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7) 바울
디모데후서 4:6-8
지난 주 신문에서 집 15채를 가지고 있는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부인이 유서 5장을 남겼는데 부인은 '언제나 돈이 없어 마이너스 통장을 쓰며 살다 끝내 마이너스 인생으로 가는구나.'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요즈음 보면 한 평생 돈을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 돈을 벌기 위해 바친 한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니 돈을 벌고 모으자라는 인생 목표를 가지고 살았답니다. 돈을 많이 모았지만 구두쇠였고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하니 자녀들도 아버지 같이 돈으로 세상을 판단하면서 살았답니다. 할머니가 교회에 나가는데 통장관리 돈관리는 할아버지가 다 하고 헌금하라고 매주일 천원씩 주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답니다. 부흥회가 끝난 후부터 초신자인 할머니가 교회에 나오지를 않았답니다. 목사님이 걱정이 되어 심방을 가서 “할머니 요즈음 왜 교회에 안 나와요 어디 속이 불편하신가요?”라고 물었답니다. 그러나 “아이구 목사님이 내 속을 훤히 다 아시네요. 지난 번에 부흥강사님이 다녀간 이후부터 내 속이 편하지 않아요”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아, 그러세요. 부흥강사님이 어쨌는데요?” “그 때 부흥 강사님이 교회에 열심히 나와 기도하면 하나님이 영감을 두 배나 더 해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나는 지금 있는 영감 하나로도 골치가 아파요 영감 둘이면 나는 힘들어 죽는다구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영감이 불치의 병에 걸렸는데 교회에 나와 치료가 되었답니다. “돈 돈 돈”하고 살던 사람이 인생이 “예수 예수 예수”로 바뀌었답니다. 그래서 임종을 앞에 두고 아들 삼형제를 모아놓고 유언을 하였답니다. “내가 죽거든 모든 재산을 각각 10%씩만 나눠 갖고 나머지는 교회에 기부하라”
이 말을 마치고 눈을 감은 채 마지막 기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뒤에 서 있는 막내아들이 중얼거렸답니다. “10%씩 이라니 말도 안 돼.” 그러자 둘째가 “그럼 전 재산의 70%는 교회에 바치라는 거잖아.” 장남이 말했답니다. “장남이면 뭘 해 책임만 많고, 돌아오는 건 똑같은 걸”
그 때 세 아들의 불평을 들은 아버지가 슬그머니 눈을 뜨더니 한 마디 했답니다. “너희들 자꾸 그러면 나 안 죽는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까지 붙들고 살아가는 원리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은 바울 사도가 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 AD 67년경에 로마의 감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아들처럼 사랑했던 디모데에게 유언적인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관제란 번제나 속죄제, 낙헌제 등과 같은 제물을 드릴 때 마지막 절차로 포도주를 붓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 다 하나님께 부어드려졌고 이제 떠날 시각에 이르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을 받고 이제 마지막 순교로 생을 마칠 시점에서 부름 받은 사람으로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3가지 동사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싸우고” “마치고” “지켰다”라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완료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볼 때 일관성 있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워왔다. 내가 노정을 마쳐 왔다. 내가 믿음을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 시대 부름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름 받은 사람으로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날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사람을 일관성 있게 이끌고 가는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사람으로 마지막까지 우리가 일관성 있게 지키며 살아야 할 원리가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는 부름 받은 사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톤 칼론 아고나 에고니스마이)”라고 자신의 인생은 싸움, 전쟁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싸움(아고나)”는 고대 헬라 사회에서 운동선수들이 경기장에서 경기를 벌일 때 상황 자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고전9:24,25) 상징적으로 사용될 때는 삶의 여정을 말합니다(히12:1).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는 삶에 있어서 정신적 갈등이나 투쟁을 말합니다(살전2:2).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인생은 끝없는 싸움의 연속입니다. 대부분의 인생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평생을 싸움다 갑니다. “누가 높으냐? 누가 많이 가졌느냐? 누가 잘났느냐? 누가 크냐? 누가 많으냐? 누가 빠르냐?” 끊임없이 싸우고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신문에 보면 날마다 싸우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유치원생들은 울면 지고, 초등학생들은 코피 나면 지고, 중학생은 많이 맞은면 지고, 고등학생은 넘어지면 지고, 어른은 없으며 집니다. 그래서 지지 않기 위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아름답기 위해 피 흘리는 경쟁을 합니다.
신문에 보니까 버스 기사가 싸운 이야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있었던 일인데 버스가 정류장에서 사람을 태우느라 지체하고 있으니까 뒤에 있는 버스가 계속 빵빵 거렸답니다. 그러자 기사가 궁시렁거리리며 출발했답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빨간 신호등 앞에서 정차하고 있을 때 뒤차 기사가 옆으로 와서 앞문을 열고 욕을 하여 말싸움이 시작되었답니다. 신호가 떨어졌는데 가지 않고 앞차 운전수가 내려 뒤차에 올라타 싸웠답니다. 그러니까 뒤차가 그냥 그 기사를 태우고 출발해 버렸답니다. 도로 한 복판에 승객을 태운 차가 서 있었던 것입니다. 한 참 지나니까 기사가 열나게 뛰어 왔답니다. 차에 타고 있던 승객이 계속 궁시렁거리며 차가 출발했는데 세 정거장 쯤 갈 때 경찰차가 따라 왔답니다. 그러면서 스피커로 경찰차가 "4*4-1번 앞문 열어봐요~~ 앞무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열쇠 주고가요. 열쇠에~~~~"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기사가 열이 받쳐 자신을 태우고 간 차 키를 빼갔고 온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원 속초 교동초등학교 6학년 이정선 어린이의 <싸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국글쓰기 교육연구회가 엮은 <새들은 시험 안봐서 좋겠구나> 중에 나오는 시입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비디오 빌리고 오는데/ 아저씨 둘이서 싸운다/ "니 나이가 몇 살이야?"/ "알아서 뭐해!"/ 욕까지 한다/ 젊은 아저씨가 대머리 아저씨를/ 확 집어 던진다/ "하고. 허리 뿌려지네! 그래 이눔아/ 나 죽여라 죽여!"/ 왜 싸우냐고 형한테 물어보니/ 택시를 잡았는데/ 자기가 먼저 잡았다고 우기다/ 싸우는 거란다/ 그동안 택시는/ 일곱 대가 지나갔다”
바울의 싸움은 이런 악한 싸움이 아닙니다.
바울의 싸움은 자신의 부를 축척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일어선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없는 자를 무릎 꿇린 싸운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선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는 본시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 당시 명문학파인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지금 국회와 같은 산헤드린 회원으로 신입받는 자였습니다. 율법에 능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아마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면 그는 마음에 맞는 아내와 결혼하여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정오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행9:15) 영광스런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모두 다 두려워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 때 사울에게 분명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후 그의 인생의 관심사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의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싸움의 대상은 누구이겠습니까?
엡6:12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사탄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사탄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때로는 우는 사자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로마서 7장 21절 이하를 보면 바울의 마음에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과 동시에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하되 육신의 자아는 죄의 법을 따르기를 좋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유대 주의에 길들여진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서신서에 그렇게 강조하는 것도 그가 그만큼 어릴 때부터 율법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구원받는 이 선한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들처럼 생각한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 이 선한 싸움에서 이기라고 권면합니다. 그 권면을 보면 이 선한 싸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과 6장 12절에서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싸움은 혈기를 부리며 감정을 폭발하는 세상의 육적 싸움과 구별된 싸움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6장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선한 싸움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피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3-10절 내용입니다. 돈을 사랑함, 부 하려 하는 것,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것, 교만하여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것, 주님의 말씀과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들이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피해야 할 것들입니다. 돈 욕심, 교만함, 말씀과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들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죄된 우리의 자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육적인 것을 따르기 좋아하는 우리의 자아를 이기는 방법은 날마다 죽는 것(고전 15:31)이고 성령을 쫓아 사는 것(갈 5:16∼24)입니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분별력(요일 4:1)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 앞에 절대 순종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도 사탄의 공격을 말씀으로 다 물리쳤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마다 싸우는 것입니다. 사단과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이 승리의 핵심입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인생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부름 받은 사람으로 달려갈 길을 마쳐야 하겠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톤 드로몬 테텔레카)에서 달려 갈 길은 헬라 운동 경기장의 트렉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비유적으로 사람의 생애나 인생 여정 자체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행13:25; 20:24). 마치다(테텔레카)라는 말은 ”마치다. 완정한다. 결론짓다“라는 뜻입니다. 즉 복음 증거 사역을 하는데 포기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다는 말입니다.
그에게 맡겨준 사명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5)
그의 사명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이 사역을 막기 위하여 때로는 광풍과 바다 광야 등의 환경을 통하여 때로는 동족 유대인과 권력자 이방인을 통하여 때로는 자신의 질병과 연약함을 통하여 포기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지키며 안디옥 구브로 밤빌리아. 버가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를 때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하고 네 자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모세에게도 민족을 해방시킬 사명을 주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성전건축의 사명을 주었고 느헤미야에게는 성곽 재건의 사명을 주었습니다. 기드온에게 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에스더에게 민족을 살리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남편을 전도하는 것입니까?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 돈을 많이 벌어 선한 사업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훌륭한 예술가. 정치가, 의료인, 학자가 되는 것입니까? 교회를 위하여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가정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주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복음 전함의 사명을 완수하길 원하십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시대를 변화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나라와 민족 가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을 전하여 그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회복에 대한 사명입니다. 사탄은 이 일을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우는 사자처럼 핍박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4-27)”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어느 한 순간만 포기해버렸다면 그는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합니다. 설교 못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럴 때 포기했다면 그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중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장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욕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일 이년이 아닙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식이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의 첩을 능멸합니다. 이방 땅에 가서 개처럼 살았습니다. 이웃집 여인을 간음하여 만천하에 폭로되었습니다. 어떻게 얼굴 내밀고 살겠습니까? 그러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이루어 성군이 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살인자로 추방됩니다. 40년가 쫓기는 인생을 삽니다. 처가살이를 합니다. 왕궁 생활에서 완전히 망하고 셋방살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시시 때때로 원망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얼마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겠습니까? 어느 한 순간 포기했다면 그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다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순종했는데 가뭄을 만납니다. 자기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첩을 두었다가 처절한 아픔을 앓았습니다. 자신의 생명같은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 어느 순간 포기했다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에게 주신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노년에 다 떠나버립니다. 딤후 4장 10절을 보세요. 데마도 그레스게도 떠났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알렉산더는 많은 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17절을 보세요. 주께서는 내 곁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사자의 입에서 건져 주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주시고 천국에 이르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 이루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원씽(THE ONE THING, 게리 켈러·제이 파파산 지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상이 복잡한데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것은 단순함에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반전을 불러오는 것은 단순함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단 하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이 최종 승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성과는 초점(focus)을 얼마나 좁힐 수 있느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을 파고들게 되면 단 하나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멀티태스킹은 곧 능력이다"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클리포드 나스가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262명의 학생들을 통해 실험을 해 보니까 멀티태스킹을 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관련 없는 일에 푹 빠져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고 모든 일에 엉망이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겨누지 않으면, 아무것도 맞출 수 없고, 모든 것을 겨누면, 보통은 아무것도 맞출 수가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다가서려고 하면, 대개는 아무에게도 다가설 수 없는 것입니다. 표적(Target)이 분명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사업하는 사업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성공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핵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왜 제자들을 불러 훈련시켰습니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나라를 언약의 백성으로 삼았습니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바울은 생명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최대의 지상명령과 동시에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예수님의 유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그 피 값을 추궁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17-18)" 그래서 부름받은 바울은 절박감을 가지고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6-27)"
3. 우리는 부름받은 사람으로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지켰으니(텐 피스틴 테테레카)”라는 말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믿음을 지키며 그 일을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경기에 임한 자가 경기 규칙을 준수하듯, 군인이 상관에게 충성하듯, 청지기가 자신의 주인에게 순종하듯 주의 일을 하면서 믿음으로 일평생 사역을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도 일관성 있게 믿음으로 사역을 했다는 말입니다. “지켰다”라는 표현은 본래 보물을 관리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라고 합니다. 믿음을 보물처럼 지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바울의 삶의 원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믿음으로 자족하고, 믿음으로 풍요를 누리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꾸 믿음이 아닌 다른 길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디모데 후서 4장 3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사람에게는 지루함을 못 견디는 속성이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낯선 것을 탐구하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믿음이 아닌 것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억울함도 당하고 부당하게 대우받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살면 결국 우리 하나님이 알아줍니다.
8절을 보십시오.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이 땅의 삶이란 이 세상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줄 영원한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6절에 보십시오 죽음은 떠남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새로운 출발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육체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허무나 종말이나 소멸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만남입니다.(빌1:23) 죽음 이후에는 우리 주님을 부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거울을 통해 봄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온전하신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찬양하던, 사모했던 그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왔던 모든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상급입니다. 바울의 삶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의로우신 재판장”이 평가해 주실 날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불의한 네로 황제에 의해 불의하게 체포되었고 로마의 법정은 그를 불의하게 단죄 하였지만, 진정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바울에게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의입니다. 세상은 불의하게 바울을 단죄했지만 세상은 불공평하게 바울을 대접했지만 의로우신 하나님이 의의 면류관으로 바울에게 상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늘의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7)”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 바울은 삼층천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눈이 멀었다가 눈이 뜨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무엇으로 그런 체험을 했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믿음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지금 어떤 난관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감정 내세우고, 자신의 의 내세우고, 자신의 힘 내세우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것같고 억울한 것같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성공이고 믿음이 능력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입니다.
신문에서 이민 1세대 최초 상원의원이 된 임용근 미국 오리건 주 전 상원의원 기사를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경기도 여주에서 소방대장을 하였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공산군 점령 하에서 부역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총살당했답니다. 중학생일 때였답니다. 졸지에 '빨갱이 가족'이란 낙인이 찍였답니다.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답니다. 고등학교 때 폐결핵을 앓은 그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답니다. 가난한 살림 탓에 학비를 내지 못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는데도 졸업장을 받지 못했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답니다.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잡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7500여개의 단어가 실린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우며 고학으로 서울신학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교회를 개척하였답니다. 컴패션 선교회 모건 전 대표를 만나 미국으로 건너가 청소부, 페인트공, 정원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신학공부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신학석사학위를 받았지만 사업에 눈을 돌려 돈을 벌어 사회봉사 활동을 했답니다. 오리건주 상·하원에서 5선 의원을 지냈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었지만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하자 길이 열렸다"며 한국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갖고 기회를 찾으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는 노령이지만 "80세에 사명을 받은 모세처럼 앞으로도 하나님의 도구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다 생의 종착역에 이르고야 맙니다. 타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내리는 데는 순서가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당할지 모릅니다. 초교파 외국 선교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24시간에 32만 명 출생하고 16만명이 사망을 한다 합니다. 매시간 7000명 분 120명, 매초 2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누가 그 대상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사는 우리는 마지막까지 무엇을 붙들고 살겠습니까? 바울은 “선한 싸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침, 믿음을 지킴” 이 세 가지를 붙들었습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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