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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13) 모세 부모의 믿음(히11:2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8405 추천수:7 220.120.123.244
2022-08-21 15:51:09

믿음(13) 모세 부모의 믿음

히11:23

 

오늘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 13번째로 모세의 부모님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사람 중에 부모님에 대한 믿음은 유일하게 모세의 부모님에 대한 믿음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아버지의 이름은 아므람(고상한 백성)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요게벳(여호와는 영광이시다. 출애굽기 6:20)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부모라고 통칭하여 부모님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애굽의 새로운 통치가 바로가 집권하여 공포의 정치를 할 때인데 당시 유대의 종교와 로마의 권력으로부터 고난받고 핍박받은 시대에서, 그리고 후대에 히브리서를 읽는 부모들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날 당시 자기 나라를 위해 좋은 일한다고 태어난 남자를 다 죽이는 유아 살해, 인종 청소를 하는 폭력적인 왕 치하에서 일가친척뿐 아니라 민족 전체가 고통받고 있을 때 모세의 부모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자식을 지키며 양육하고 있습니까? 23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그 부모가 취한 믿음의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숨겨, 믿음으로 무서워 아니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행한 것이 모두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시대나 부모의 믿음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마지막 사사요 최초의 선지자로 평생 이스라엘을 평안하게 통치한 사무엘 뒤에는 기도하는 어머니 한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뒤에는 경건한 아버지 사가랴와 성령 충만한 어머니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뒤에는 섬김과 봉사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신실한 목회자 디모데 뒤에는 외할머니 로이스, 그리고 어머니 유니게가 있었습니다. 모세 뒤에는 아버지 아므람, 어머니 요게벳이 있었습니다. 오늘 시대적인 인물 모세를 기른 모세 부모의 믿음을 통해 부모가 된 우리, 앞으로 부모가 될 우리는 부모로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교훈받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먼저 자녀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자녀를 나의 행복을 방해하고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귀찮은 존재로 보느냐? 물건처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보느냐? 우연이 태어난 존재로 보느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특별한 존재로 보느냐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자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1. 믿음으로 태어날 때 자녀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영적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어떻게 보았습니까?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어떤 환경이었습니까? 출1장 22절을 보세요. 히브리 여인들이 아이를 낳으면 아들일 경우에는 나일강에 던져서 죽이고 딸일 경우에는 기르도록 명령했습니다. 당시 상황에 보면 모세는 부모의 행복을 방해하는 짐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요즈음도 장애를 가진 아이나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 가정에 손해를 끼치는 아이를 짐 덩어리처럼 취급합니다.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라고 생각하며 괴뢰워합니다.

이럴 때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혼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이런 환경에서 결혼을 할까 말까 수없는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결혼했는데 아이를 가질까 말까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사내 아이를 낳으면 엄청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피임법이 그렇게 발달되지 않은 때였는데 믿음으로 아이를 가졌습니다. 이제 남자 아니면 여자를 낳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자이면 좋을텐데 남자가 태어나면 죽습니다. 이 고통을 어떻게 감수하겠습니까?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때지만 당시도 낙태할 방법은 있었습니다. 부부는 아이를 낳까 말까 엄청나게 번민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쉽게 뱃속의 아이의 성을 알 수 있는 때도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낳기를 결정했습니다. 나아 보니까 아들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나일강에 버려야 합니다. 이웃집 아이들은 다 나일강에 다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아이를 나일강에 던져 죽이지 않고 목숨을 살렸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이런 악조건도 아닌데 여러 이유를 들어 결혼도 기피하고, 아이 낳는 것도 기피하며 모세같은 아이가 태어날 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사람도 있는데 모세의 부모는 유아 살해, 인종 청소라는 위기 속에서 믿음으로 결혼하고 믿음으로 아이를 낳아 믿음으로 아이를 길렀다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으로 결단하지 않았다면 모세같은 위대한 영웅은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앞에 모세를 낳아 나일강에 버리지 않고 기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장 2절에서는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에서는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름다운’으로 번역된 ‘아스테이온’은 ‘도시화 된’, ‘품위 있는’ 등의 뜻합니다. 신약에서 2회 나타나는데 모두 모세와 관련하여 쓰였습니다(행7:20). 이 말은 단순한 보호 본능이 아닙니다. 모세의 부모가 아이를 위해 생명을 걸을 때는 단순히 아이가 아름다운 아이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에는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단순히 아름다운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이기 때문에 나일강에 버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세의 부모 마음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모세를 바로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본 것입니다. 이에 대응되는 단어가 맛소라 본문에는 ‘토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세상을 창조할 때 하나님이 사용하신 말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보았을 때 보이는 아름다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의 부모에게 하나님의 눈을 허락하셔서 그 아이의 준수함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자식을 보게한 것입니다. 바로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자식을 보게한 것입니다. 바로의 눈에는 불필요한 존재,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 수많은 남자 아이 중에 물건처럼 하나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꼭 필요한 존재, 출애굽하여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것을 이루실 존재,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야 할 유일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 시각으로 모세의 부모가 자식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이 주신 장점과 하나님이 숨겨놓은 잠재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처한 환경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비범함을 보고 이 아이를 길러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름다운 아기 모세의 얼굴에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음을 본 것입니다. 바로에게 죽임을 당할 아이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세 한탄하고 낙심하지 않고 짐덩어리로 아이를 바라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명자로서 아들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모세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믿고 목숨을 걸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살렸을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를 받을 때도 자녀에 대한 이런 시각이 필요합니다. 히브리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로마 권력으로부터 예수 믿는 것 하나로 자식을 짐승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십자가에 처형해야 할 상황에서 부모들에게 모세의 부모같은 믿음으로 자녀를 대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발달된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를 때 이 시각이 필요합니다.

죤 웨슬리 어머니 수잔나는 웨슬리가 자기 전에 매일 침대에서 자식에게 질문을 했답니다. “애야! 너희가 누구냐?” 그러면 아들은 “우리는 위대한 아이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누가 너희를 위대하다 했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위대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너희는 지금 무엇 하느냐?” “지금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시켰느냐?”. “우리를 위대하게 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시켰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다.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다. 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해야 하는 아이다.”라고 신앙적인 가치관을 심어 주었다고 합니다.

 

에디슨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친구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답니다. 견디다 못한 선생님은 아무래도 이 아이는 저능아인 것 같다고 하시면서 어머니 낸시에게 자퇴를 요청했답니다. 이때 어머니 낸시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선생님, 이 아이는 저능아가 아닙니다. 남과 좀 다를 뿐입니다.” 목사님인 아버지의 신앙교육으로 자라난 낸시의 눈은 다른 사람의 눈과 달랐답니다. 그래서 아들을 집에서 가르치기로 결심했답니다. 많은 책을 사주었답니다. 에디슨이 실험하는 것을 좋아하자 집 지하실에 실험실을 차려 주었답니다. 그런데 실험을 하다 집이 다 탈 뻔하고, 친구를 실험대상으로 삼아 그를 죽일 뻔한 사고가 나자, 아버지는 무척 화가 나셨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답니다. 그리고 실험실을 폐쇄했답니다. 이때 낸시는 남편에게 눈물로 호소했답니다. “이 아이를 믿어 봅시다. 이 아이에게 이것을 빼앗으면 기쁨을 빼앗는 것이요 삶의 목적을 빼앗는 것입니다.”

훗날 에디슨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학교는 우리 집 지하실이고 나를 가르친 교수는 낸시 에디슨, 바로 나의 어머니입니다.” 어떤 경우도 부모가 자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았다면 어떻게 자식을 양육해야 할까요?

2.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님이 이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모세를 양육했는가를 보십시오.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모세의 부모님은 모세를 믿음으로 석달 숨겼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죽이라고 했는데 죽이지 않고 몰래 숨겨 기른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울면 군인들이 다가 올 것이고 성별을 분별하여 모세도 죽을 것이고 부모와 가족도 온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마지노 선이 석달이었다는 것입니다. 3달 동안 바로의 법이 아무리 강력하다 할지라도 그 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따랐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자식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국가의 법에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지 않고 부당한 즉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전체주의, 독제주의, 나치 정권, 공산주의, 일본 군국주의와 같이 국가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처럼 행세하며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며 하나님을 대적할 때 모세의 부모는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럴 때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데 그 원동력이 믿음입니다. 발각될 때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자신뿐 아니라 모세, 그리고 미리암과 아론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목숨을 걸고 왕의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시민 불복종, 시민 저항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모세를 죽이려는 정권은 어떤 정권입니다. 애굽의 새 왕조로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정권입니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몰랐을지 몰라도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실 것을 이미 약속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들을 다 죽여버리면 메시아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계시록 12장 4절을 보면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라는 말씀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탄은 바로의 정권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아 언약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했고 헤롯 정권은 메시아가 태어날 때 어린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모세가 예수님의 모형으로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한 것은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13장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나오는데 바로 사단의 하수인 노릇하는 권력을 말합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사탄의 종노릇하면서 권력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세력을 끊임없이 존재했습니다. 이 사건은 모세의 부모가 사단의 세력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처음 보여준 것입니다.

 

믿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2:3에 보면 "더 숨길수 없이 되매"라고 기록합니다. 더 이상 숨겨 기를 수 없기까지 최선을 다해 양육했다는 말입니다. 부모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맞은 것입니다. 3개월이 지난 후 어떻게 했습니까? 죽인 것이 아니라 갈대 상자를 만들어 갈대 숲에 높아 두었습니다. 믿음으로 나일강에 띄운 것입니다. 갈대 상자는 돛도 없고 키도, 노도 없습니다. 언제 뒤집혀질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 악어가 나타나 먹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드라마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때 바로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그 강가에 나옵니다. 우연이었을까요? 고대 애굽의 궁중 안에 얼마나 훌륭한 목욕시설이 있었겠습니까?

하필이면 강가에 나온 공주의 눈에 갈대상자가 발견된 것입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상자를 열어보니 히브리 노예의 아기였습니다. 재수 없다고 갔다 버리라고 할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로 기를 생각을 합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유모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택된 유모는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보십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린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위대한 계획의 주연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최선을 다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셔서 모세를 준비시키십니다. 그 과정에 바로의 딸이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그가 나와 갈대상자를 발견하고 가져오라고 하는 과정, 아이를 발견하고 측은지심이 발동해서 히브리인의 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중에 데리고 간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인 남자 아이에게 내려진 살해 명령을 바로의 딸이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방인 공주를 사용하여 모세를 건져 궁중 교육을 받게 하고 어머니의 모유를 먹으며 신앙으로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어릴 때 철저한 신앙 교육과 성장하여 40년 동안 최첨단의 왕실 교육을 받게 만든 것입니다.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 시키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기른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를 받은 사람들에게 자녀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유학을 보내고, 군대에 보내고, 결혼을 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지만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만약 부모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결코 모세는 새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를 때 나쁜 환경이라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환경의 제물로 아이들을 바쳐서는 안 됩니다. 도저히 기를 수 없는 환경이라고 자식을 미리부터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와 몸통 그리고 발가락이 두 개뿐 닉 부이치치를 보십시오. 그는 지금도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 세계를 다니며 행복을 전하는 행복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 내에서 죽였다면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전하는 그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를 보십시오. 장애인으로 정상인도 어렵다는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열정적으로 연주합니다. 강연장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손을 번쩍 들어 주먹을 꽉 쥐라고 하면서 "You can do it" 선창하면서 따라 하게 합니다. 내 가정 환경이 나쁘다고 아이들까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노예의 아들이지만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노예를 해방시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시련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루터 아버지 광산 노동자였습니다. 김활란 박사의 어머니는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양잿물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링컨은 너무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꼭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야만 시대의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양육하고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의 주역으로 우리 아이들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장애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3. 믿음으로 임금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자녀를 기르는데 다가온 장애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오늘 말씀은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장애물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왕의 자인한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는 강력한 힘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를 숨겨 살리려고 했던 강력한 힘은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왕보다 더 무서운 분인 줄 믿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용기는 좌절될 수 있으나 믿음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용기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지만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신념과 신앙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념의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사람은 왕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더 무서워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악법에 대하여 불순종하는 것은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인 산파였던 십브라와 부아도 애굽왕이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들은 왕의 부당한 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출1장 1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구체적인 위협 눈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추상적인 것같고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적 위협을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의 부모님이 바보가 아닙니다. 모세뿐 아니라 자신들도, 아론과 미리암도 잃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진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현실적인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현실적인 문제보다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이면 세상은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왕보다 더 두려운 분이 하나님인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총칼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권력자를 무서워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공권력은 몸만 죽일 뿐입니다.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혼도 죽일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하게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박해와 핍박 가운데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였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게 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어떤 장애물도 믿음을 가지면 두려움 없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두려움 앞에 당당하게 모험을 하게 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다윗은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결국 왕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라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사도행전 4:19)”라고 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앞에서도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라고 느브갓네살의 왕의 명령을 거역하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다니엘 3:18)”라고 했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살기 위해 금식기도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4:16)”라고 하며 왕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아가 민족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명기 31:8)”

가나안을 땅 점령을 앞에 둔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9)”

자녀을 양육하면서 어떤 장애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의 담대한 믿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만일 모세의 부모님이 왕을 무서워하지 않는 믿음이 없었다면 이런 일은 역사 속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들은 세상을 무서워하면 안 됩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여 양육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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