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지도자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에게는 무엇보다 관용이라는 덕목이 필수적입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더라도 타인의 의견, 신념,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가져야 갈등을 해결하고 사회를 통합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전투에 겁을 먹은 병사가 뒤쪽으로 도망치려다가 발각되어 끌려 나왔습니다. 자신이 처형될 것이라 여겼는지 병사는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온화한 얼굴로 병사에게 말했습니다. "제군, 적은 그 방향이 아니라 저 방향에 있네." 황제의 너그러운 용서에 감복한 병사들은 충성을 다했고 마침내 그는 초대 황제의 면류관을 쓸 수 있었답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최고의 리더로 카이사르를 꼽았습니다. 칼로 결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데 지도자가 되면 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는 무수히 존재했습니다.
폴 존슨이 <세계현대사>라는 책에서 “인간이 더 없이 냉혹하게 되어 버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명백한 악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타오르는 정의감에서 기인한다고 흔히 말하여진다.이것은 의회나 법정이라고 하는 그럴듯한 도덕적 권위를 모두 갖춘 법치국가에 대해서 한층 더 타당한 말이 아닐까?……집단적 정의감은 개인적인 복수심에 비교하면 훨씬 처치 곤란한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관용을 잃어버린 정치 지도자들은 집단적 정의감을 조장하며 국민을 무력과 심리의 전쟁터로 내몰고 있습니다. 관용을 잃은 지도자는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여 사회 통합을 외출하게 만들고 갈등과 분열만 심화시키게 됩니다. 관용을 잃은 지도자는 다른 의견을 억압하고 비판을 탄압함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침해하고 언론, 표현, 집회의 자유를 제한함으로 민주주의를 후퇴하게 만듭니다. 관용 없는 지도자는 다른 국가에 대한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거나 고립주의를 강화하여 국제 관계를 갈등과 불안정의 늪으로 끌고 갈 뿐 아니라, 지도자의 편견과 차별 발언은 폭력과 증오를 증폭시키고, 투자 감소와 경제 성장의 저해를 몰고와 자신의 리더십 마저 상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관용의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장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부하들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고 밤늦도록 술과 안주를 즐기고 있었답니다. 그때 갑자기 광풍이 불어와 촛불이 전부 꺼지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불현듯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왕이 총애하던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답니다. "전하, 지금 어둠을 틈타 누군가가 저를 희롱하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제가 그자의 갓끈을 끊어 손에 쥐고 있사오니 어서 불을 밝혀 범인을 잡아주시옵소서." 그러나 장왕은 촛불을 켜지 못하도록 하고는 명령을 내렸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는 갓끈을 끊으라. 그러지 않는 자는 연회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 나중에 촛불을 밝혔지만 모두의 갓끈이 끊어져 있으니 누가 범인인지 알 수가 없었답니다. 3년 후 초나라는 진나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한 장수 덕분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답니다. 그가 누구인지 수소문한 결과 바로 예전에 장왕이 구해준 '갓끈의 주인'이었답니다. 세익스피어는 “남의 잘못에 대해서 관용하라! 오늘 저지른 남의 잘못은 어제의 내 잘못이었던 것을 생각하라!…우리는 언제나 정의를 받들어야 하지만 정의만으로 재판을 한다면 우리들 중에 단 한사람도 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관용의 최고 지도자인 예수님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8-42)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관용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몸소 행동으로도 실천하였습니다. 자신을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고(눅9:53-56), 당시 사회 소외계층인 세리와 죄인들을 친구로 받아주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고(눅19:9), 세리장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으며, 자기를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눅22:51). 배반하고 도망간 베드로를 사랑으로 불러주었고, 십자가에서 저주하는 자들도 입을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용은 단지 용서만 해주는 관용이 아니라 인류의 죄과를 짊어지고 고통을 당하는 자로서의 관용이었습니다. 관용의 지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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