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6) 은혜로 문이 열립니다
이사야22:20-25
요즈음 대심방 중이라 가정을 심방하고 있는데 지난 주 한 집사님 심방을 하는데 동생들이 유명한 교회를 다니면 제자훈련도 받았는데 교회에서 교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 다녀봤자 배울 것이 없다고 교회 방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집사님은 홀로 예수를 믿어 결혼하고 자녀들이 다 신앙생활을 하고 아직 믿지 않은 남편도 전도하기 위해 기도 제목을 내 놓고 열심히 기도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똑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은혜로 문을 여는 사람이 있고 열린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은혜로 문을 여는 사람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열린 문도 닫아 버리는 사람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유다왕 히스기야 살았던 2명의 인물이 대조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셉나와 엘리아김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시대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직위를 받았지만 결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납니다. 한 사람은 은혜로 문이 열렸고 한 사람은 은혜를 받았지만 문이 닫혔습니다. 엘리아김에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우리 성도님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문이 열리고, 건강의 문이 열리고, 사업의 문이 열리고, 관계의 문이 열리는 축복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어 열어 주시면 그 무엇도 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공같은 인생으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셉나라는 인물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자리에 올랐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셉나가 어떤 사람입니까? 국고성을 맡고 왕궁을 맡은 자입니다. 궁중 살림을 맡은 총책임자입니다. 국내 대신 재무부 장관이지만 요즈음 말하면 국무총리급이 되는 사람입니다. 왕의 총애를 받은 제 2인자입니다. 얼마나 은혜를 받았습니까? 히스기야 왕 때인데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세 고관을 협상대표로 히스기야가 앗수르왕에게 보내는데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니라(사36:3)” 그런데 두 사람은 아버지가 소개 되어있는데 이 사람은 직책만 나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가 다메섹에서 피난 온 피난민이나 애굽인으로 추측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으로 국내 대신이 된 것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까? 누가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까? 만군의 주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그 은혜를 받았지만 어떤 인생으로 끝납니까?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광막한 지경은 큰 나라를 말하는 것으로 친 애굽파인 셈나는 애굽에 던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실 뭉치처럼 둘둘 감아서 드넓은 땅에 홱 던져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가 너를 꼭 틀어 쥐고 아주 멀리 집어 던져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던져 버리니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첫째는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곳은 광막한 곳입니다. 준비한 곳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에 더 언급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애굽에 도망갔던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무덤을 묻지 못한 것을 가장 수치스런 죽음으로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의 최고 불행입니다(암7:17) 살아있는 동안 이기적인 부를 누리는 것도 맘에 차지 않았는지 죽고 난 다음에도 자신의 몸을 넣어둘 화려한 무덤을 준비했지만 수치스런 객사로 인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둘째는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게 됩니다. 네가 즐겨 타던 너의 화려한 마차도 거기에 덩그렇게 버려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관직에서 쫓겨 납니다. 하나님이 끌어내려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직위해제와 강등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36:3절에 보면 서기관으로 강등됩니다.
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18절 중반 절을 보십시오.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누구겠습니까? 히스기야 왕입니다. 넓게는 하나님입니다.
이 때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 쳐들어와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721년에 완전히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반 앗수르 정책을 썼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지 14년 째 되던 bc 701년 경에 산헤립이 쳐들어 왔습니다. 유다의 46개의 성을 정복하고 모두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루살렘만 남겨 놓았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많은 공물을 요구하던 때였습니다. 유다로부터 조공을 약속받고 잠시 군대를 철수하였습니다. 산헤립은 금 30달란트와 은 300달란트를 요구했고 히스기야는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혀진 금까지 벗겨 조공을 바쳤습니다(왕하18:5-6) 그러나 예루살렘의 위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공을 받고도 다시 장군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치게 하였습니다(왕하18:7) 다시 처들어와 위협을 하였습니다.(36,37장)
그런데 이 막중한 임무를 받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는 유다 나라를 말합니다. 너는 도대체 이 나라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라 살림을 맡은 자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앗수르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권리로 왕들이나 들어가는 높은 곳에 무덤을 파서 사후 안식처를 꾸미느냐는 것입니다. 은혜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누리지 못하고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욕거리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유화하고 도구화하는 것입니다. 최고 관직을 받은 자로 개인적 무덤이나 챙기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나 드러내려고 하는 그를 하나님은 공처럼 던져 버린 것입니다. 마땅히 여호와 의지하여야 할 텐데 애굽을 의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한 그를 하나님은 던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믿음도 가지게 되었고, 결혼도 하고, 건강도 얻고, 교회도 다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은혜를 받고 그것을 남용하고 오용하다가 수치스런 인생으로 끝내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닫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명 대학교 교수가 성수행했다는 기사를 지난 주에도 보았습니다. 그 기사에 한 때 목회자가 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은 사람일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으로 얼마난 많이 은혜의 문을 닫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인간을 봅니다. 표절과 세습, 성과 돈에 함몰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의 문을 닫아 버리고 있습니까?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셉나처럼 살면 안됩니다. 천국이 없는 것처럼 살면 안 됩니다.
은혜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던 사울 왕같은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로 초대교회에 교인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을 속이다 처참하게 인생을 마감한 아나니아 삽비라같은 인생으로 끝내서는 안됩니다. 숱한 고생을 하고 요단강을 건넜지만 탐욕 때문에 가나안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일가족인 몰살당한 아간같은 가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은혜로 예수님의 제자로 신뢰를 받고 돈전대까지 맡았지만 결국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유다같은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때 믿음 좋아 일곱 집사로 뽑혔지만 결국 이단의 괴수로 전락한 니골라 집사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단단한 곳에 박힌 못처럼 쓰임받아야 합니다.
같은 시대 살아가는 엘리아김을 보십시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하나님이 지위를 견고하게 세워주고 가문의 영예를 크게 빛내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집안 전체가 그로 인해 부요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내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엘리아김이 뭐 특별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날에”입니다. 하나님께서 셉나를 내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쓰시고자 하는 날입니다. 내 종 엘리아김을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세 가지를 주는 것입니다.
첫째, 셉나의 옷을 그에게 입혀줍니다. 둘째, 셉나의 띠를 그에게 띠워 줍니다. 셋째, 22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에게 줍니다.
지위와 권세와 능력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내 종답게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앗수르 군대와 협상의 대표로 참석하여 결국 하룻밤에 185,000명의 군사를 물리치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첫째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에게 아버지같은 웃어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21)
옷은 사람의 신분과 권세를 나타냅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의 아버지가 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집안의 가장처럼 유다 백성을 관할하는 권위를 지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보살피듯이 백성의 유익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것입니다.(22)
열쇠는 직무를 상징하는 말로 왕궁의 주요 직무를 맡기겠다는 말입니다. 엘(하나님) 르야킴(일르켜 세우시다)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셋째 가문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누리겠다는 것입니다(24)
그 가문에 주어질 영광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엘리아김 가문에 대대로 다윗 왕국에서 직무를 맡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엘리아김 후손들이 누릴 영광이 그에게 걸린다는 것입니다. 단단히 박힌 못에 작은 그릇도 걸리고 모든 항아리도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엘리아김을 말합니다. 엘리아김 덕분에 후손들이 왕궁의 벼슬을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가족의 영광, 가문의 영광, 교회의 영광, 민족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걸려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천 경영의 달인>이라는 책을 쓴 윌리엄 폴라드가 있습니다. 서비스 마스터를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 서미스마스터 성공신화를 만들어 낸 사람입니다. 포춘지는 서비스 마스터를 “500대 서비스 기업 중 최고의 기업, 세계 1000대 기업 중 보석!”리가고 평가했습니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 2년 연속 1위를 한 기업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서비스마스터를 ' 가장 빛나는 별'이라 불렀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의 하나로 서비스마스터를 꼽았습니다. 그는 섬기는 지도자로 기업의 목적 목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의 발전을 도모하는데 두었다고 합니다. 직원 20만명의 발전 뿐 아니라 기업을 통해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는 수단 목표로는 탁월성을 추구하고 돈을 많이 버는데 두었다고 합니다. 진실한 신앙과 강한 목적의식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낸 윌리엄 폴라드의 25년 경영원칙은 4가지라고 합니다. “첫째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둘째 직원이 성장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우라. 셋째, 현재 속에 있는 분야에서 최고를 추구하라. 넷째, 회사의 수익 성장 목표를 달성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단단한 곳에 박힌 못처럼 쓰임받아야 하겠습니다. 사무엘 한 사람이 기도하니까 민족이 평안해졌습니다. 바울 한 사람이 그 수많은 고난과 비난을 극복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니까 세상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요나 한 사람이 국수주의 편견을 벗어나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 한 사람이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금식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3. 우리는 달리면 영원히 부서지지 않은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날은 특정한 장래의 어느 시점을 말합니다. 엘리아김의 가문에 주어진 영광이 미래 어느 시점에 급격히 쇠한다는 말입니다. “삭으리니”는 “떠나다 제거하다”는 말입니다. 박혔던 못이 뽑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세 개의 동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부러지고” “떨어지고” “부서진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다 그렇게 부러지고 떨어지고 부서지는 것입니다.
24절을 엘리아김의 선한 영향력으로 연결하지 않고 무분별한 친족 중용으로 해석하여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 속된 말로 쥐나 소나 등용을 했다는 것입니다. 족벌정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아김과 셉나를 대조하고 있는 본문의 성격상 25절을 셉나에 대한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칼빈같은 분이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던 우리가 받는 교훈은 같습니다. 이사야서는 근본적으로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이방 나라들은 다 망하고, 이스라엘도 유다도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통을 이어 메시아가 탄생하여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을 통해 그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예수님에 대하여 아주 정확하게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구속사적 관점으로 근본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범적인 설교나 윤리적 교훈적 설교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조금 설교에 대하여 배우고 성경에 대하여 배운 사람들은 구속사적 설교만 가치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성경을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는 로마서 한 권으로도 충분합니다.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이 주제만 말하고 끝내버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제는 숨겨졌고 그 주제를 말하기 위해 100페이지 2백페이지의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 속에서 구원으로만 끝나지 않는 이 땅에서 사는 인생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근본적인 주제를 잃어 버리면 안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기뻐하는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도와주고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기뻐하는 자가 되어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위로받고 내가 기뻐하고 내가 소망을 갖는 것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 소생하고 예배를 통해 위로 받고 예배를 통해 예배 전과 후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위로를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고 옆으로는 사람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만물을 다스리는 은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적인 주제가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인간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견고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근본적인 모델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으도 믿음의 조상이지만 우리의 근본적이 모델은 되지 못합니다. 단지 그림자일 뿐입니다. 모형일 뿐입니다. 그도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고 한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종을 첩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근본적으로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수많은 궁녀를 거르리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궁전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다윗도 위대한 신앙인이지만 우리의 근본적인 모델은 될 수 없습니다. 간음하고 자신의 부하를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세워준 바나바와 마가 문제로 갈라섰습니다. 오늘날 목사도 장로도 유명한 간증을 하는 간증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예인들이 간증하고 타락했다고 실망할 것 없습니다. 유명한 목사가 바람피웠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인간이 우리의 모델이 되겠습니까? 흠이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유다 나라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두 사람을 샘풀로 들어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사람들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셈나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엘리아김은 유다를 상징하여 말씀해 주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셈나는 근본적으로 불신자를 상징할 수 있고 엘리아김은 선택받은 신앙인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어 버렸고 유다는 잠시 남겨 놓았지마나 결국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델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분이 누구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까?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결국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까? 진정한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진정 다윗의 집의 열쇠를 쥐신 분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엘리아김이 차지한 모든 영광을 다 갖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권력, 예수님이 없는 부요, 예수님이 없는 명예, 예수님이 없는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결국은 하데스로 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열쇠는 예수님입니다.
오늘의 요절 말씀 22절을 보십시오. 엘리아김을 “내 종”이라고 말합니다. 셉나와는 구별된 칭호입니다. 내 종에게 다윗의 집의 열쇠를 누가 줍니까? 비록 엘리아김이 그 열쇠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열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계시록 3장 7절과 연결이 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말씀하시면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계 3:7)”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열쇠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 16:17-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천국 열쇠가 누구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열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그 예수님이 없으면 천국은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예수님을 전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진정 이 예수님을 전함으로 단단한 곳에 박힌 못에 생명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아들 딸도 우리 민족도 모든 열방이 예수님께 올 때 진정한 은혜를 누리면 열린 문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보석함의 열쇠, 안방 열쇠, 장롱 열쇠가 있어도 그 집에 들어가는 현관 열쇠가 없으면 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여는 열쇠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하면 어떤 열쇠도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열쇠를 주시는 분이고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천국 열쇠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어야 만 그 열쇠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주이신 달리면 영원히 부서지지 않은 은혜의 주인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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