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11) 야곱의 믿음
히11:21
모든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 예외 없이 죽습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연 5천 9백만여명, 하루 16만여 명 매시간 7천여 명, 매분 120여 명, 매초 2명씩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29만 여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하루 685명, 한 시간에 28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 다 죽는데 이 땅에 살면서 모두 공통된 소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옛 사람들은 오복이라 했습니다. 잘 아시는 말이지만 오복은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입니다. 첫째가 수로 장수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부로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풍족하게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강녕으로 일생동안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넷째로 유호덕으로, 덕을 좋아하고 즐겨 행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고종명으로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입니다. 잘 죽기를 원하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은 마음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요즈음 웰빙의 삶도 중요하지만 웰에이징, 웰다잉도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잘 죽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성경의 인물 중 야곱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지만 야곱처럼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오늘 나그네로서 험한 세월을 147년 동안 살다 죽은 야곱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교훈받고자 합니다.
1. 우리는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살다 믿음으로 죽어야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은 죽을 때 어떻게 죽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 야곱은 죽을 때 믿음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죽은 죽음이 있고 믿음 없이 죽는 죽음이 있습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성경 히브리서를 처음 받았던 1세기 교인들은 죽음이라는 것이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오랜 세월 유대교를 신봉하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하기도 하고 또 그 사실을 전해준 사람들로부터 복음을 든고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네로가 믿는 사람을 들을 잡아 십자가에 달고, 화형을 시키고, 사자들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제 눈 앞에 다가옵니다. 그러면 죽음이 두려워 믿음을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 때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자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 죽음의 과정이 두려워,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야곱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야곱의 삶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야곱은 마지막 죽을 때 믿음으로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평생 갈등 가운데 산 사람입니다. 형과 장자권을 가지고 갈등하였고, 아버지와 갈등하며 결국 도망자가 되어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갈등하며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외삼촌과 갈등하였고, 레아와 라헬 이라는 두 아내 사이에서 갈등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늘 자신의 욕심을 중심으로 자기 이익, 자기 편리, 자기 쾌락을 선택하며 자신의 의지로 철저하게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복받고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현세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 자체의 뜻이 발꿈치를 잡은 자 약탈자, 강도, 도둑이라는 뜻이 있는 것처럼 양육강식의 세계에서 장자권도 탈취(창25:27-34)하였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내를 얻기 위하여 7년 동안 무료 봉사할 정도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념이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갖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철저하고 치밀한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형을 만날 때 형의 환심을 사고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세 편으로 나누어 사람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 야곱을 소개할 때 지렁이같이 살다 죽었다거나, 사기꾼으로 살다 죽었다거나, 거짓말 장이로 죽었다거나, 집념의 사람으로, 욕심장이로,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살다 죽었다고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죽었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믿음으로 죽었는지 야곱이 147세 죽기 전에 고백한 신앙 고백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눈이 나이 들어 눈이 어두워졌을 때 요셉이 아들 둘을 데리고 아버지 병문안을 갔습니다. 그러자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손자를 위해 축복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8장 15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하나님이 지금까지 자신을 길러 주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험하게 살게 만들어 주었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면 누구나 과거를 돌아봅니다. 야곱은 형과 다툼으로 형이 자기를 죽이려 했습니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집을 나가야 했습니다. 20년 간 부모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객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삼촌의 노예처럼 생고생했습니다. 삼촌에게 속임을 당했습니다. 자매를 둘을 아내로 맞이하는 기구한 운명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두 아내의 시기로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아들들이 시기 질투하여 요셉이라는 아이가 인신매매 되었습니다. 딸이 겁탈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 보다 일찍 죽은 아픔을 알아야 했습니다. 큰 아들이 계모를 범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런 험난한 인생을 살아 온 사람이라면 얼마나 순간 순간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은 없다고, 하나님은 자신의 고난에 침묵한다고 믿음을 떠나버렸겠습니까? 아마 12번도 더 하나님을 원망하며 요즈음 말하면 교회 다니는 것을 방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이삭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신 하나님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순간마다, 모든 사건마다, 인간적인 갈등과 고통과 슬픔과 역경이 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가운데 자신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형에게 죽을 뻔한 것도 삼촌에게 죽을 뻔한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 탓으로 돌리고 세상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왜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왜 삼촌은 그렇게 욕심이 많고 왜 나는 이렇게 모진 운명을 타고났느냐고, 왜 이렇게 흑수저로 태어나 인생이 꼬였냐고 하나님 탓하고 남 탓하고 내 탓하며 절망하고 억울해 할 수 있습니다. 다 절대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는 자식들에게 축복을 하면서 무엇이라고 신앙고백을 합니까? 49장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무엇을 부탁합니까? 2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3절에 그 말을 다 마치고 침상에서 숨을 거두고 백성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매장된다면 얼마나 호화롭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이렇게 죽은 것은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적 표현으로 한다면 천국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영원한 천국 영원한 본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가졌던 영원한 본향에 대한 그 믿음, 영원한 천국에 대한 그 믿음으로 말년에 활활 불타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천국을 소망하면서 죽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복된 죽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지옥도 천국도 없다고 하며 내세에 대하여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품지 말라고 말하며 인간의 자유를 부르짖었던 사르트르는 죽음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노년에 '폐수종'으로 죽음에 임하자 품위 있게 죽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욕을 하면서 물건을 던졌고 죽음이 두려워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발악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한 기자가 "왜 사르트르가 그렇게 수치스럽게 죽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 외쳤던 그의 말로가 왜 이렇게 비참했을까?"라고 쓰면서 결론으로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임종 때 "내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국을 믿고 죽는 사람은 다릅니다. 코미디언 가운데 SBS프로에 나오시던 김경태 장로님이 계십니다. 죽음 앞에서 자기의 그 사연 많은 생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나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셨으니 오늘 내가 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최선의 사건이다'라고 감사했답니다. 본인이 장례식 순서를 다 짜고, 누가 설교하고, 누가 무엇을 하고, 절대 상복은 입지 말라고 했답니다. 연예인이었기에 옷이 많았고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옷도 있었답니다. 그 옷들을 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그 중 제일 낡은 옷을 자기한테 입혀달라고 했답니다. 사모님이 그건 안 된다고,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니까 장로님은 웃으면서 그러면 자기더러 벌거벗고 가라는 말이냐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하나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목사인 사위를 위해서 기도하시다가 숨이 차서는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하다가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죽음을 맞이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모태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세상을 나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듯 우리 육신을 벗어 버리면 영원한 천국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탐욕에 가려진 휘장을 젖히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지옥과 천국이 실재 존재하는 세계인 것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최종 지옥인 불못에 던져질 것이고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3:50). 그래서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비이성이나 비논리, 비과학이 아니라 초이성, 초논리, 초과학의 세계입니다. 믿음으로만 알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입니다. 죽음을 마주할 수 있어야 은퇴 준비는 끝나는 것입니다. 은퇴를 준비하듯 죽음도 준비해야 하고 죽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진정한 은퇴 준비는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건강한 삶(Well-being)은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는 웰에이징(Well-aging)과 함께 아름답게 죽음에 이르는 웰다잉(Well-dying)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죽음 후에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 때 두려움과 공포에 자유로우며, 사욕을 버리고 마음을 닦으며, 행복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인류 최대의 적인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가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라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죽음은 결코 믿음의 사람을 영원히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5-58)”
2. 우리는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자녀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야곱의 믿음을 또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창세기 48장에 나옵니다. 야곱은 이제 나이가 들어 병이 들었습니다(창48:1). 그래서 요셉이 아들 둘을 대리고 병문안을 갔습니다. 이때 야곱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창48:10). 그런 상황에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합니다. 아버지 이삭과 같이 실수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총명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오른쪽 손은 차자인 에브라임 위에 왼손은 장자인 므낫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른손을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왼손을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으고 축복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요셉이 손을 바꾸려고 했습니다.(17) 그러나 허락지 않았습니다. 실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왜 장자가 이렇게 중요합니까? 신21:17 절을 보십시오. 두 몫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집요하게 손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아무리 아들이지만 한 나라의 국무총리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뜻에 좌지우지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습으로 축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축복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맛있는 고기를 주니까 축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축복한 것입니다.
본래 장자권은 큰 아들 르우벤에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요셉을 장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장자는 2배의 축복을 받기 때문에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땅을 두배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애굽 여인에게 낳은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자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손자들을 위해 축복하면서 요셉을 위하여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데도 영적 지혜를 잃어버리지 않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손자들에게만 축복한 것이 아닙니다. 49장에 보십시오. 자식들을 다 모아놓고 축복합니다. 어떻게 축복합니까? 49장 28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지혜로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늙은 족장 야곱은 애굽에 도착하여 당당하게 바로를 축복(창47:7)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축복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다 마지막을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장로님에게 권사님에게 집사님에세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가 축복입니다. 교회 아이들, 학생들, 청년들을 볼 때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늙었다고, 건강을 읽었다고, 자식들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순수 혈통이 아니라고 축복을 포기하지 말고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의 믿음을 통해 이것을 배우라고 한 줄로 강조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유고의 작은 시골마을 천주교 성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집행 할 때에 시중 든 아이가 잔을 떨어뜨려 포도주가 쏟아졌답니다. 그 때 신부는 그 아이의 뺨을 때리면서 "다시는 제단에 나타나지 말아라." 하며 저주하였답니다. 그 소년은 성장하여 공산주의자가 된 유고슬라비아 티토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일이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답니다. 성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집행하였는데 시중든 아이가 잔을 떨어뜨려 포도주가 엎질러졌답니다. 그때 신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너는 커서 좋은 신부가 되겠구나."라고 축복하였답니다. 그 소년은 유명한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사실까?(The Life of Christ)"를 쓴 홀톤 쉰 신부라고 합니다.
한 소년이 작곡가인 아버지 곁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답니다. 아버지는 작곡을 하다가 상상력을 잃고 긴 한숨을 토해냈답니다. 그때 소년이 "아빠, 내가 한번 해볼게요."라고 말했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작곡을 맡겼고 제멋대로 적어놓은 악보를 보고 격려해주었답니다. "이것 참 대단한 작품인걸." 아버지의 축복의 말에 힘입어 소년은 세계적인 작곡가가 됐었답니다. 그가 바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한 요한 슈트라우스입니다. 축복의 말 한 마디가 재능을 살려내게 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새들백 교회를 개척하여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릭 워렌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써 수많은 기독교인에게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한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를 그 책에 써 놓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목사님으로 나의 아버지는 50년 이상을 시골 중소 도시의 교회를 섬기셨답니다. 아버지는 평범한 설교자셨지만, 사명감을 가진 분이셨답니다. 사역하는 동안 평생 전세계에 150개 이상의 교회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천국에 가시기 전 마지막 1주일 동안은 거의 24시간을 의식이 반밖에 없는 상태로 깨어계셨답니다. 아버지는 꿈을 꾸시면서 그 꿈에 대해 크게 말씀하시곤 했답니다. 아버지는 교회 건축 사업을 하나하나 회상하셨답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실 무렵, 자신과 아내와 조카는 아버지 곁에 있었는데 갑자기 생기가 돌아오셨고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셨답니다. 아내가 “아버지 뭘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어 보자 아버지는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이 말씀을 한 시간 동안 그 말을 백 번 정도 하셨답니다. 자신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답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마치 명령을 하시듯, 약한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에 얹고 말씀하셨답니다.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라!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구해라!” 그때 릭워렌 목사님은 자신의 삶의 주제로 아버지의 축복의 말씀을 삼았답니다.
자식들 뿐 아니라 손자들 뿐 아니라 민족과 교회와 사회를 위해, 성도를 위해, 열방을 위해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축복은 받은 자식이 축복받은 인생이 그 축복을 받게 되고 교회가 세상이 그 축복을 받게 됩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을 저주하고 부모를 저주하고 인생을 저주하며 살지 말고 늙어 죽음이 다가오면 올수록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3. 우리는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경배하여야 합니다.
야곱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믿음으로 경배한” 것입니다. 야곱이 죽을 때 마지막 무엇을 했는지 창세기 47장 3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이제 야곱의 나이 147세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죽음 직전입니다. 요셉을 불러 요셉에게 부탁합니다. 애굽에서 장사 지내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약속의 땅에 장사하라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애굽에서 장사하면 얼마나 화려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 땅의 화려함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총리 아들의 화려한 장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우상 숭배자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경배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습니다. 야곱은 지팡이 하나 들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험한 세월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야곱이 침대 머리맡을 향하고 그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한 것입니다.
그가 경배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태어날 때에(창25:23) "여호와께서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라고 약속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장자의 명분을 얻었을 때 (창27: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 27:29)"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도망가며 벧엘 들판에서 있을 때(창28:14-17)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이십니다.
20년 세월을 라반을 위해 봉사하다가 라반에게서 떠날 때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31:3)”라고 약속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형으로부터 죽음의 위기에 처할 때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 주며(32:2) 얍복 나루터에서 그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몇 달 전에 천국 가신 이어령 교수께서 지은 <메멘토 모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고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병마와 싸우면 죽음을 앞에 놓고 있는 이어령 교수께서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답을 합니다.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부모님이라고 바꿔봅시다. 우리가 부모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우리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믿고 살아왔지 정말로 나를 낳아주셨는지 나를 사랑하시는지 의심해온 경우는 거의 없어요. 만나는 동안 한 번도 그 사랑을 의심하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에 관계가 이어진 거예요. 그런데 부자지간이나 연인 사이에 증명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미 그건 끝난 이야기예요. 어느 날 아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정말 저를 낳으셨는지, 저를 사랑하고 계시는지 증명해 보십시오"라고 한다면 "DNA 감정을 해주십시오"라는 말이 되고 지금까지 저를 사랑하신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이미 그 부모 자식 관계는 파탄 난 것입니다. 연인 사이도 똑같아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어느 날 차를 마시면서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증명해"라고 한다면 그 관계는 끝이 난 거예요. 부모 자식 관계가 그렇고 연인 사이가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증명하는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요.”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이 믿었던 하나님을 삶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늙어서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지게 됩니까? 창세기 43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창세가 43장에 보면 흉년으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1-2절을 보면 기근은 심한데 양식은 조금 사오라고 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자기 객관화를 시킬 수 있는 믿음의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남도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가족도 많고 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처럼 자기만 잘 살기 위해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요셉에게 시므온이 인질로 잡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 자기 어머니 라헬이 낳은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라헬을 사랑한 야곱은 베냐민은 자기 목숨처럼 귀한 자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고백을 합니까? 창세기 43장 14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은혜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합니다. 결국 평생 그리워했던 요셉도 만나고 베냐민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가운데 개입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삶을 통해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그 하나님을 경배하며 숨을 멈추는 것입니다.
애굽이 자신이 살았던 정든 땅을 떠나 이제 가족을 이끌로 애굽으로 갑니다. 그 때 야곱이 무엇을 합니까? 창46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요즈음 말하면 예배를 드립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무슨 약속을 해 주십니까? 3-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은 바로 죽음 앞에 이를 때 이렇게 이 땅에서 영원한 본향으로 이사 가는 것으로 믿고 마지막 경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죽는 믿음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경배하며 죽는 것입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던 우리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경배하며 죽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평생 새벽 기도하시다가 새벽 기도하시다가 천국에 가신 장로님이 계십니다.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인데 영육간에 건강하게 사시며 새벽기도 하시다가 천국 간다면 얼마나 복스러운 죽음이겠습니까?
언젠가 우리의 인생도 이 땅을 하직하고 영원한 본향 천국으로 떠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믿음으로 죽으시길 바랍니다. 그때에서 우리는 축복하며 마지막을 떠나시길 바랍니다. 그때 마지막 남은 힘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며 천국에 가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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