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 사람들(3) 조선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과 질이 바뀌어 집니다. 조선 최초의 여의사 김정동은 선교사 로제타 홀 부부를 만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1877년 서울에서 광산 김씨 김홍택의 딸 넷 가운데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그녀의 아버지는 집 근처에 사는 아펜셀러 선교사를 만나 고용되어 서양문명을 일찍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이 조선의 여자들을 위해 이화학당을 설립하였는데 지원하는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설립자 스크랜턴은 병자나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와 공부시켰는데 김점동은 네 번째 입학생으로 아버지 손에 이끌러 온 최초의 학생이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아이 눈알을 빼 삶아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시절이어서 김점동도 스크랜턴이 난로 옆으로 오라고 하니까 “아 저 여자가 드디어 나를 구워먹으려는구나”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선교사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이곳에서 영어와 산수 등 일반 과목과 주기도문, 찬송, 기도 등의 예배의식을 배웠는데 1888년 어느 여름,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기숙사 방 안에 있던 열두 살 소녀 김점동은 신앙체험을 하고 일생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배시간에 들었던 노아의 홍수를 생각하며 죄를 자백하고 이튿날부터 그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정기기도회를 갖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김점동은 다른 동료 학생 두 명과 함께 1891년 1월 25일 선교사 올링어(F.Ohlinger)를 만나 ‘김에스더’로 세례를 받고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사들과 자유롭게 대화할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춘 김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의사들의 통역을 맡았습니다.
15세 되던 해 어느 날 그녀는 의사가 언청이 소녀를 고치는 모습을 보고 의사에 대한 꿈을 꾸었지만 그 길을 가는 데는 장애물이 많았습니다. 우선 결혼이 문제였습니다. 김에스더의 어머니는 선교사들에게 에스더의 신랑감을 찾아주지 않으면 불신자와도 결혼을 시킬 수밖에 없다고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그때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홀은 자신의 마부로 고용된 박유산을 소개했습니다. 열 일곱 살인 김에스더는 스물 여섯 살인 박유산을 만나 서양식으로 결혼하였고 김에스더는 박에스더로 살게 되었습니다. 홀 부부가 평양으로 이주하여 선교 사역을 할 때 에스더는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데는 어느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에 내 목숨을 내 놓겠습니다."라고 동행했습니다. 박에스더 부부와 함께 동학농민혁명과 뒤이은 청일전쟁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평양에 이주한 홀은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과로로 열병에 걸려 홀 부인과 한 살짜리 아들과 복중의 아이를 남기고 천국에 갔습니다.
박에스더는 잠시 귀국하는 홀 부인에게 자신도 미국에 가서 의학공부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박에스더를 병원 후계자로 키우려 했던 홀 부인은 그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의 미국 유학생을 만들었습니다. 박에스더는 뉴욕 리버티 공립학교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후의 존스홉킨즈 대학)에서 공부하여 1900년 6월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인 최초 여성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홀 부인의 친정인 셔우드 집안 농장에 들어가 6년 동안 아내의 생활비와 학비를 벌며 뒷바라지를 하였던 남편 박유산은 아내의 졸업과 귀국을 두 달 앞둔 4월 28일 급성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박에스더는 볼티모어 공동묘지에 남편의 유해를 묻고 묘비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25:35)’를 새기고 6년 전 홀 부인이 남편 유해를 양화진 묘지에 묻고 미국으로 돌아갔듯, 박에스더는 남편의 유해를 볼티모어에 묻고 홀로 귀국하였습니다.
귀국한 박에스더는 서울 보구여관을 맡아 비로소 ‘한국 여성이 한국 여성을’ 진료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서울 보구여관과 평양 기홀병원을 오가며 진료활동을 폈고, 평양 맹아학교와 간호사 양성원 그리고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여자성경학교 교수로서도 섬겼습니다.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만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귀를 타고 두메산골로 찾아가 의사 한 번 보지 못하고 죽어가던 여성들의 손을 잡아 주었던 박에스더는 과중한 업무로 건강을 잃고 남편과 같은 결핵으로 1910년 4월 13일 34세의 짧은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박에스더 부부의 삶을 지켜봤던 로제타와 윌리엄의 아들 셔우드 홀은 반드시 결핵 전문의가 되어 조선의 결핵 환자들을 돕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 그의 결심대로 1928년 해주에 최초의 요양소 및 결핵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1932년 최초로 결핵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도입하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좋은 만남은 예수님과 만남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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