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나기(3) 낙심 극복
갈6:6-10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이 중고 가정용품을 경매하였답니다.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위협하고 유혹하고 비난할 때 써먹던 도구들이 탁자 위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각각의 물건들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습니다. 탐욕엔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군거림의 가격에는 반도 못 미쳤습니다. 교만에는 더 비싼 가격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교만이 가장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탁자 한 모퉁이에 평범하고 볼품없고 반들반들 광채가 나기는커녕 낡아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물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게 나온 물건 중에 가장 비싼 것입니다. 어떤 손님이 물었습니다. "이게 뭐지요? 왜 이렇게 비싼 겁니까?" 사탄이 대답합니다. "아, 그거 말씀이군요. 이건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겁니다. 여기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쓸모 있는 도구이기도 하구요. 시기와 탐욕과 나태와 정욕이 성도들을 꺾지 못할 때 이 녀석이 신통하게 재주를 부려서 목적을 이룬단 말씀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이 탁자 위에 있는 모든 도구들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린 숫자보다 이 놈 하나로 넘어뜨린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이름이 뭡니까?" "네, 그건 낙심이라는 물건입니다."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등과 같이 영적 감수성을 있는 기독교 영성가로 <보이지 않는 것에 눈뜨다>를 쓴 마크 부캐넌 목사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책 13장에서 선한 일을 하면서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리려 할 때 쓰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낙심이라고 말합니다.
2014년도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첫 주일입니다. 혹시 낙심하며 올해까지만 하고 접어야 하겠다는 것이 있습니까? 목자, 구역장, 교사, 성가대, 교인, 봉사, 아버지 역할, 어머니 역할, 회사 올 해까지만 하고 접어야 하겠다는 성도님은 안 계십니까? “예수 믿어 보았자 별 수 없어, 기도해 보았자 소용없어, 교회 생활 열심히 해 보았자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뭐야, 자식들에게 잘 해 주어도 아무 소용없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이 뭐야, 남편에게 아내에게 잘 해 주어보았자 다 소용없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해도 돌아오는 것이 뭐야, 열심히 노력해 보아도 나아지는 게 뭐가 있어...” 이런 식으로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선한 일을 하여도 낙심할 조건과 환경은 많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다 우리를 지지해 주지도 않고 우리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1. 우리가 선을 행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언젠가 거둘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 낙심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 말씀처럼 “때가 이르면 거두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그러나(데) 우리가 선한 것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가르) 적절한 기회에 우리가 지치게 되지 않고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때때로 지치고 피곤하여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언젠가 적절한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내가 원하는 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가정 경제도 좋아지고, 남편도 술을 끊고, 가정도 행복해지고, 가정 경제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1년 다녀도 2년 다녀도 1년 기도해도 2년 기도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 낙심을 합니다. “예수 믿어도 별수 없네, 교회 다녀보았자 똑 같네” 그러면서 하나님께 낙심합니다. 목자로써 구역장으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내가 원하는 때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헌신하고 노력했는데 “사람들 별수 없네, 사람들 내 마음 몰라주네.” 그러면서 사람에게 낙심합니다. 열심히 나쁜 습관을 고치려고 애를 썼는데 여전히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돼.” 그러면서 자신에게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1-3)”라고 말씀합니다. 중국에는 '모소'라는 대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대나무는 산이나 밭에 심어놓아도 5년 동안은 땅 밖으로 전혀 솟아오르지 않고 땅속에서 뿌리만 사방으로 퍼져나갈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5년이 지난 다음 해부터는 하루에 한 자씩 무성하게 자라는데 불과 6주만에 15미터 이상 키가 자란다고 합니다.
근시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쉽게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 만나니까 순식간에 그 질병에서 치료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환자도 38년 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만약 37년 째 낙심하고 그 연못을 떠났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38년 째 예수님을 만나 단번에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속도(스피드)입니다. 조급증에 걸렸습니다. 냉장고도 '급속 냉각'을 해야 팔립니다. 인스턴트 음식도 몇 분 안에 완성되어야 합니다. 선거도 마감시간과 동시에 발표되는 출구조사를 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2, 3초를 참지 못해 '닫힘'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웹페이지가 로딩되는 1, 2초를 기다리지 못해 '뒤로' 버튼을 클릭합니다. 고속화되어야 합니다. 즉석화되어야 합니다. 연애도 번개팅을 해야 합니다. 복권도 즉석 복권을 사야 합니다. 버스를 탈 때도 도로까지 내려가야 하고 택시 탈 때도 도로로 뛰어 내려가 문고리를 잡고 외쳐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자연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산모는 잉태한 후 출산을 기다려야 하고, 농부가 씨를 뿌린 후 추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 속에서 생명은 힘을 만듭니다. 씨앗은 기다림 속에서 흙을 뚫을 힘을 만들고, 새는 기다림 속에서 알을 깰 힘을 만들며 애벌레는 번데기로 기다리는 동안 나비가 되어 날갯짓을 할 힘을 만듭니다. 기다림은 낭비의 시간이 아니고 창조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고통도 따르지만 가슴 떨림과 환희가 있는 소망의 시간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늘 희망이 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 때문에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세가, 유다가 기다리지 못해 어려움 당했습니다. 빠른 것도 필요하지만 인생은 기다림이 중요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기다림의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한 번에 되는 일이 얼마나 있습니까? 세계의 최고의 갑부 작가가 된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를 출판하기 위해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12개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만약 그가 기다리지 못하고 11번째 원고를 불태워 버리고 포기했다면 오늘날 그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의 작가 <마가렛 미첼>은 신문 기자였지만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어 무려 10년 동안 병상에서 소설을 썼습니다. 책을 내기 위해 3년 동안 무려 13개 출판사를 찾아 다녔지만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12번째 방문에서 낙심하고 포기했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8년 동안 1백 번이 넘는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려면 50년 100년 기다려야 합니다.
다니엘은 21일 동안 절식을 하면서 기도를 드리다가 비로소 21일 만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만약 20일 째 낙심하고 그만두었으면 그는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을 불을 내려 사를 정도로 기적을 일으킨 엘리야도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비오기를 일곱 번까지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만약 6번째 낙심하고 그만 두었다면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는 체험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9번 가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9번 거절해도 낙심하지 않고 열 번째 가서 또 다시 기적을 일으켜 애굽에서 백성을 해방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들을 준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25년 동안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노아는 120년입니다. 모세는 40년입니다. 다윗은 17년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기까지는 그 지루한 세월의 기다림 속에 더하여 3년이라는 감옥생활의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갈렙은 45년을 기다려 85세에 원하는 산지를 받았습니다. 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인물이 되려면 인생의 밑바닥을 통과하면서 기다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은 존재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성장과 훈련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기다림 없이 아이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연을 날리는 자들은 바람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바심을 낸다고 하나님의 시간표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하면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배가 곱아도 밥이 다 되기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치료를 받으려면 아무리 급해도 완전하게 봉합하기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가는 것입니다.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아야 축복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가장 좋은 시간에 상황은 바뀌어 집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합 2:3)" 하박국 선지자의 선언처럼 정녕 응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17년을 지루하게 기다림의 훈련을 받은 다윗은 시31:15절에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7년 동안 왕위에 오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낙심하여 그릇된 길로 간 아브라함처럼 이스마엘을 낳고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7)"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애 3:25)"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일 하다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일어나 기다리면 하나님이 선을 베풀어 주시고, 형통의 길이 열릴 때가 올 것입니다. 어느 날인가 웃음의 날이 오고 인생 역전의 날이 올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지루한 인생의 밑바닥 훈련을 통해 복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훈련시키기 원하십니다.
2. 우리가 선을 행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직역하면 “너희는 미혹되지 말라. 하나님께서 조롱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뿌린 이것을 또한 그가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쉬운말 성경은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가 왜 낙심합니까?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니까 낙심합니다. 열심히 회사에서 일했는데 사장님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승진시켜 주는데 자신은 한직으로 보냅니다. 그러면 사장한테 속았다고 생각하며 낙심합니다. 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낙심합니까? 하나님이 내 사정 내 형편 내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낙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왜 이런 고난과 고통에 나를 방치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았다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 우리의 형편, 우리의 헌신, 우리의 무능력, 우리의 눈물, 우리의 기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속으며 조롱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시편 42편을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이고 후대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 수집한 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기자가 다윗이라면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 나왔을 때의 기록입니다. 아들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난 다윗이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6절에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11절에 "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균에 감염되면 사람의 몸이 풀이 죽고 누어 꼼짝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낙심에 마음이 감염되면 소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왜 낙심합니까? 2절을 보세요.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낙심합니다(2).
예루살렘에서 떨어져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어릴 때부터 신뢰했는데 원치 않은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 어찌하여 왜 이런 결과를 주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어찌하여(5.9.11)"라는 질문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일이 안된 이유를 모를 때 낙심합니다(2,9) 어찌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잊었는지, 어찌하여 원수들이 핍박하는지를 몰라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를 7곱 번이나 계속 반복하여 질문합니다. 사람들이 비방하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종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뼈를 찌르는 칼같이 대적들이 비방을 합니다.
그럴 때 시편 기자는 어떻게 낙심에서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윗의 사정을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5절, 11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일어납니다.(1,2,6,8)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약속 붙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6,5,8,11).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을 한 루터의 아내는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라는 수녀입니다. 수녀원을 탈출하였습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녀원에서 탈출하는 수녀를 도왔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운 청어를 담은 비린내 나는 큰 통에 수녀들을 함께 넣어서 위장하여 수녀원을 탈출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루터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루터가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루터 종교 개혁을 할 때 이제 최후 변론을 하기 위하여 웜스 공회에 나가야만 했답니다. 이 변론에서 정죄되면 그는 화형을 당하던지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낙심하였답니다. 루터가 두려워 떨고 있자 그녀는 상복을 입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왜 우냐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돌아 가셔셔 웁니다." "왜 이런 망령된 소리를 하느냐"고 루터는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부인은 "왜 하나님이 돌아가지지 않았는데 당신은 그렇게 낙심하며 두려워하고 있느냐"고 했다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루터는 "웜스 공회의 모든 기와장이 다 마귀일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나아간다."하며 소리치고 나가 종교개혁을 단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에게 속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조롱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의 헌신을 다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급 주실 것이고 우리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아무도 내 사정 몰라주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가 선을 행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거둔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7절에 “그대로 거두리라” 8절에 “거두고 거두리라” 9절에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합니다. 8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데리세이”라는 말은 “추수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기대한 바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없으면 낙심도 없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기대, 부모에 대한 기대, 교역자와 직분자에 대한 기대, 성도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그 기대가 거품으로 끝날 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어떤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 결실의 계절에 그 씨앗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을 심었으면 반드시 선한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수확은 결정이 됩니다. 육체를 따라 심을 것인가? 성령께서 주장하는 대로 심을 것인가? 그 결정에 따라 우리의 열매는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체의 열매는 5장 19-21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5:22-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믿음을 심으면 믿음의 열매를 거둡니다. 소망을 심으면 소망의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둡니다. 용서를 심으면 용서의 열매를 거둡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0-41)"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가르치는 자에게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기회 주어졌을 때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되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선한 일을 하지 않고 낙심된 일만 하면 안 됩니다. 가르치는 자 비방하고 낙심되게 만들고 가난한 형제들 낙심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자꾸 좋은 일하면서 낙심하며 낙심을 전염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죄명은 ‘동료 병사들을 낙심시킨 죄’였답니다. 이 사람이 한 일은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얼마나 강한가’ ‘왜 우리는 적을 방어하기 어려운가’ 또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거라’며 여러 말들을 떠벌리고 다녔답니다. 낙심시키는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그의 죄목은 ‘동료 병사들을 낙심시킨 죄’였답니다. 우리는 낙심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선을 심었으며 지금 나타나는 일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맺혀 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열방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것을 심으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즈음 새벽 기도회 시간에 사도행전을 보고 있는데 바울의 삶을 보면 낙심할 만한 것이 수없이 깔려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환영해 주는 사람들보다는 낙심할 만한 일들이 생깁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고 빌립보에 갔습니다. 점치는 아이를 고쳤다가 감옥에 가 매를 맞습니다. 선한 일 하는데 이런 결과가 오면 우리는 금방 낙심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데살로니가 큰 부흥이 있었지만 계속 깡패 같은 유대인들이 좋아와 비방하고 때립니다. 베뢰아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스토커처럼 쫓아옵니다. 디모데와 실라를 남겨두고 혼자 아테네로 고린도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지만 고린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설교 못한다고 조롱합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님도 제 설교 들으면서 너무 길고 너무 빠르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그런 말 들어도 저도 실망하지 않으니까요? 알면서도 고치기 힘든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늘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 말이 늘여 초신자가 낙심하고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는 불평을 들었답니다. 조금 빨리하고 생동감을 주려고 말에 강약을 주어 설교하려해도 고쳐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를 하는데 따발총처럼 빠르게 설교하고 1시간 동안을 설교했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궁금해 목사님께 물었답니다. “오늘 실수로 아내의 틀니를 내 틀니인 줄 알고 끼었더니 그칠 줄 모르고 설교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기대는 많이 하지만 자신을 고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어떤 비난과 어떤 방해, 어떤 장애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언적인 말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이 땅에서 기대한 바를 이루려고 하니까 자꾸 낙심합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의로우신 재판장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행을 정말 알아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 다 닦아 주시고 우리의 수고 다 알아주시고 우리의 심음 다 평가해 줄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십시오. 인류 구원이라는 선한 일을 위해 전파하시고, 가르치고,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다 환경합니까? 끝까지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조롱하고, 협박하고, 고발하고, 모욕을 주고, 배반하고, 비협조적이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처형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며 선한 일을 포기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인류 구원 사역을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좋은 일 하면서 이 땅에서 바로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신앙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세, 예레미야, 다윗, 이사야, 하박국,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 등 수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다가 얼마나 낙심할 일을 당하였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고 사명을 접지 않았습니다.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나 마침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 땅에 이루어 드렸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에 내 이름을 넣어 9절 말씀을 크게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다시 일어나기(3) 낙심 극복
갈6:7-9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이 중고 가정용품을 경매하였답니다.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위협하고 유혹하고 비난할 때 써먹던 도구들이 탁자 위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각각의 물건들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습니다. 탐욕엔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군거림의 가격에는 반도 못 미쳤습니다. 교만에는 더 비싼 가격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교만이 가장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탁자 한 모퉁이에 평범하고 볼품없고 반들반들 광채가 나기는커녕 낡아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물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게 나온 물건 중에 가장 비싼 것입니다. 어떤 손님이 물었습니다. "이게 뭐지요? 왜 이렇게 비싼 겁니까?" 사탄이 대답합니다. "아, 그거 말씀이군요. 이건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겁니다. 여기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쓸모 있는 도구이기도 하구요. 시기와 탐욕과 나태와 정욕이 성도들을 꺾지 못할 때 이 녀석이 신통하게 재주를 부려서 목적을 이룬단 말씀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이 탁자 위에 있는 모든 도구들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린 숫자보다 이 놈 하나로 넘어뜨린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이름이 뭡니까?" "네, 그건 낙심이라는 물건입니다."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등과 같이 영적 감수성을 있는 기독교 영성가로 <보이지 않는 것에 눈뜨다>를 쓴 마크 부캐넌 목사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책 13장에서 선한 일을 하면서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넘어뜨리려 할 때 쓰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낙심이라고 말합니다.
2014년도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첫 주일입니다. 혹시 낙심하며 올해까지만 하고 접어야 하겠다는 것이 있습니까? 목자, 구역장, 교사, 성가대, 교인, 봉사, 아버지 역할, 어머니 역할, 회사 올 해까지만 하고 접어야 하겠다는 성도님은 안 계십니까? “예수 믿어 보았자 별 수 없어, 기도해 보았자 소용없어, 교회 생활 열심히 해 보았자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뭐야, 자식들에게 잘 해 주어도 아무 소용없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이 뭐야, 남편에게 아내에게 잘 해 주어보았자 다 소용없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해도 돌아오는 것이 뭐야, 열심히 노력해 보아도 나아지는 게 뭐가 있어...” 이런 식으로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선한 일을 하여도 낙심할 조건과 환경은 많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다 우리를 지지해 주지도 않고 우리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1. 우리가 선을 행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언젠가 거둘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 낙심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 말씀처럼 “때가 이르면 거두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그러나(데) 우리가 선한 것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가르) 적절한 기회에 우리가 지치게 되지 않고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때때로 지치고 피곤하여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언젠가 적절한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내가 원하는 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가정 경제도 좋아지고, 남편도 술을 끊고, 가정도 행복해지고, 가정 경제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1년 다녀도 2년 다녀도 1년 기도해도 2년 기도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 낙심을 합니다. “예수 믿어도 별수 없네, 교회 다녀보았자 똑 같네” 그러면서 하나님께 낙심합니다. 목자로써 구역장으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내가 원하는 때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헌신하고 노력했는데 “사람들 별수 없네, 사람들 내 마음 몰라주네.” 그러면서 사람에게 낙심합니다. 열심히 나쁜 습관을 고치려고 애를 썼는데 여전히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돼.” 그러면서 자신에게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1-3)”라고 말씀합니다. 중국에는 '모소'라는 대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대나무는 산이나 밭에 심어놓아도 5년 동안은 땅 밖으로 전혀 솟아오르지 않고 땅속에서 뿌리만 사방으로 퍼져나갈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5년이 지난 다음 해부터는 하루에 한 자씩 무성하게 자라는데 불과 6주만에 15미터 이상 키가 자란다고 합니다.
근시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쉽게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 만나니까 순식간에 그 질병에서 치료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환자도 38년 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만약 37년 째 낙심하고 그 연못을 떠났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38년 째 예수님을 만나 단번에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속도(스피드)입니다. 조급증에 걸렸습니다. 냉장고도 '급속 냉각'을 해야 팔립니다. 인스턴트 음식도 몇 분 안에 완성되어야 합니다. 선거도 마감시간과 동시에 발표되는 출구조사를 보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2, 3초를 참지 못해 '닫힘'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웹페이지가 로딩되는 1, 2초를 기다리지 못해 '뒤로' 버튼을 클릭합니다. 고속화되어야 합니다. 즉석화되어야 합니다. 연애도 번개팅을 해야 합니다. 복권도 즉석 복권을 사야 합니다. 버스를 탈 때도 도로까지 내려가야 하고 택시 탈 때도 도로로 뛰어 내려가 문고리를 잡고 외쳐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자연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산모는 잉태한 후 출산을 기다려야 하고, 농부가 씨를 뿌린 후 추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 속에서 생명은 힘을 만듭니다. 씨앗은 기다림 속에서 흙을 뚫을 힘을 만들고, 새는 기다림 속에서 알을 깰 힘을 만들며 애벌레는 번데기로 기다리는 동안 나비가 되어 날갯짓을 할 힘을 만듭니다. 기다림은 낭비의 시간이 아니고 창조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고통도 따르지만 가슴 떨림과 환희가 있는 소망의 시간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늘 희망이 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 때문에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세가, 유다가 기다리지 못해 어려움 당했습니다. 빠른 것도 필요하지만 인생은 기다림이 중요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기다림의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한 번에 되는 일이 얼마나 있습니까? 세계의 최고의 갑부 작가가 된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를 출판하기 위해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12개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만약 그가 기다리지 못하고 11번째 원고를 불태워 버리고 포기했다면 오늘날 그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의 작가 <마가렛 미첼>은 신문 기자였지만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어 무려 10년 동안 병상에서 소설을 썼습니다. 책을 내기 위해 3년 동안 무려 13개 출판사를 찾아 다녔지만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12번째 방문에서 낙심하고 포기했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8년 동안 1백 번이 넘는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려면 50년 100년 기다려야 합니다.
다니엘은 21일 동안 절식을 하면서 기도를 드리다가 비로소 21일 만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만약 20일 째 낙심하고 그만두었으면 그는 기도 응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을 불을 내려 사를 정도로 기적을 일으킨 엘리야도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비오기를 일곱 번까지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만약 6번째 낙심하고 그만 두었다면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는 체험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9번 가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9번 거절해도 낙심하지 않고 열 번째 가서 또 다시 기적을 일으켜 애굽에서 백성을 해방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들을 준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25년 동안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노아는 120년입니다. 모세는 40년입니다. 다윗은 17년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기까지는 그 지루한 세월의 기다림 속에 더하여 3년이라는 감옥생활의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갈렙은 45년을 기다려 85세에 원하는 산지를 받았습니다. 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인물이 되려면 인생의 밑바닥을 통과하면서 기다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은 존재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성장과 훈련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기다림 없이 아이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연을 날리는 자들은 바람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바심을 낸다고 하나님의 시간표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하면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배가 곱아도 밥이 다 되기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치료를 받으려면 아무리 급해도 완전하게 봉합하기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가는 것입니다.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아야 축복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가장 좋은 시간에 상황은 바뀌어 집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합 2:3)" 하박국 선지자의 선언처럼 정녕 응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17년을 지루하게 기다림의 훈련을 받은 다윗은 시31:15절에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도 7년 동안 왕위에 오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낙심하여 그릇된 길로 간 아브라함처럼 이스마엘을 낳고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7)"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애 3:25)"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일 하다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일어나 기다리면 하나님이 선을 베풀어 주시고, 형통의 길이 열릴 때가 올 것입니다. 어느 날인가 웃음의 날이 오고 인생 역전의 날이 올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지루한 인생의 밑바닥 훈련을 통해 복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훈련시키기 원하십니다.
2. 우리가 선을 행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직역하면 “너희는 미혹되지 말라. 하나님께서 조롱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뿌린 이것을 또한 그가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쉬운말 성경은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가 왜 낙심합니까?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니까 낙심합니다. 열심히 회사에서 일했는데 사장님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승진시켜 주는데 자신은 한직으로 보냅니다. 그러면 사장한테 속았다고 생각하며 낙심합니다. 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낙심합니까? 하나님이 내 사정 내 형편 내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낙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왜 이런 고난과 고통에 나를 방치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았다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 우리의 형편, 우리의 헌신, 우리의 무능력, 우리의 눈물, 우리의 기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속으며 조롱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시편 42편을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이고 후대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 수집한 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기자가 다윗이라면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 나왔을 때의 기록입니다. 아들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난 다윗이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6절에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11절에 "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균에 감염되면 사람의 몸이 풀이 죽고 누어 꼼짝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낙심에 마음이 감염되면 소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왜 낙심합니까? 2절을 보세요.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낙심합니다(2).
예루살렘에서 떨어져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어릴 때부터 신뢰했는데 원치 않은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 어찌하여 왜 이런 결과를 주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어찌하여(5.9.11)"라는 질문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일이 안된 이유를 모를 때 낙심합니다(2,9) 어찌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잊었는지, 어찌하여 원수들이 핍박하는지를 몰라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를 7곱 번이나 계속 반복하여 질문합니다. 사람들이 비방하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종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뼈를 찌르는 칼같이 대적들이 비방을 합니다.
그럴 때 시편 기자는 어떻게 낙심에서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윗의 사정을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5절, 11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일어납니다.(1,2,6,8)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약속 붙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6,5,8,11).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을 한 루터의 아내는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라는 수녀입니다. 수녀원을 탈출하였습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녀원에서 탈출하는 수녀를 도왔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운 청어를 담은 비린내 나는 큰 통에 수녀들을 함께 넣어서 위장하여 수녀원을 탈출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루터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루터가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루터 종교 개혁을 할 때 이제 최후 변론을 하기 위하여 웜스 공회에 나가야만 했답니다. 이 변론에서 정죄되면 그는 화형을 당하던지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낙심하였답니다. 루터가 두려워 떨고 있자 그녀는 상복을 입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왜 우냐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돌아 가셔셔 웁니다." "왜 이런 망령된 소리를 하느냐"고 루터는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부인은 "왜 하나님이 돌아가지지 않았는데 당신은 그렇게 낙심하며 두려워하고 있느냐"고 했다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루터는 "웜스 공회의 모든 기와장이 다 마귀일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나아간다."하며 소리치고 나가 종교개혁을 단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에게 속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조롱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의 헌신을 다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급 주실 것이고 우리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아무도 내 사정 몰라주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가 선을 행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거둔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7절에 “그대로 거두리라” 8절에 “거두고 거두리라” 9절에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합니다. 8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데리세이”라는 말은 “추수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기대한 바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없으면 낙심도 없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기대, 부모에 대한 기대, 교역자와 직분자에 대한 기대, 성도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그 기대가 거품으로 끝날 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어떤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 결실의 계절에 그 씨앗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을 심었으면 반드시 선한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수확은 결정이 됩니다. 육체를 따라 심을 것인가? 성령께서 주장하는 대로 심을 것인가? 그 결정에 따라 우리의 열매는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육체의 열매는 5장 19-21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5:22-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믿음을 심으면 믿음의 열매를 거둡니다. 소망을 심으면 소망의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둡니다. 용서를 심으면 용서의 열매를 거둡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0-41)"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가르치는 자에게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기회 주어졌을 때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되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선한 일을 하지 않고 낙심된 일만 하면 안 됩니다. 가르치는 자 비방하고 낙심되게 만들고 가난한 형제들 낙심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자꾸 좋은 일하면서 낙심하며 낙심을 전염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죄명은 ‘동료 병사들을 낙심시킨 죄’였답니다. 이 사람이 한 일은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얼마나 강한가’ ‘왜 우리는 적을 방어하기 어려운가’ 또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거라’며 여러 말들을 떠벌리고 다녔답니다. 낙심시키는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그의 죄목은 ‘동료 병사들을 낙심시킨 죄’였답니다. 우리는 낙심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선을 심었으며 지금 나타나는 일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맺혀 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열방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것을 심으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즈음 새벽 기도회 시간에 사도행전을 보고 있는데 바울의 삶을 보면 낙심할 만한 것이 수없이 깔려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환영해 주는 사람들보다는 낙심할 만한 일들이 생깁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지만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고 빌립보에 갔습니다. 점치는 아이를 고쳤다가 감옥에 가 매를 맞습니다. 선한 일 하는데 이런 결과가 오면 우리는 금방 낙심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데살로니가 큰 부흥이 있었지만 계속 깡패 같은 유대인들이 좋아와 비방하고 때립니다. 베뢰아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스토커처럼 쫓아옵니다. 디모데와 실라를 남겨두고 혼자 아테네로 고린도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지만 고린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설교 못한다고 조롱합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님도 제 설교 들으면서 너무 길고 너무 빠르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그런 말 들어도 저도 실망하지 않으니까요? 알면서도 고치기 힘든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늘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 말이 늘여 초신자가 낙심하고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는 불평을 들었답니다. 조금 빨리하고 생동감을 주려고 말에 강약을 주어 설교하려해도 고쳐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를 하는데 따발총처럼 빠르게 설교하고 1시간 동안을 설교했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궁금해 목사님께 물었답니다. “오늘 실수로 아내의 틀니를 내 틀니인 줄 알고 끼었더니 그칠 줄 모르고 설교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기대는 많이 하지만 자신을 고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어떤 비난과 어떤 방해, 어떤 장애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언적인 말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이 땅에서 기대한 바를 이루려고 하니까 자꾸 낙심합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의로우신 재판장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행을 정말 알아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 다 닦아 주시고 우리의 수고 다 알아주시고 우리의 심음 다 평가해 줄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십시오. 인류 구원이라는 선한 일을 위해 전파하시고, 가르치고,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다 환경합니까? 끝까지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조롱하고, 협박하고, 고발하고, 모욕을 주고, 배반하고, 비협조적이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처형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며 선한 일을 포기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인류 구원 사역을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좋은 일 하면서 이 땅에서 바로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신앙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세, 예레미야, 다윗, 이사야, 하박국,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 등 수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다가 얼마나 낙심할 일을 당하였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고 사명을 접지 않았습니다.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나 마침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 땅에 이루어 드렸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에 내 이름을 넣어 9절 말씀을 크게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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