝에 나타나셔서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 천지를 창조하신 당신의 광대하심과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본 욥은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유를 묻는 것조차 무의미할 만큼 크고 선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고난의 해답은 설명(Explanation)이 아니라 현현(Epiphany)이었습니다. 지금 “왜 하필 저입니까?”라고 묻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가장 간절한 초청장입니다. “왜 저입니까?”라는 당신의 눈물 젖은 질문이, “왜 너이면 안 되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쌓여 머지않아 “주님, 바로 저였기에 가능했습니다”라는 영광스러운 메아리로 울려 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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