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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6) 베드로(요21:15-2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3894 추천수:22 112.168.96.71
2014-11-02 08:02:24

 

부르심(6) 베드로

요21:15-25

 

지난 금요일 저녁에 어느 집사님께서 교회에 와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식사하면서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토요일에 바자회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바자회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익금이 매년 6천만원이 나오는데 전액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파는데 교인들이 많기 때문에 각 분야로 나누어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깍두기를 만드는데 교회 등록한지 한 달이 된 분이 와서 봉사를 한다고 만들었답니다.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은 처음하는 것이라 서툴지만 자신의 집에서 해봤다고 해서 여러 권사님들이 그분을 섬겨 주려고 맡겼답니다. 그런데 아주 짜게 만들었답니다. 10여명의 권사님들이 누가 사갈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 교회에서는 새신자를 vip로 대접을 하는데 초신자가 싫은 소리하면 시험들까봐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초신자가 하는대로 그대로 하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누가 사갈 것인지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성숙한 교회이고 성숙한 교인들이라고 말하면서 권사님들이 다 사가면 더욱 성숙한 교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그 과정을 이야기 하는데 참 성숙한 교회이고 성숙한 교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초신자를 어떻게든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과 어떻게 하면 아이같은 초신자를 성장시키려하는 조심스러운 권사님들의 말과 행동이 참 예수님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불러 예수님을 대신하여 초대교회 지도자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맡기려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앞으로 초대교회를 시작시키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시킬 뿐 아니라 베드로 전후서를 기록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책임을 베드로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3천명, 5천명을 회개시키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만한 일을 하는 능력의 사람이 되려면 훈련이 필요하고 그만한 그릇이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불러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역할 인물을 만드는데 오늘 장면은 배신하고 도망간 베드로에게 찾아온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부름받은 베드로를 어떻게 신앙의 인물로 만들어 사용하십니까?

 

1. 예수님은 부름받은 사람에게 사랑의 동기를 분명케 하여 사용하십니다.

큰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바르게 하려면 동기가 분명해야 합니다. 회사 직원은 그 일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인가 회사를 위한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일이 자기 사랑인가 하나님 사랑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 이익을 성취하고, 자기 욕구를 충족하고, 자기만족을 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아를 실현하는 일인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기 일을 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우편에 앉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히시자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가 고향 호수에 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천방지축이고, 무식하고, 다혈질적이고, 잘난 체 잘하고, 끼어들기 잘하고, 성질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배신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사람은 초등학교 실력도 안 되는 지식의 부족은 참을 수 있고, 다혈질적이어 갈릴리 파도같이 왔다 갔다하는 성질도 참을 수 있고, 성질대로 칼로 말고의 귀를 베는 것과 같은 경솔하고 충동적인 기질도 참을 수 있고, 성질부리고, 나서기 좋아하고 뒷감당을 못하는 것도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신은 참기 힘듭니다. 남편과 아내가 조금 모자라고, 능력이 없는 것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바람피우는 것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단테는 '신곡(神曲)'에서 배신자를 지옥 맨 밑바닥에 두었습니다. 배신자로 자기의 스승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와 로마황제 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한 그의 친구이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넣어 놓았습니다. 단테는 배신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악 중에서 가장 밉고, 더럽고, 비열한 최대의 죄악으로 본 것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결코 배신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배신하여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신하고 저주까지하고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와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5절 말씀입니다. "요안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왜 부인했어 나쁜 놈, 네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수제자로 배신해, 장모의 질병까지 고쳐주고, 갈릴리 어부를 거두었는데 그렇게 해, 조폭 깡패도 그렇게 못하겠다." 하지 않습니다. 지치고 상하고 배고프고 패배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친히 조반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을 초청하시고(9-13절) 베드로에게 진정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 보십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저주할 때 숯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다 그랬는데 주님은 그 때를 상기할 수 있도록 숯불을 펴 놓고 베드로에게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아마 새벽이어서 닭은 목청을 높여 울어댔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과거 베드로는 자신 있게 장담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막 14:29)" 이 사람들 다 배신한다 할지라도 저만큼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너 그렇게 말했는데 정말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죄송합니다. 부끄러워서 뵐 낯이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베드로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연약하여 배신하긴 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인지라 부끄럽고 예수님께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제가 예수님이 사랑하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적인 필레오의 사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줄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필레오)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세 번 다시 물어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가페 수준의 사랑을 요구하지만 베드로는 우정 수준의 사랑으로 멈출지라도 예수님은 제자로서 사역을 맡길 때 다시한번 사랑의 동기를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언하시자, 베드로는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13:37)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가페적인 사랑, 변함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변치 않는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아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인간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저는 저의 이 사랑이 언제 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하지만 그게 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계속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고 부족한 고백을 하는 그에게 목양의 사역을 맡깁니다. 예수님은 “내가 다 안다. 너의 약함도 알고, 너의 실패도 알고, 죄의 부인도 알고, 너의 성격도 알고, 너의 처지와 환경도 알고, 너의 죄도 알고, 너의 한계도 안다. 너의 사랑 가지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사랑을 가지고 시작해라. 너 시몬이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이다. 네 양 떼가 아니다. 내 양 떼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나를 의지하여라. 그러면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요13:1)"셨는데 그 사랑으로 사역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배신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배신한 아담과 하와를 추방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3)” 하나님 배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신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길 원하십니다. 배신한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도망간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자신을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끝까지 따르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지키지 못한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 찾아 가셨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가 버린 베드로 찾아가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날도 우리가 실패했을지라도, 배신했을 지라도, 도망갔을 지라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지라도, 포기했을지라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철저히 배신하는 우리를 위해, 죄인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예수님은 이 사랑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옳으냐 틀리냐'는 것 이상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대로 신뢰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용서하라고 하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주라면 주는 것입니다. 참으라면 참는 것입니다. 성내지 말라고 하면 성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1-7)”

이 사건이 있을 후 베드로를 보십시오. 사랑으로 사역을 합니다.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먹으라면 먹고 이방 땅에 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이 사랑으로 사역을 합니다.

신문에 창녕제일고등학교 3학년 정준혁 군에 대한 사연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중학교시절 전교 250명중 200등을 했답니다. 학교를 마치면 오토바이를 타고 노래방, PC방을 전전하며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가출도 여러 번 했는데 고등학교 때 정순숙 담임선생님이 대뜸 반장 후보로 추천했답니다. '중학교 학교생활 기록부 내용을 모두 봤을 텐데, 왜 문제아인 자기를 반장 후보로 추천을 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답니다. 선생님을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답니다. "왜죠" 담임선생님은 "나는 '큰놈'은 됐고, '클 놈'을 뽑아"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반장이 되어 50점대 점수가 2학기에는 80점대로 올랐답니다. 하지만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동네로 돌아가서는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다 밤늦게 귀가하는 생활이 계속 되었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2학년을 앞두고,전교 부회장으로 추천했답니다. 가출하고 사흘간 무단결석했지만 핸드폰 위치 추적으로 학교로 돌아오자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준혁이가 전교부회장 선거를 앞두고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 심란해진 탓에 잠깐 절어 들어갔다'고 말을 한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정말 부회장이 됩답니다. 3학년 때는 회장이 됩었답니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학교에 제일 먼저 등교했답니다. 성적은 반에서 3등까지 하고 여러 자격증도 따고 삼성그룹 고졸 채용에서 최종합격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것보다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으로 한 사람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가치있는 것이겠습니까? 다니엘서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9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맡겨준 사역을 사랑으로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부르심받은 사람에게 포기하지 않는 사명을 주고 이루게 하십니다.

사랑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랑을 확인한 주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목자의 역할을 베드로에게 위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사명은 영예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벅찬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10:11)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나의 어린 양떼를 돌보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을 묻고 다시 말씀합니다.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양을 먹이는 것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먹이는 것입니다. 전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는 것은 양들의 모든 활동을 돌보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원수 사탄으로부터 양들을 구해내고 보살피는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 삼는 사역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부족한 너라는 것을 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임한다”는 말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목자의 역할을 부족하지만 베드로에게 위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사명은 영예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벅찬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대신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을 네가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결점과 약점 많은 베드로이지만 다시 사람 낚는 어부로 사명을 맡기십니다. 약하지만 너를 통해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무엇이든 지 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친 베드로이지만, 위기를 당하니까 결국 도망간 베드로, 배신한 베드로이지만 예수님을 그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이름 지어준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습니다. "너 내가 잘 알아 어떤 사람인지. 그러나 시몬아 낙심하지 말아 다시 출발해, 실패 했어 다시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았던 그를 처음 부르실 때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실패하였습니까? 신앙생활, 진학, 인간관계, 사업, 연초 계획 실패했습니까? 사람들은 배신하면 다시는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무능한 사람, 실패한 사람 다시 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실패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무능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배신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사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실패했지만 다시 찾아 가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모세에게 다시 사명을 주어 민족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을 찾아가 회복시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간 야곱은 찾아가 회복시켜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했습니다. 부하의 아내를 간음한 다윗을 찾아가 회개하게 하고 성군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도망간 요나를 찾아가 다시 기회를 주시고 니느웨를 변화시킬 사명을 주셨습니다. 절망한 엘리야를 찾아가 회복시기시고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연약하여 사역지를 피한 마가를 찾아가 회복시켰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핍박한 바울을 찾아가 회복시키시고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시켰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이 시간도 찾아와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11월입니다. 올해 배가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목표를 두고 출발하였습니다. 지금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 있던지 부활하여 찾아오신 우리 주님 만나 다시 사명을 회복하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헬렌켈러는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했지만 주님 만나 사명 붙들고 정신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링컨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빚에 쪼들려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만나 사명 붙들고 일어섰습니다. 「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8년 동안 1백 번이 넘는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일어나 55세가 되던 해에 세계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거로 미국의 대통령이 된 헨리 트루먼은 평범한 농부로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서른아홉 살에 처음으로 공직을 얻었고, 뒤늦은 50세에 정치무대에 입성한 후 61세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폭풍 앞에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1만 번 이상 넘어진 후에야 겨우 걸음마를 배운다고 합니다. 바람이 있어 연을 날릴 수 있는 것이며, 강렬한 햇빛이 있기 때문에 곡식은 여무는 것입니다. 강풍을 두려워하면 물은 파도를 만들지 못합니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은 높은 파도를 기다립니다. 영웅은 평상시에 나오지 않고 위기에서 나옵니다. 다윗이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골리앗 때문입니다. 골리앗이 없었다면 다윗은 목동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10년 동안 사울이라는 강풍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강풍은 다윗을 성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141:5)" 강한 풀은 강한 바람으로 만들어 집니다. 한나를 기도의 어머니가 되게 한 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브닌나 때문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의 늪에서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잃어 버린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다시 회복하고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나 홀로 놓아 두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일을 이루도록 하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부르심받은 사람은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망간 베르도를 찾아 사랑의 동기를 회복시키시고, 양치는 사명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사명 감당하다가 순교하겠다는 말입니다. 네가 세상에 출세할 것으로 기대하다 너의 기대대로 되지 않으니까 도망갔는데 네 인생의 마지막이 세상 출세의 길이 아니라 나를 위해 순교당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참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주님 따라 다녔는데 마지막이 순교의 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일 것입니다. 일을 맡기면서 출세하고 돈 벌고 명예를 얻고 잘 먹고 잘산다는 희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순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싫어 도망갔는데 자신도 예수님처럼 손을 벌리고 결박되고 원치 않는 곳에서 순교를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늙어서 영화를 보고 호화호식하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사역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고 가는 길이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길이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까? 베드로 보십시오. 이 말을 듣고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요한은 어떻게 되겠냐는 것입니다. 요한이 옆에 있는 것입니다. 좌의정 우의정 하게 해 달라고 어머니와 함께 요청한 제자입니다. 라이벌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직도 쓴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미성숙란 라이벌 의식, 비교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옆 사람을 보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쓸데없이 인간 바라보면서 에서지를 소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옆 사람보는 순간 감사가 상실되고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힙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 나만 이 모양 이 꼴입니까?”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요한은 잘 나가고 나는 그 험한 십자가를 지고 순교해야 합니까? 나는 왜 이런 집에 와서 이런 헌한 꼴을 당해야 합니까? 왜 나만 회사에서 이런 수고와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 왜 나만 홀로 고민하고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왜 우리 형 오빠는 잘 사는데 마음 착한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합니까? 나보다 공부도 못한 동창 잘 나가는데 왜 나는 이렇게 고난의 길을 걸어 가야 합니까?

다 제 갈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 자신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오래 살았어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산 것입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슬퍼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너는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은 두 번이나 거듭 강조합니다. 처음 부를 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다시 사명을 맡겨 주실 때도 나를 따르라고 두 번이나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생 성공의 길을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역은 고난의 사역일지라도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위대한 조각가는 손이 흙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결과가 너의 기대와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출세나 명예나 부자가 아니라 나를 따르는 길이 앞으로 네 인생의 꿈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원리가 되고, 선택의 기준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평안한 길도 있지만 때로는 십자가의 길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주님을 따르는 삶을 통해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 이후 성령을 충만히 받아 목숨을 굴하지 않고 전도에 임했으며, 이 때문에 감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았지만 굴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수행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확고부동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루 3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기사와 이적을 많이 나타내었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고, 솔로몬 행랑에서 전도할 때 하루에 남자만 5천 성도가 더 하였으며(행 3:11-25, 4:4), 허다한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또한,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에게 전도함으로 이방 선교의 첫 문을 열었고, 또 그는 소아시아에 가서 전도하기도 하며 그의 생애를 복음전파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불살랐습니다.

 

이 시간 부활하여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00아 너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시간 부활하여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00아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시간 부활하여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00아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베드로는 찾아 오셔서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을 만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한 시대 쓰임받았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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