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 사람들(2) 전도부인 김세지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히틀러 한 사람으로 600만의 유태인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존 하버드 한 사람으로 하버드 대학에 세워졌고 수많은 인재들이 나와 곳곳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 한 사람으로 인해 독일인은 대부분 루터교 교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기업도 한 사람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한국의 초대교회가 부흥되는 요인 중의 하나도 사람에게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과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전도부인 김세지 같은 성도가 있었기 때문에 초기 한국교회는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때 안방은 외간 남자들의 접근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전도부인들은 안방 깊숙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개척자요 첨병이었습니다. 전도부인 김세지는 평남 평원군 영유읍에서 딸만 넷이 있는 집안에 막대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한 사회에서 그녀는 12세 때 부친이 잃고 16세에 얼굴도 모르는 정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남정네들이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다 혼인하는 과부보쌈, 과부업어가기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전에 과부의 거처를 탐지해두었다가 밤중에 침입하여 보쌈한 뒤 억지로 정을 통하여 배우자로 삼았습니다. 젊은 과부가 된 그녀는 보쌈 결혼의 위기를 겪으며 4,5년을 지내다가 평양에 사는 두 아이가 있지만 재산과 학문을 겸비한 관료출신 선비인 김종겸과 재혼하였습니다. 당시 감리교 선교사 홀은 평양에 병원과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한국인 조사 김창식과 함께 평양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열매가 오석형이었습니다. 오석형은 김세지의 남편 김종겸의 팔촌 아우뻘로 김종겸을 전도했습니다. 김종겸은 “관청에 출입하는 사람이 야소교를 믿을 수 있겠는가?”하며 거절했지만 오석형은 낙심하지 않고 그의 부인에게 “예수를 믿으면 집안이 평안할 것이요, 남자는 주색잡기를 버리고 살림을 힘써 하여 내외간 화순하게 되리이다.”라는 말로 전도했습니다.
김세지는 예수 믿으면 ‘남자는 주색잡기를 버린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외도에 빠진 남편의 주색잡기를 막을 수 있는 교가 있다고 하니 믿어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교회 나갔지만 남편의 못된 외도습관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에서 돌아오면 구타와 감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할수록 ‘영생’을 사모하게 되었고 신앙의 열정은 깊어져 남편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청일전쟁 중에 조선인 부상자와 사망자를 돌보다 희생당한 홀 선교사 후임으로 온 노블선교사 부인으로부터 한글과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노블 목사로부터 ‘세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세디의 한자 음역인 ‘세지(世智)’라는 이름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김세지는 1908년 여자 성경학원을 졸업하고 노블 부인의 추천으로 전도부인이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성경을 팔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남편도 예수 믿고 교회에 다녔지만 1902년 콜레라로 별세하여 슬픔을 겪었으나 이를 신앙으로 극복하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매년2, 3천 회의 가정 방문을 통해 매년 30여 명의 새신자를 얻었습니다. 전도를 위해 ‘양반집 부인’ 출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천한’ 일인 시체 염을 한 달에 두 번씩 감당하며 과부·기생· 판수· 무당·고아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녀의 사역으로 800여명의 천국 백성의 열매가 맺혀졌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로 영아부를 만들었고 주일학교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평양 남산현교회 여신도들과 ‘보호여회’를 조직하여 전도와 선교, 여성의 자기 능력계발과 구제활동을 하였고, 과부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과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삼일운동 직후에는 평양지역 교회 여성들이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 애국부인회 조직에 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대한애국부인회’의 부재무부장이 되어 군자금 모금의 실직적인 책임을 지고 상하이와 만주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냈습니다. 애국부인회 조직의 탄로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비인간적인 고문과 악형으로 건강을 심하게 해치고 말았지만 김세지는 1921년 석방된 후 다시 와해된 보호여회를 재건하여 1923년 칠성문 밖에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1922년 5월 15일,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김세지 전도부인 성역 25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을 때 김세지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800여명을 전도한 전설적인 전도부인 김세지는 전처소생인 세 아이를 잘 양육하여 아들 김득수 장로는 미국 유학을 한 후 광성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평양에서 YMCA를 조직하였습니다. 첫째 딸 매륜은 감리교 최초의 감독이 된 양주삼 목사의 부인이 되었고 둘째 딸은 반석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해방 후 감리교 감독인 된 변홍규 목사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5.9.27.
열기 닫기
| 쪽지 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