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27) 믿음의 정수
히11:35-40
때로 사람들은 “한국 대표시의 정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겠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겠습니다.” 등과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 말 사전을 찾아 보면 정수(精髓)라는 말은 “뼈 속에 있는 골수. 사물의 중심이 되는 골자 또는 요점. 핵심”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26주에 걸쳐 살펴본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을 통하여 믿음이 정수가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믿음의 정수는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마감하면서 하나님은 히브리서 11장을 통하여 믿음의 정수는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3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이제 죽음과 싸워 승리한 여인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최대의 적인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죽음의 두려움, 죽음의 고통, 죽음의 불안, 죽음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 여자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구약에서 죽음을 극복한 여자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사렙다의 과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기적으로 살아난 아들입니다. 어느날 병이 들어 심히 위중하다가 그 때 엘리야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엘리야의 기도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되살림 받았습니다(왕상17:23). 수넴의 여인은 엘리사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부활로 받았습니다(왕하4:35-37). 나인성 과부는 죽은 아들을 예수로 말미암아 부활로 다시 받았습니다(눅7:11-14).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 형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죽은 오라비를 부활로 받았습니다(요11:17-44). 도르가(행 9:36, 41)는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죽음의 고통과 죽음의 슬픔과 죽음의 아픔을 이긴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를 통하여 죽은 딸을 부활로 받았습니다(막5:40-43).
이런 부활도 있지만 더 좋은 부활이 있습니다. 당장 죽음에서 일어나지는 못하였습니다. 심각한 죽음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부활, 영원한 천국, 예수님의 재림을 믿었기 때문에 구차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악형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악형은 헬라어로 고문대나 곤봉을 뜻하는 말로 '북을 치듯이 죽도록 때린다'는 뜻입니다. 이 형벌은 죄수를 형틀 위에 누인 후에 사지가 팽팽해지도록 말뚝에 잡아 맨 뒤에 사지의 연결 부분을 창으로 찔러 피를 내고 나서, 배와 가슴을 북치듯이 쳐서 죽이는 극형을 가리킵니다. 죽도로 때리고 고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순교 열전>에 보면 김대운 전도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6.25 때 평양의 장진 교회에서 시무하였다고 합니다. 체포당하여 사리원으로 끌려가 악랄한 내무 서원들로부터 회유를 받아야 했답니다. "예수만 믿지 않는다고 하시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가 예수 때문에 죽어야 되겠는가?" 그러나 김 전도사는 신앙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주님을 배반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분을 믿어야 삽니다. 이것이 생명의 비밀입니다." 그때였답니다. 한 내무 서원이 소리쳤답니다. "저 새끼 혀를 잘라 버려." 몇 사람의 젊은이들이 김전도사님에게 달려들어 혀를 늘여 칼로 잘라 버렸답니다. 입에서 피를 토해내는 김전도사님은 말을 할 수 없자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쳐들었답니다. 상관인 듯한 자가 또 한 번 명령했답니다. "저 자식 우리말 듣지 않는 저 귀를 잘라 버려." 그래도 지지 않고 십자 성호를 그었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죽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믿음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정수는 죽음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죽음 후에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믿음, 마지막 부활한다는 믿음입니다.
왜 이렇게 죽어갈 수 있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함입니다. 일시적인 부활이 아닙니다. 여인들의 자녀들은 부활하였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부활은 죽음이 없는 부활입니다. '더 좋은 부활'은 둘째 부활, 곧 마지막 부활입니다. 예수 재림 시에 받을 영화로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이런 선물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학의 선구자 퀴블러 로스는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 오면 부정하고 분노하며, 타협하고, 우울해 하다 결국 인정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무엇이 이런 죽음의 과정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부활 신앙으로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죽음 앞에서 무엇으로 죽음을 이겼겠습니까? 믿음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곧 오시고 죽은 자들도 부활한다는 믿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가족의 죽음을 억울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2. 믿음의 정수는 믿음으로 시련을 이기는 것입니다.
더 좋은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자가 되고, 행복하고, 건강하고, 성공하는 일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절대 고생하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으며, 늘 승리만 한다고 믿음면 아직 믿음의 정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믿음을 철저히 실력으로 무장하여 사회의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고지론적 신앙으로 이해하면 그 믿음은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1등은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1등이 안되면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고난이 다가오고 핍박이 다가오면 믿음을 떠나 버립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인본주의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은 신앙의 정수가 아닙니다. 시련을 이기는 믿음이 믿음의 정수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이 믿음의 정수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위기와 고난이 다가와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그 시련을 이기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의 신앙입니다. 믿음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피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없어도, 편함이 없어도, 기쁨이 없어도 믿음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이 믿음의 정수입니다.
3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조롱당하고 채찍질은 당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만 충성되이 증거 한다는 이유 때문에 제사장 임멜의 아들인 바스훌에게 매를 맞았습니다(렘20:2).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렘29:7, 9). 예수의 사도들은 새 술에 취한 자로 오해받았습니다(행2:12). 바울은 염병 같은 놈으로, 미친놈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행26:24). 수없는 굶주림과, 목마름, 매맞음, 헐벗음이 계속되었습니다(고후11:16-33).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11:36). 예레미야가 그러했습니다(렘20:2, 37:15, 39:26). 베드로가 그러하고(행12:3-5),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고후11:23). 미가야 선지자가 그 곳에서 고생의 떡과 물을 마셨습니다(왕상22:27).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진실을 말하다가 여호와의 전에서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대하24:20-22). 나봇은 조상 전래의 유업인 포도원을 지키려 하다가 왕과 백성이 함께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왕상21:13). 스데반 집사는 예수를 증거 하다가 동족인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행7:59).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므낫세 왕에 의해 나무로 만든 톱에 의해 그 몸이 두동강이로 쪼개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므낫세 왕의 우상 숭배 강요에 불복하고, 오히려 그 죄를 책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세벨은 그의 칼로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왕상18:13). 예레미야 시대 우리야도 그렇게 죽임을 당한바 되었습니다(렘26:23). 신약 시대 사도 야고보도 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행 12:2).
양과 염소의 가죽옷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그러했고(왕하1:8, 왕상19:9), 엘리사도 그러했고(왕하2:8), 세례 요한도 그러했습니다(막1:6). 광야와 암혈과 산중과 토굴이 저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습니다(히11:38). 이런 시련을 그들은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이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믿음으로 견뎌 이겼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드로처럼 옥문에서 나오게 하기도 하지만 야고보처럼 옥문이 열리지 않고 모진 고문을 견디며 순교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숨막히는 상황을 견디게 하고, 참게하는 능력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순교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하였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 때문에 시련과 환난과 핍박을 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고난을 이긴 사람들에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가로를 쳐서 말씀하는 것은 성경에 여러 사본이 있는데 중요 사본 중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어 원본에 있는지 없는지 몰라 이렇게 가로를 쳐 놓은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현대인이 성경은 “세상은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로 번역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생태학적으로, 본질적으로 이 세상이 저들에게 적합하지 못한 장소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세상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고 집착하지도 않았으며 마치 불편한 잠자리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을 소홀히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명의 땅으로 생각했지 전부이거나 영원한 것으로 집착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전혀 이 세상 애굽과 고모라는 예수의 백성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돼지가 거처하는 장소는 생태학적으로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곳입니다. 프랑스에 사는 어떤 부부가 아이를 낳을 것인가를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개를 기를 것인가 고양이를 기를 것인가를 놓고 싸웠다고 합니다. 프랑스 거리는 온통 개로 충만하다고 합니다. 개병원, 개 목용탕, 개 호텔, 개 디스코택, 그래서 프랑스 거리는 개똥 충만하고 파리들이 들끓어 파리에는 파리떼로 충만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믿음이 희롱당하고 조롱당하는 세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생명을 받은 신자들은 본질적으로 공중권세 잡의 사탄이 영향권 아래 있어 죄가 지배하고 타락한 질서가 지배하는 이 세상이 부적합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헤매며 다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았던 초대 교인들도 악형을 받았습니다. 조롱을 당했습니다. 온몸이 녹초가 되는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결박당하고 옥에 갇히는 시험을 당했습니다. 돌로 맞고 톱으로 켜는 고통을 당했으며 칼에 목이 잘리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는 시련을 당했습니다.
믿고 살 때 다가오는 이런 시련의 문제를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길 앞에 놓여 있는 바위를 치워주는 것이 아니라 바위에 부딪혀 아프고 힘들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알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삶은 내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많은 사건과 사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시련을 무엇으로 감당하겠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마침내 승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조롱하던 자들은, “네가 메시아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다면, 십자가를 부수고 내려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력한 자처럼,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며 죽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을 영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순교일을 생일로 지킬 정도로 그 만큼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답니다. 조선조 말엽인 1884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도하다 숨진 순교자 수는 2천 6백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복음은 이 땅에서 활짝 꽃을 피운 것입니다. 천황숭배를 거부하다 7년간 옥고 끝에 1944년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모진 악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굵은 못이, 수 백개 박혀 있는 널빤지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악형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조금만 자신의 신앙을 굽히고 타협을 하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믿음으로 구차히 자기 목숨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옥중에서 `주님을 위하여/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주님을 위하여/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나는 무슨 말로 답하랴'라고 말하며 고난을 인내하며 감당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의 정수입니다. 이것이 어둠이 빛을 감당하지 못하듯 세상이 두려워하는 믿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믿음 때문에 불이익과 불편함과 불쾌함을 당해도 더 나은 부활을 바라보며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 나라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처럼 순례자처럼 살아가기 때문에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후 4세기 중엽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톰은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설교도 잘하고,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끼쳤던 유명한 분이었답니다. 핍박자들에게 붙들렸는데 그들은 크리소스톰을 완전히 패배를 시켜 버릴까를 의논했답니다. 어떤 사람이 제안하기를 “그를 깊은 감옥에 가두어서, 평생토록 감옥 속에서 썩게 만드십시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반대했답니다. “안될 말입니다. 그러면 그는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 시간을 가지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기도 생활을 힘쓸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이렇게 제안을 했답니다. “그러면 그를 굶겨서 죽여 버리십시다.” 또 반대 의견이 나왔답니다. “그러면 그는 자동으로 금식 기도를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답니다. “그러면 그를 불러내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서, 심하게 매질을 합시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를 했답니다. “기독교인들은 매를 맞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맞는다고 더 기뻐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화를 벌컥 내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그의 목을 당장 베어 버립시다.” 그러니까 또 반대 의견이 나왔답니다. “그러면 그는 순교하면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게 되었다고 오히려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자들은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답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을 기쁨과 영광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기 때문에 무식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같지만 주님을 위한 고난을 마땅히 감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3. 믿음의 정수는 오직 모든 부족함이 예수님을 통해 온전해짐을 믿고 삶의 현장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39,40절을 같이 읽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조금 어렵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것을 전부 다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두신 것을 그들에게도 주시려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믿음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지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11장에 언급은 모든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모두 다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증거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2,4,5절).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4절에 아벨도 5절을 보면 에녹도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아합같은 여인도 믿음으로 인정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말은 33절의 '약속을 받기도 하며'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약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에팡겔리안'으로 단수로 표현되었고 33절의 '약속'은 '에팡겔리온'으로 약속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33절의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하신 특정한 약속들로서 그러한 약속들은 그들의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것을 믿었으며 그 결과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돌면 무너질 것을 약속받고 그 약속대로 믿음으로 돌아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약속 성취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본절의 '그 약속'은 정관사가 붙어 있어 메시야 약속을 말합니다. ‘a Promise’가 아니라 특정한 ‘그 약속 (the Promise)’를 말합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다 죽었습니다. 생전에 메시아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지 못한 사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누구나 평생 집착한 것을 얻지 못하면 허탈감과 절망하며 허무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살아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약속 붙들고 소망 가운데 살았다는 말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40절을 보세요.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 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와 그들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의 성도이고 그들은 구약의 성도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약속하신 메시아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오실 메시아를 멀리서 바라볼 따름이었습니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인데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하시고 우리와 함께 그들이 완전해지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나은 것을 예비해 놓으심으로 우리 없이는 그들이 온전해지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신약 성도입니다. 신약 성도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과 그로 인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말합니다. 구약 성도들은 신약의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은 여기서 우리는 신약의 성도이고 그들는 구약의 성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약 성도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한 목적, 혹은 예비하심으로써 빚어진 결과적 의미를 말합니다. 아니면이라는 말은 “없이는, 제쳐 놓고서는”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약의 성도들을 온전케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옛 언약 아래 었던 믿음의 선진들도 스스로는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고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속죄 사역을 이루심으로써 믿음의 사람들이 완전함을 얻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백성의 존재는 구약의 백성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을 확증하며 그들을 온전케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함께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더 좋은 것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더 좋은 것으로 충만한 책입니다.
7:19절을 보십시오. 율법으로 온전치 못하여 더 좋은 “더 좋은 소망”이 생긴다고 말씀합니다.
7:22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8: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9:23절을 보십이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10: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11:16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1:35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11:40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2:24절을 보십시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더 좋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 보다 "더 좋은 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비전보다 "더 좋은 것"은 예수와 함께 꾸는 비전이라는 말입니다. 육적인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영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모든 좋은 위에 "더 좋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더 좋은 것"중 "더 좋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장차 이루어질 소망을 바라며 한평생을 믿음만으로 살아갔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림자와 모형만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한평생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자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성령을 받았으며, 완성된 성경을 허락 받았으며, 영적 성장을 위하여 교회 제도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더 좋은 부활을"을 받았고 또 "더 좋은 것 자체이신 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예수가 더 좋은 것"임을 모르고 살고 있으면서 더 좋은 것을 계속 추구하며 탐욕과 결국 다 살아질 허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장 더 좋은 것을 이미 소유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정수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세상에서 절망과 탐욕과 허무를 극복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 다 떠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 평생 가장 고상한 지식을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산 바울은 말년 죽음을 앞두고 데마도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고, 그레스게도, 디도도 떠났지만 디모세 후서 4장 17-18절에서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정수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까지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가장 좋은 주님을 모르고 평생 더 좋은 것 추구하며 살다 사람보고 실망하지 말고, 안되는 일 보고 절망하지 말며, 세상 것 잡으려고 탐욕부리지 말고, 이 땅이 전부라고 허무에 사로잡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은 분은 예수님입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가장 위로를 주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해 주시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가장 도움을 주시는 분도, 가장 만족을 주시는 분도, 가장 행복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도, 믿음의 출발점도, 믿음의 완성자도, 믿음의 목표도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가장 온전케 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말씀하고 이 믿음의 경주를 할 것을 당부하면서 히브리서 12장 2절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정수는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수는 믿음으로 시련을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수는 오직 모든 부족함이 예수님을 통해 온전해짐을 믿고 삶의 현장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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