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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9) 아브라함의 믿음(2)(히브리서11:17-1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6532 추천수:5 220.120.123.244
2022-07-24 17:24:17

믿음(9) 아브라함의 믿음(2)

히브리서11:17-19

 

성경 이외에 가장 뛰어난 기독교 고전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두 권 만 소개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폭스의 순교사>를 듭니다. 폭스의 순교사에는 우리 주께서 고난받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당했던 모든 시대의 박해와 고난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책 1장에는 네로에 의해 자행된 첫 번째 총제적인 박해가 나옵니다. 네로가 54부터 68년까지 황제로 있었는데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가 64-67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로 황제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을 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특히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64년 네로는 로마시를 6일 동안 불태우고 시민들의 분노가 그에게 향하자 그 모든 원인을 힘없는 그리스도인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는 온갖 상상할 수 있는 처형 수법을 고안해 내 신앙인을 처형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도 그에게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화형이나 십자가 형은 물론 그는 어떤 이들은 짐승의 가죽에 꿰매어 넣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개들에게 물어뜯게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밀랍을 먹여 딱딱해진 속옷을 입혀서 마차의 차축에 단단히 고정시킨 후 자신의 정원에서 불태워 야밤에 그곳을 환하게 밝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6-38절에 보면 그때 신앙인들이 얼마나 큰 고난을 당했는가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인들이었는데 개종하여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냥 유대교인으로 살면 평안하게 살았을 텐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조롱과 채찍질, 결박,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 궁핍과 환난, 학대를 받으며 집과 전토를 잃고 유리방황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가 부모가 돌아가시고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식이 죽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신앙인에게 히브리서 11장을 통하여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선조들의 믿음을 통해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런 시련 앞에서 어떤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교훈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날 믿음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고난을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극복해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성경에서 시험은 세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시련이고 둘째는 유혹이고 셋째는 테스트입니다. 여기서는 테스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정도를 하나님께서 알아보는 것입니다. 시련을 테스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련이 생기면 시험들었다고 교회를 떠나지 말고 테스트를 받고 있다고 그 테스트를 잘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나은 삶이 주어집니다. 훈련의 과정에서 테스트를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기르면서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후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노년의 때 이제 블레셋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확보된 때입니다. 모든 경제적 어려움도 다 해결되었습니다. 지금 말하면 이민 가서 아이도 없이 심히 개고생했는데 아이 낳고 살만할 때가 되었을 때 시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 고생하고 아이들 잘 기르고 집을 장만하고 살만하니까 시험거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결혼하여 아이들 낳고 살만하니까 시험거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사업을 잘하여 번창되고 안정될만 하니까 시험거리가 다가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존경하는 아브라함도 시험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삭을 통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아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아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조금 덜 중요한 것을 요구하면 될텐데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우리가 가장 소중한 것들, 재산, 시간, 재능, 건강, 직장, 집, 자식, 배우자, 부모, 학위 등으로 시험 거리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 시험은 네가 지금 이삭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이삭보다 이삭을 주신 하나님을 더 우선순위에 둘 수 있겠느냐는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학이 문제인지 영어가 문제인지 과학이 문제인지 깨닫고 보충하면 됩니다. 이 난해한 시험의 열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이 한마디로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오직 바로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인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인가 갈등 앞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의 상실 앞에서 "나 무엇과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 이시기 때문에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온 맘과 정성 다 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라는 찬양을 받으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때나 히브리서를 받을 때나 지금이나 이런 찬양을 진실하게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외아들 네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은 네 가지 면에서 이해할수도, 순종할 수도 없는 명령입니다.

첫째는 신앙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잔악무도하신 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비인간적인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살인 교사범이 될 수 있고, 친족 살해를 강요하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하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으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약속한 것을 바꾸시는 변덕쟁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어떻게 아들을 죽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귀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할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간에,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 간에, 과거의 말씀과 현재의 말씀 간에 모순이 생겼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명령이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나처럼 아들을 달라고 애걸복걸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준다고 약속하고 그 아들은 25년 만에 기적적으로 낳게 하신 후 다시 죽이라고 하니 이성적으로 말이 됩니까? 인륜적으로도 도덕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조폭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유를 알아야 하고 자신이 설득되어야 그 말을 따르는 것인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적 성향과 이성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는 좋은 결과를 위해 하는 것인데 그렇게 자식을 죽여 하나님께나 아브라함에게나 무슨 유익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셋째는 정서적으로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을 죽일 수 있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얼마나 강렬합니까? 차라리 자신이 죽을지라도 어떻게 자식을 죽이라는 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넷째 의지적으로 순종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번제라는 것은 짐승을 토막내어 불로 다 살라 제사드리는 것입니다. 마취제를 놓고 해도 그렇게 할 부모가 어디있겠습니까? 자식을 묶어 놓고 어떻게 칼로 자식을 그렇게 죽여 제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잔악무도한 파렴치한 인간도 자기 자식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순종할 수 없는 참으로 황당한 하나님의 명령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새벽에 일어나 적극적으로 순종을 하였습니다. 아들이 나무와 불은 있는데 양은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되어도 여호와께서 준비해 주실 것이라고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가지고 순종합니다. 무식하게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아 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올려 놓고 칼로 그 아들을 짐승 잡듯 잡으려고 하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리고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하고 아브라함은 그 땅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였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일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신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믿음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은 우리를 죽이려는 시험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을 기회로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신앙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의지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도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단순히 드릴 때 일어난 것입니다. 40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나 걷지 못한 사람도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할 때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의 믿음이 그랬습니다. 극렬한 풀무 불에 들어가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3:17)”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8)”라고 했습니다. 시련은 믿음을 분별해 보는 시금석입니다(약1:2-4 벧전1:6,7) 하나님은 우리가 훈련받아 믿음의 용장으로 어떤 시련도 담대하게 이기며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시길 원합니다. 아브라함도 인륜과 천륜, 논리, 합리성, 모순 등으로 얼마든지 순종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합리화하며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1서 5:4)”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2.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왜 아브라함은 그렇게 전혀 몰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했을까요? 시련 앞에서 시련을 이기게 하는 순종하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1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는 아브라함을 말합니다. ‘하셨으니’는 ‘약속하셨으니’ 입니다. 17절에는 ‘약속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약속한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하여 출생하는 자들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해질 것을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창21:2에 보면 이스마엘을 내어 쫓을 때 아브라함이 심히 근심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믿고 이삭을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사람도 신실성이 없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약속을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서 25년 후 그 약속을 성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성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우선순위에 두고 믿은 것입니다.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을 통하여 후손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삭이 죽지 않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시는 것은 변치 않고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라의 고백을 보십시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재림할 것을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믿기 때문에 죽음 후에 천국이 있다는 약속을 믿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과 시련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여기서 생각했다는 것은 “간주하다. 추정하다. 신중히 생각하다. 논리적인 결론을 내리다”등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 말에서 논리, 이성과 같은 단어가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하나님이 이삭을 제물로 받으신 후에라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로마서4장 17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추론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못한다하여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막10:27). 저는 어릴 때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광야에서 먹고 이런 성경은 내용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인 것을 믿고 나니 모든 것이 믿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거짓말 장이나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장하였듯이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이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순교했겠습니까? 오늘 히브리서를 받는 교인들이 그 어려운 고난과 핍박을 견디면서 예수님을 믿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부인하면 그 한 마디로 모든 고통은 끝이 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을 믿고 고난을 당하고 순교했습니다. 거짓을 위해 그렇게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율법과 시편과 선지서는 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성경이 사실이고 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13년 동안 침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신의 몸종 하갈을 첩으로 받아들여 아이를 낳으라는 아내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아네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다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3년 동안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뼈저린 반성과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13년 만에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은 첫 마디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17장 1절을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해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꼬득여 이스마엘을 낳게 하고 늙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자포자기한 사라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창18장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람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을 확실하게 부부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부부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것을 같이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27)”

어떤 시련 앞에서도 이런 믿음이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련 가운데 가장 큰고 견디기 힘든 시련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죽어도 산다는 이런 믿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죽음 앞에서도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죽음 앞에서 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담대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3.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도로 받았다는 말은 스스로 혹은 자신을 위해 돌려받았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힘들고 어려운 시험을 믿음으로 잘 극복함으로써 그에게 축복을 가져다준 이삭을 생명 있는 채로 되돌려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죽은 자를 되돌려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믿음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제물을 예비해 놓을 것이라고 했는데 여호와 이레가 이루어졌고 결국 이삭은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되어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시험을 믿음으로 이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해 주십니까? 창세기 22장 16-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그를 복의 통로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시련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많은 위로와 교훈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단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로만 해석하지 않고 “비유컨대”라는 말을 상징, 비유, 예표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사건에서 조금 더 다른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친 사건은 예수님께서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는 사건이라고 해석해도 무리한 해석이 아닙니다. 아마 무수한 시련 가운데 이 성경을 읽고 있었던 당대의 신앙인들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갈등과 모순의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 이삭을 바치는 상황을 보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순종의 아들 이삭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이삭을 다시 돌려 받은 사건을 통해 이삭은 부활의 전형이 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감정과 의지적으로도 이해할 수도 할 수도 없는 이런 황당한 일을 우리 하나님이 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산에서 우리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유일무이한 인류 구원의 방편이 될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요14:6). 잔인무도한 인신 제사를 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잔인무도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이삭을 죽이라고 한 것은 무죄하신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설명도 설득도 없이 명령하는 것은 십자가의 진리가 이해나 설득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고전1:18).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 이삭은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골로다 언덕으로 가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 언덕에서 번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으시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메달아, 물과 피를 다 쏟아 죽게 하셨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억울함과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왜 우리가 이런 고난과 수모와 고통을 당하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시냐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나만 당해도 되는데 왜 우리 아들 손자까지 이런 시련을 당하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시련을 당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 때문에 아들이 죽고,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고 딸이 죽는데 아브라함이 받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느니라 라는 위로의 말씀을 전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서 시련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 어려운 시련을 견디며 승리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을 것입니다. 시험감독은 시험 치를 때는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시험을 다 본 후에 답을 말해 줍니다. 역사의 사건 속에 시험감독으로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있는 바울은 시련을 당할 때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때문에 고난받는 것을 상급으로 생각하며 기쁘게 받았습니다.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의 <침묵>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극심한 박해로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해서 쓴 책입니다. 박해자들은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다 십자가를 세워 놓고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잠시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 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푹 잠겨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답니다.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고 고통의 현장에서 같이 그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이들 양육하는 고난의 현장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장애아를 기르면 남모르는 눈물을 흐릴고 있을 때 그 현장에 우리 주님이 함께 눈물을 흘려 주시고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긴 침묵>이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마지막 대심판의 날에 수많은 사람이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유대인 여자는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서 지옥같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냐는 것입니다. 어느 흑인 남자는 목에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매 맞고 고통을 당할 때 어디 계셨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아픔과 배고픔과 전쟁과 질병이 없는 저 높은 천국에 홀로 계시니 자신들의 고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 고통, 절망, 죽음을 당하지 않으시니 얼마나 편안하고 좋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유대인 대표, 흑인 대표, 관절염 환자 대표, 암 환자 대표, 기형아 대표, 심지어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휴유증 환자 대표를 선출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할 자격을 가지시기 전에 하나님도 우리가 겪은 고통을 한번 맛보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되 고난을 많이 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하나님은 왕족이나, 귀족의 집안이 아니라, 농촌의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사생아 비슷하게 태어나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고생하며 땀 흘리며 노동을 해보아야만 한다. 하나님도 친한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아픔도 겪어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공정치 못한 재판관을 만나 억울한 판결을 받아보며, 우리처럼 매 맞고, 고문의 고통도 겪어 보아야만 한다. 하나님도 우리처럼 죽음의 외로움과 두려움도 맛보아야만 할 것이다.” 원망과 불평으로 입이 불거진 사람들은 하나님도 자신들처럼 고통과 아픔, 배고픔, 환란, 절망을 맛보아야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긴 침묵 속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겪으셨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치 독일 당시 쾰른 감옥에서 한 유대인이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음을 믿었다.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사랑이 존재함을 믿었다. 나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질병에 걸려 죽고, 사업이 잘 되지 않고, 취업이 안되고, 사고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신앙적 회의를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거나 충격적으로 다가오면 신앙에서 떠나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진화론을 쓴 다윈도 어릴 때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심장이 과도하게 뛰는 심계항진, 설사, 각종 피부 질환, 불면증 등에 시달렸답니다. 8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답니다. 지극히 사랑했던 첫째 딸 애니가 10살의 나이로 죽었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고 신앙적 회의를 하고 하나님을 떠나거나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무신론자가 되던, 회의론자가 되던, 불가지론자가 되어 버립니다. 의인이 고난받는 현장에서 마치 하나님이 침묵하고 악이 횡행하여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지 않는 것 같이 보여도 고난에도 다 뜻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야 깊은 바다 물고기도 산소가 부족하지 않아 살 수 있습니다. 바람이 있어야 비행기도 떠는 것이고 물이 있어야 배도 항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돌이 있어야 개울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고 레일이 구속인 것같지만 레일이 있어야 기차는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픔이 있어야 진주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시련이 심하면 심할수록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승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아들 딸에게 배반당하고, 억울하게 핍박당하고, 최고로 중요한 것을 빼앗기고,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일찍 떠나고 이런 것 들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당한 것에 비교하면 그래도 견딜만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 시련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련을 당할 때 시련이란 시험을 통과하여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시련일지라도 시련을 당할 때 테스트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이기시길 바랍니다.

시련을 당할 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이기시길 바랍니다.

시련을 당할 때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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