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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생활(1)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2172 추천수:24 112.168.96.71
2015-03-01 07:11:19

 

건강한 교회생활(1)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1-6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천민, 상민, 중인, 양반으로 구분된 신분 사회였습니다. 신분을 집단구성의 원리로 삼고 있는 사회입니다. 신분이나 직업이 세습되었고 신분 사이에서만 결혼을 하였습니다. 신분에 따라 특유한 의복이나 교육 등 특유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신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1893년 6월 서울 곤당골 지역에 16명으로 곤당골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여 첫해에 교인수가 43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시 백정이었던 박성춘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양반 유식계층 교인들은 백정의 입교와 교회 출석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습니다. 결국 곤당골 교회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양반유식계층은 백정이 없는 홍문동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연동교회에서는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 출신인 고찬익 집사가 장로로 선출되자 그 교회의 양반 신자들이 이탈하여 묘동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신 신분사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놓고 신분을 말하지 않지만 실제적으로는 끼리끼리 결혼하고 직업도 부도 세습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 사회학회 기관지인 [한국사회학]에 발표한 서석재씨의 [중산층 대형교회론]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그는 그 논문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새로 교회를 선택할 때 교회의 유명도나 신도들의 사회 경제적 수준 등을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목사의 설교 내용, 교단의 교리, 집과의 거리 등을 주로 감안해 교회를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대형교회 신자들 중 상당수는 소속한 교회가 [수준 높은 식자층과 중산층들이 다니는 교회]로 사회에 알려져 있어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며, 이 교회 신자가 됨으로써 자신도 중산층으로 동일시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브랜드화됩니다. 시장화됩니다. 예배도 공연화되어 재미를 파는 재미산업에 편승되게 됩니다. 교인은 예배자가 아니라 관람자가 되어 버리고 성도가 아니라 종교 소비자로 전락해 버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다니며 이런 교회 정도는 다녀야 사회적 체면이 선다는 식의 [지위상승 욕구]나 [나도 중산층]이라는 소속감을 가지려는 신자들의 성향이 이런 교회를 찾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지위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국회의원이 다니는 교회, 어느 재벌, 어느 유명인, 어느 연예인, 어느 유명한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 어느 교수 등등으로 차별화시키고 계층화시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접근할 수도 없는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계층화와 교회의 사회적 지위분리는 복음의 본질과는 먼 거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병자도, 건강한 자도, 창녀도, 세리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라고 말씀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계층화되는 교회나 지위 분리가 이루어 지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가 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 열린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가 되는 교회생활이 이루어져야 할 줄 믿습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새로운 공동체 건강한 교회론을 말씀하시는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지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성령님께서 평안의 매는 줄로 이미 하나게 되게 하였으니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현재형분사로 계속적으로 지키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연합하라거나 하나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미 연합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3장까지 이미 말씀하였습니다. 4장부터 실제 신앙생활을 말씀하시면서 첫 번째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건강하려면 온 교인들이 이미 하나가 된 것을 힘써서 보존하여야 합니다. 분열된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신분과 직분으로 계층화되어 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춤추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여자나 남자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전라도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다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하나를 7번이나 강조합니다.

 

왜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까?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는 교회의 지체로써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 안에 있는 단일성 즉 세분이 일체이시다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지상에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성령의 사역에 의해 나타나는 통일성이 우리의 하나됨의 근거이고 이유입니다.(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몸이 하나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지체들이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내가 전부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임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지체의 각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하나이고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무엇이 그 몸을 살아 있고 생명력있는 유기적 조직체가 되도록하는 것입니까?

바로 그것은 성령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성령의 활동의 결과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하나니며 언제나 동일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소망입니다. 앞을 바라보지 않고 현재의 상태에 눌러 앉아 안주하게 되면 분열과 분리를 면치 못합니다.

 

성자와 성자의 사역이 우리가 하나됨의 근거와 이유입니다(5). 주도 하나이요. 주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위격을 말합니다. 믿음도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만이 신앙의 대상입니다. 의롭게 되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교파, 인간, 제도, 전통,지역, 명분, 친분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세례도 하나입니다. 세례가 우리를 갈라 놓는 요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되어야 할 근거와 이유는 하나님이 하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만유의 아버지이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만유"란 넓게는 모든 사물 천지 만물 우주, 그 밖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좁게는 궁극적으로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면 믿는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건강한 교회 생활을 위해 하나됨을 어떻게 힘써 지킬 수 있겠습니까?

네 가지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되어 평안하게 살기 위하여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 이 네 가지 축이 있어야 수레바퀴가 잘 돌아갑니다. 우리의 내적 기질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함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 되어 건강한 교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겸손으로 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하나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 잘났다고 교만하면 교회생활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자만, 교만, 오만 자기 주장 만이 판을 치는 교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잘남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늘 입버릇이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기에 바쁩니다. 99개 좋은 점이 있어도 1개의 허물을 보면서 상대를 비난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이고 교회에서 최고의 신앙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의 특징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교만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암세포와 같습니다. 암세포가 있으면 몸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암세포는 여섯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증식 신호가 자체로 충분한 것입니다.

둘째는 항 증식 신호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머리의 지시를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도 교회에서 목사의 지시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멋대로 신앙생활 하려고 합니다. 누구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자신이 대장 노릇하여야 합니다.

셋째는 무제한 증식입니다.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신만 높고 자신만 인정받고 자신만 최고라는 것입니다.

넷째가 세포자살 회피입니다. 마땅이 죽어야 할 때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야 할 때 내여놓아야 할 때 내려 놓아야 하는데 자아가 살아 있고 자존심이 살아 있습니다.

다섯째가 지속적 혈관 신생 여섯째가 조직 침투 전이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속한 몸을 죽여 버립니다. 교만도 똑같습니다. 동조 세력을 확대 재생산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대항하고 분열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자신도 망합니다. 모든 불화와 분열, 불평과 원망과 시기 뒤에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늘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목사가 모자라고, 장로가 모자라고 이 교회가 모자라고 자기는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인은 평가자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참여자입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라고 했습니다. "종교를 믿는 제일 조건은 겸손이며 제2 조건도 겸손이다. 그리고 제 3의 조건도 겸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식도, 권력도, 명에도, 헌신도, 헌금도, 봉사도 겸손의 바구니에 담길 때 빛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의 바구니에 담기지 않으면 봉사의 권력화가 헌신의 권력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건강한 교회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D.L 무디는 "믿음의 최대의 것을 얻으며 사랑은 최대의 역사를 이루며 겸손은 최대의 것을 보존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하나되게 만들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왔습니다. 죽기까지 낮아지고 낮아졌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셨습니다. 교회가 하나되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려면 모든 것에 겸손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지위, 학문, 권력, 명예가 교회에서 춤을 추면 안 됩니다. 세상은 '자기 피알(PR) 시대'입니다. 자기의 능력이나 자랑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며,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지배하는 삶을 숭배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글로벌 경쟁력 시대에 겸손은 성장의 장애물이며, 힘을 매개로 한 문화 속에서 지배의 힘만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가르침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빈 깡통이 더욱 소리가 요란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튀는 물고기 도마에 먼저 오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 일제 시대 평양 지방 산정현교회 수석장로로 시무하고 있을 때 고당은 제자인 주기철이라는 젊은 목사를 청빙하여 담임목사로 보필을 하였습니다. 그 제자가 예배 시간에 늦었다고 예배를 인도하다 말고 노기 띤 큰 목소리로 "조 장로님은 늦었으니 자리에 앉지 마시고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계시오."라고 추상같이 호령했다고 합니다. 이럴 때 보통사람 같았으면 그냥 나가든가, 의자에 앉아서 목사에게 욕을 하며 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두쪽 세쪽으로 갈라졌을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는 하나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금 뭐가 있으면 얼마나 인간들이 교만합니까? “나이 어린 것이, 제자가, 나를 어떻게 보고”자존심이 상했다고 분노를 품고 매사 목사에게 협조하지 않고 험을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당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화석처럼 한 시간 반 동안을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주 목사께서 설교를 마치고는 "서 계시는 조 장로님, 기도해 주십시오" 하니 기도하시는데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요시한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기도드렸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 교우들은 큰 감동을 받고 울음바다가 되었고 그 사건 이후 교인들은 고당의 고매한 인격에 감동하여 더욱 존경심에 불탔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이와같은 생활이 바로 건강한 교회 생활입니다. 그런 겸손이 있었기에 온 교회가 하나가 되어 산정현 교회는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긴 건강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요즘 보면 교회의 큰 병중의 하나는 "멋진 교회 병"입니다. 신앙인들이 멋진 교회를 만나기 위해 교회 헌팅을 하고 다닙니다. 건강한 교회가 중요합니다. 겸손한 성도들이 모여 하나가 되는 건강한 교회가 중요합니다. 우리 열린 교회 식구들도 모든 겸손으로 하나가 되어 건강한 교회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가 하나 되어 건강한 교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온유해야 합니다.

이것은 거의 겸손과 항상 동반해서 사용되는 덕입니다. '속마음이 부드럽고 상냥하다는 뜻입니다. 사전에서는 온유를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온유(프라우스)는 "부드럽고 온화한 친절, 마음이 조급하지 아니하고 너그러운 상태, 경솔하지 아니하고 침착한 상태, 마음이 단기적이 아니라 여유 만만한 상태, 극단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라틴어의 온유(mitis)는 "말에게 재갈을 먹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온유(아나바)란 "굽히다, 굴복한다, 혹은 절을 한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에 굴복해서 굽히는 게 아니고 스스로 굽히는 것입니다. 온유는 폭력과 잔인, 교만의 반대이며, 친절, 사랑, 겸손 등과 사촌간입니다. 강퍅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집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폭발하지 말아야 합니다. 속된 말로 설치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함은 아닙니다. 강한 자가 자기의 힘을 조절함으로써 지니게 되는 부드러운 성품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의 자세를 온유함으로 할 때 화목이 있습니다. 일치가 있습니다. 야생짐승이 짐을 나르거나 밭을 가는 등의 일에 그 힘이 사용되어졌을 때 그것을 가리켜 "온유해졌다"고 말씀합니다. 온유하지 못하다는 것은 폭발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조정하는 힘이 없어질 때 우리는 폭발하고 맙니다. 그러면 하나됨은 깨어지고 맙니다. 온유는 자기 통제력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는 "모든 가능한 , 모든 종류의 겸손과 온유,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든지" 라는 말입니다. 주일 이든 평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주방일을 하든지, 이웃 사랑 바자회를 하든지, 마을 교회 모임을 갖든지, 구역 모임을 하든디 온유함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일하다 보면 폭발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도 결국 폭발하여 온유를 잃어버렸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 않습니까? 온유를 잃으면 공동체는 깨어집니다. 하나됨이 지속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온유하심이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거북이는 거북이의 목을 강제로 뺄 수 있는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북이의 목을 빼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북이를 따뜻한 화롯불 가까이에 놓아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센 바람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양이 계속 빛과 열을 내리게 되면 나그네는 자연스럽게 외투를 벗게 됩니다.

온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약하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드럽고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은 머저리같이 보이고 경쟁 사회에서 도태될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온유한 자가 승리합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했습니다. 사납고 힘센 짐승들이 세상을 다 차지할 것 같지만 기껏해야 험한 산을 차지할 뿐 온순한 짐승들이 넓은 평원을 차지합니다. 강한 이빨은 벌레도 잘먹지만 부드러운 혀는 쉽게 상하지 않습니다. 폭력과 칼로 세상을 정복하려 했던 나폴레옹, 히틀러, 뭇솔리니는 땅을 차지한 듯했으나 다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던 공산주의는 100년이 못되어 무너졌습니다. 무력으로 세계 최대의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원나라의 시조 징키스칸의 나라도 10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편37:11)."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원숙한 단계, 성숙한 단계, 정상급에 이르면 온유해지고, 모두 순해집니다. 운동도 그렇습니다. 골프도 힘주는 건 초보자입니다. 힘이 쑥 빠지는 것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하나 되어 건강한 교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화를 내지 않고 오래동안 자제한다."하라는 말입니다. "오래 견딤"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므로 견디는 마음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참아준다는 것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말을 참는 것입니다. 말을 참지 못하면 말썽이 납니다. 성도가 할 말 다 하면 교회가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음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6)"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백성들이 구경합니다. 관원들이 비웃습니다. 군인들이 희롱합니다. 신 포도주 주며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함께 달린 강도가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수모 고통을 당하였지만 오래 참았습니다. 끝까지 참았습니다. 참지 못하면 하나됨은 깨어지고 맙니다.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는 참아야 합니다. 참기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한번 참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횃불들고 대제사장들이 잡을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벌써 잡힐 것을 아시고 내려오는데 대제사장의 종중에 말고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옵니다. 그때 베드로가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치니까 귀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귀를 만지시면서 낫게 하시고 칼을 집에 꽂으면서 "칼을 든 자는 칼로망한다. 이것까지 참아라 내가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없도록 얼마든지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된다. 참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정도 오래 참아야 하나되는 건강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부인이 있습니다. 신앙이 좋으신 분입니다. 예전에 경주시에 있는 생가를 방문해 본 적이 있습니다. 늘 기도했다는 동산도 보았습니다. 아들인 박동규 교수의 글을 보면 남편이 시를 쓰면 방해가 되게 하지 않게 하기위해 애를 썼답니다. 박동규 교수가 6살 때였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에 아버지가 시를 쓰니까 어머니는 세달 된 여동생을 등에 업고 밖에 나갔답니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어머니가 들어오지 않자 아들을 깨워 찾아 보라고 했답니다. 어머니를 찾으러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전봇대가 있고 그 전봇대 옆에 나보다 더 큰 눈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눈사람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동규야~"하고 불렀답니다. 보니까 어머니였답니다. 눈을 철철 맞으며 보자기를 머리에 쓰고 있었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글 다 썼니?"라고 물어 보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내를 놓아두고 박목월 시인이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주도로 떠나 동거해 버린 것입니다. 제주 생활이 넉 달째 접어들어 겨울 날씨가 희끗 희끗 눈발을 뿌리던 어느날 부인은 제주에 갔답니다. 그리고는 남편과 H양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가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 놓았답니다. 보퉁이에는 목월과 H양이 입고 겨울을 지낼 수 있는 한복 한 벌씩이, 그리고 봉투에는 생활비에 보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답니다. 남편은 물론 H양에 대해서도 전혀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그들의 고달픈 객지 생활을 위로했답니다. 그 때 H양은, "사모님!"하고 울었답니다. 박목월 시인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답니다. 그 후 남편은 돌아 왔고 돌아온 남편에게 한마디도 탓하지 않고 반갑게 그리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답니다. 집으로 돌아온 박목월 시인은 전보다 더 충실한 가장이 되었답니다. 교회도 하나가 되는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우리가 오래 오래 참아야 합니다.

 

네 번째는 우리가 하나 되어 건강한 교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해야합니다.

용납이란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들임"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에 대하여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책벌을 보류하는 태도입니다.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교인들이 교회 생활하면서 한 번 자존심 상하고 잘 못보이면 끝까지 그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져 결국 하나되는 교회를 만들지 못합니다. 건강한 교회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 술먹고 풀어 버리는데 술도 먹지 않으면서 “어떻게 목사가 그럴 수 있냐고 어떻게 사모가 그럴 수 있냐고 어떻게 장로가 그럴 수 있냐”고 원수 삼고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각자 역할을 잘 감당하여 건강한 몸을 만들어야 하는데 분노를 품고 독이 되어 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해 버립니다. 인간은 다 연약하고 흠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다윗같은 성군도 이웃집 여자를 간음하였고 살인 교사를 하였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마가 문제로 바나바와 다투었고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돈을 좋아하고 설교를 못하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완벽하면 왜 교회에 나옵니까? 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습니까?

35살 나이로 노벨 평화상을 받고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미국 최고의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마틴 루터 킹같은 목사도 바람을 피웠습니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한 달에 25일 이상을 집에서 떠나 생활하다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FBI국장인 에드거 후버가 그를 몰락시키려고 도청을 하여 킹 목사의 아내 코레타에게 소포를 보냈을 때 그의 아내를 그것을 쓰레기 통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탄 퀴리 부인도 유부남 제자랑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노벨상마저 타지 못할 뻔 했다고 합니다. 링컨도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지만 얼마나 많은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까? 록펠러는 어떻습니까? 세계 제일의 전설적인 부호였던 록펠러는 시카코 대학을 비롯해서 12개의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 대학 및 연구소를 지어 사회에 기증하고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불편한 진실은 있습니다. 탐욕스런 악덕 자본가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의 돈을 '더러운 돈'이란 꼬리표가 붙여 주었습니다.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질렀고 뇌물과 리베이트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검은 돈'을 싹쓸이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온전한 한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건강한 교회생활을 하려면 검사의 역할이나 판사의 역할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변호사의 역할을 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 설교 잘 하시기로 유명한 찰스 스윈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주일날 설교 중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교통신호도 정확하게 지키십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예배가 다 끝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만 딴 생각을 하다가 빨간 불인데도 모르고 지나갔답니다. 아마 비판하기 좋아하는 성도들 같으면 시험들어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수삼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찍어 목사 추방운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교인들이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목사님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설교해 놓고 어겨 너무나 창피했답니다. 그래도 교인들을 쳐다보지고 않고 그냥 차를 몰아서 얼른 집으로 와 버렸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까 어디에 차 가지고 지나가셨죠? 내일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 만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이튿날 점심시간에 목사님은 목에다 무얼 걸고 약속 장소에 나갔답니다. 거기에는 '나는 죄인이다'(I am guilty)라고 쓰여 있었답니다. 교인들은 막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환영했답니다. 교인들의 반응에 목사님은 갑자기 뒤를 돌아섰는데 뒤에는 또 다른 글이 걸려있었답니다. 거기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쓰여 있었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서로 용서하고 살아야 하나되는 건강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인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을 저술한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과거 어떤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1987년에 알려지자, 즉각 죄를 시인하고 대학생 선교 단체인 IVCF 총재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였습니다. 교회도 사임하였습니다. 설교, 강연, 집필, 방송 등도 모두 끊고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지도 팀의 인도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2-3년이 지난 후 이 팀은 맥도날드 목사님이 완전 회복되었다는 판정을 내렸고, 이후에 사역으로 복귀하였습니다.

맥도날드 목사도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 다시 담임 목사로 청빙 받아 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진정 겸손하고 영적인 목사가 되어서 죄에 넘어진 목회자들의 멘토가 되었고, 성적인 죄로 물의를 일으켰던 클린튼 대통령의 영적 상담자가 되어 회복을 돕기도 했습니다.

서로 용서하되 무엇으로 용서합니까?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욕하고 침뱉고, 옆구리에 창을 박고 가시면류관을 씨우고 조롱하는 자들을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도 용서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마 18:22)고 했습니다. 하나되는 건강한 교회 생활을 하려면 용서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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