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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길(2)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16:21-2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9834 추천수:17 112.168.96.71
2014-08-10 08:00:57

 

두길(2)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16:21-28

 

 

이번 주 14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에 방문한다고 합니다. 지금 그분은 과거 어떤 교황보다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가난과 청빈을 지향하는 삶을 실천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의 폭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진정성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교황이 방한하여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며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모습을 언론은 보도할 것이고 좋은 이미지를 한국 사람들에게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와 가톨릭은 교리 면에서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다릅니다. 그들은 교황 무오설을 믿습니다.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사도권을 계승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보기 때문에 교황의 선포에는 오류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신격화하여 마리아 종신 처녀설, 마리아의 무죄 잉태설, 마리아 승천설 등을 주장하며 마리아 숭배를 합니다. 구원관 역시 믿음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선행(공덕)을 쌓아야 하며 구원은 영세를 통해서 온다고 주장합니다. 지은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교황이 방한하여 가지는 가장 큰 행사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거행되는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입니다. 가톨릭에는 성상숭배, 성유물숭배, 성인숭배 사상이 있습니다. 성스럽게 살다 죽은 자 중에 가경자, 복자, 성인으로 불리워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어떤 사람이 성스럽게 살다 죽고 그를 통해 은혜받은 사람이 많아지면 교황이 그의 성덕을 인정하여 가경자(可敬者)라고 칭해줍니다. 가경자 위에는 복자가 있는데 시복식이란 순교자들을 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로 공식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순교자일 경우나 순교자가 아닐 경우 죽은 사람을 통해 기적이 2번 이상 일어나면 조사를 거쳐 시복식을 거쳐 복자로 인정해 줍니다. 가경자일 경우는 공적으로 공경하지 않지만 복자품에 오르면 특정지역이나 단체에서 죽은 그를 공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자가 된 후 다시 두 번 이상 기적이 일어나서 입증이 되면 시성식을 거처 성인이 됩니다. 성인이 되면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이 되고 교회 축일표에도 정식으로 오르게 됩니다.

성인들은 천주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도와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아무개 아무개 성인이여 우리를 위해 빌으소서] 라고 하든지 [아무개 아무개 성인의 공덕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비는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숭배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행위입니다. 직업에 따라 병의 종류에 따라 간구하는 성인들이 각각 있는데 예를 들자면 불임 여성은 “성 안토니” 관절염은 “성 야고보” 두통은 “성 데니스” 눈병은 “성 루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유럽은 나라에 따라 2000-4000개의 성상(성인들의 우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국 성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이교도들이 신들의 왕인 쥬피터(jupiter)와 그의 아내인 쥬노(juno)와 그 외의 다른 신들을 약간의 차등을 가지고 섬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출3:2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둑의 문화사]라는 책을 보면 성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책 마지막 단원에 중세시대의 유골 도둑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인의 유물이나 유골 등을 성유물이라 해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신통력이 있어 갖가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어 숭배하였습니다. 성물 숭배, 성인 숭배 사상입니다. 성인숭배 사상이란 이미 죽은 특정 인물을 중보로 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축복을 준다는 사상입니다. 유명한 성유물을 안치하고 있는 수도원은 순례자가 쇄도하고 순례자의 수만큼 헌금이 쌓이게 되었고 존귀한 유골이 있던 곳에 신자들이 모이면서 저절로 영지가 생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지를 원하거나 수도원을 부흥시키려면 유명한 성자의 유골을 모아 두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험한 유골을 훔치기 위해 스파이가 된 수도사도 생겼고, 전문적인 성유물 산업이 생겨나 성유물이 거래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름 없던 유골도 오히려 도둑맞음으로 더 가치가 있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성유물을 위해 살아 있는 성인을 죽이려는 음모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콜라 철학의 집성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가 성인이 될 것으로 예상을 했다고 합니다. 1274년 그가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병사하자 시체를 큰 가마에 끓여서 분해하고 성유물로 분배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1000년경, 성 롬알도스는 움브리아 산중에서 고행하다가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고도 합니다. 그의 덕행을 사모하는 마을 주민들이 그의 성유물을 다른 마을에 빼앗길 것을 염려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손쉽게 성유물로 만들어 버리자며 덮쳤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인의 유골이나 그의 유품에서 신비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성유물 유치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사 중에는 성유물만 전문적으로 훔치는 도둑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오늘 성경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갈릴리 바다에서 고된 노를 저으며 비린내 나는 고기와 일평생 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고된 노를 젓지 않아도 됩었습니다.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블루칼라가 화이트칼라로 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받던 사람이 이제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관심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평생 갈릴리를 떠나지 못할 사람이 예수님이 다니는 곳 어이든지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출세한 것입니다. 더욱 마음을 부풀게 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냐고 물어 보았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이 엄청난 칭찬의 소리와 대단한 약속을 들은 것입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왕이 된다면 적어도 좌의정이나 우의정은 넉넉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권력을 잡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적당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인생을 여유롭게 살만한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초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1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네 가지를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 고난을 받으실 것, 죽임을 당할 것, 제 3일에 부활하실 것 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짜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고난받고 버림바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입니다. 정치적 왕으로 로마 권력을 무너뜨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경제적 부요를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반드시 버림받으시고, 반드시 죽임을 당하여야하는 메시아입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부정한 권력자를 몰라내고 경제적 평등을 이루고 모든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반드시 대신 받아야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버림받아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반드시 죽어야 할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사야 53절에 이미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왕권을 가지고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굴복시키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베드로 마음에는 3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는다는 말이 가슴 깊이 들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실패입니다. 자신은 살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 죽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교회에서 대접받고,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고, 인정받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다닌 것이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다닌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난 주에 교회 건축을 잘하고 준공을 한 어느 교회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강대상 앞 커튼을 하는데 장로님 마음대로 빨간색을 해 놓았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배경 커튼은 방송화면이기 때문에 파란색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답니다. 장로님은 자기 고집대로 해 버린 것입니다. 목사님이 야단을 치자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사람의 일, 자기 일을 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항변이라는 말은 ‘에피티마오’라는 말을 번역한 말로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예의 없는 말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을 듣자 예수님의 뜻을 막으려고 책망조로 훈육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자신이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 것처럼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조종자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앞서 더 의롭고 더 지혜로운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부 주제에 칭찬해 주니까 권위를 주니까 마치 자신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끌어당기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로 전 칭찬을 받은 베드로는 졸지에 사단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반대하며 넘어뜨리려 했던 바리새인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도, 강도에게도, 가룟유다도 사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구원의 길을 가로 막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 사역을 결정적으로 방해하고 있게 때문에 베드로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구원사역을 방해하고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생각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부터 끊임없이 구속사를 방해하는 사단의 전략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임당하여야 하는 메시아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는 행위야말로 사단의 행동이었습니다. 고난받지 말고 배척받지 말고 죽지 말로 영광의 왕이 되라는 말은 사단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할 때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즉 메시아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경제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메시아, 초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의 갈채를 받는 정치적 메시아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만국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초인적 왕으로 고난을 받지 말고 버림받지 말고 죽지 말고 등극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도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할 때 어디로 물러가라고 합니까? 내 뒤입니다. 예수님 뒤로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제 신분을 알라는 말도 포함됩니다. 제자는 따르는 자이지 앞에서 이끄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헛된 생각을 제거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기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위한 척 대단히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실상 하나님이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늘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과 사람의 일을 하는 길입니다.

 

1.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을 선택하며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역을 성취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그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바로 예수님께서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나누어질 때 “이 때로부터”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4장 17절을 보십시오. “이때부터”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환점을 통해 마태복음은 3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는 1장부터 4장 16절까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장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 언약을 이루실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1:23),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1:21),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하나님 나라의 왕’(2:2;3:2,3)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2부는 4:17-16:20에서는 이 왕께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가르치며, 이적을 통해 그 나라를 보여주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3)”

5:1-7:29에서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8:1-10:42에서는 이적이라는 행위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11:1-16:20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새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12장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제사장으로서의 왕(16:21-28:20)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는 수난과 죽음의 사역, 그리고 이어지는 부활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번으로(히9:28) 영원한 효력이 있는(히10:12) 제사를 드리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을 완성하시고 새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창세기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새 언약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1-34)“

그런데 어떻게 죄 사함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이사야 53장을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바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이런 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3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17장 22-23절을 보세요. 20장 17-19절을 보세요.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말할 때마다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16:22) 제자들은 매우 근심합니다(마17:23).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은 섬김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누가 높느냐고 다투고 있습니다(마20:20-)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일을 이루시고 십자가에 구속사를 완성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얼마나 철저히 이 구속사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걸어가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예언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2:15)”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 2:23)”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7)”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12:21)”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13:35)”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 26:56)”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마 27:9)”

 

2. 우리는 예수님처럼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에 대하여 예수님은 명확하게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어 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버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할까요? 신비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학대를 말하는 말씀일까요? 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도를 닦는 것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자기 부인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의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재권이 주님께 있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코페루니쿠스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가정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의 글을 보니까? 한 여학생에 금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하고 불러 놓고 "십자가는 앞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지고 다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이 하는 말 "뛰어 가면 가끔 뒤에도 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도 아니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장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과 희생, 헌신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종교 사업의 수단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유물이 아닙니다. 요즈음 보면 십자가는 인기 몰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아 성취가 아닙니다. 각기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일평생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길은 예수님을 좇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는데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권력을 쥐고, 교회가 부흥하고, 많은 일을 하고 그것이 문제가 압니다. 그것은 단지 파생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영원하지도 않고 잠시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구원 주, 메시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좇는데 인생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느때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가난할 때도 부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도 잘될 때도 잘못될 때도 목표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좇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요?

첫째, 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5)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분명한 약속이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둘째, 행한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7)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화려한 성도 어느 날 없어집니다. 로마의 영광도 바벨론의 영광도 애굽의 영광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주후 79년에 죄악의 도시 봄페이스가 베수비우스 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용암으로 매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물건을 매매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가락지. 팔찌. 목걸이. 금고리등 보석을 끌어안은 채로 용암 벼락을 맞아 화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을 말씀합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고후4:17-18 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셋째, 예수님의 왕되심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됩니다(28).

바로 뒤에 변화산 사건을 통해 체험하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생각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을 받고 진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걷게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니까 하루에 남자만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불러 경고하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중 어느 길을 택합니까? 멋진 베드로 의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19)” 두 길 중, 이 선택이 우리의 평생 선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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