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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14)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 2(요21:15-18)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803 추천수:4 220.120.123.244
2022-06-12 14:04:52

회복(14)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 2

요21:15-18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을 대신하여 초대교회 지도자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맡기려고 3년 동안 훈련을 시켰습니다. 앞으로 초대교회를 시작시키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시킬 뿐 아니라 베드로 전후 서를 기록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책임을 베드로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3천명, 5천명을 회개시키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아무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일을 하는 능력의 사람으로 베드로를 만들기 위해 특별히 훈련을 시켰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니까 배신하고 고향으로 도망가 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와 다시 회복을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불순종한 그에게 와서 순종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순종해야 앞으로 주님께서 맡겨준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떠난 베드로에게 찾아와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베드로에게 어떤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고 있습니까?

 

1.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으로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5절 말씀입니다. "요안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배신하고 도망간 베드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제 완전히 변하여 부활을 담대하게 전하며 살 법도 한데 다시 옛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배신한 사람들은 쳐다보기도 싫어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기 일을 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우편에 앉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히시자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가 고향 호수에 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천방지축이고, 무식하고, 다혈질적이고, 잘난 체 잘하고, 끼어들기 잘하고, 성질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배신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사람은 초등학교 실력도 안 되는 지식의 부족은 참을 수 있고, 다혈질적이어 갈릴리 파도같이 왔다 갔다하는 성질도 참을 수 있고, 성질대로 칼로 말고의 귀를 베는 것과 같은 경솔하고 충동적인 기질도 참을 수 있고, 성질부리고, 나서기 좋아하고 뒷감당을 못하는 것도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신은 참기 힘듭니다. 남편과 아내가 조금 모자라고, 능력이 없는 것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바람피우는 것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공의의 하나님이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배신한 아담과 하와 에덴 동산에서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단테는 '신곡(神曲)'에서 배신자를 지옥 맨 밑바닥에 두었습니다. 배신자로 자기의 스승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와 로마황제 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한 그의 친구이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넣어 놓았습니다. 단테는 배신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악 중에서 가장 밉고, 더럽고, 비열한 최대의 죄악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신하고 저주까지하고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와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5절 말씀입니다. "요안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한 번 선택한 인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은 그를 찾아 오셔서 "왜 부인했어 나쁜 놈, 네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수제자로 배신해, 장모의 질병까지 고쳐주고, 갈릴리 어부를 거두었는데 그렇게 해, 조폭 깡패도 그렇게 못하겠다. 배신자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너 알지 못해. 아담도 배신해서 그렇게 된거야."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치고 상하고 배고프고 패배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친히 조반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을 초청하시고(9-13절) 베드로에게 진정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 보십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저주할 때 숯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다 그랬는데 주님은 그 때를 상기할 수 있도록 숯불을 펴 놓고 베드로에게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아마 새벽이어서 닭은 목청을 높여 울어댔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여기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헬라어 원어로 '아가파스 메' 아가페는 사랑이고 메는 나이니까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입니다 . 또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원문으로 "후토스"입니다. 대명사이고 "이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가리켜 "이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물건을 가리켜 "이것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사람을 받는 대명사로 해석했습니다. 지금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다가 지쳐 올라온 제자 7명을 보시면서 베드로에게 여기 있는 여섯명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연약한 제자들을 잘 하시기 때문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장담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막 14:29)" 이 사람들 다 배신한다 할지라도 저만큼은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요13:37)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힘 있게 부인하지 않겠다고 예수님 앞에서 다짐하고 다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비교하며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의 다짐과 장담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도 다시 먹고 살기 위해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를 찾아 오셔서 예수님은 야 그 때 “너 그렇게 장담했는데 이 사람들보다 정말 나를 사랑해”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준은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배신하고 실패하고 얼마나 낙심하고 있었겠습니까? 배신했다고 그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와 십자가의 사랑을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누구와 비교하여 사랑하는 수준에 머물면 안됩니다. 비교하면 서운함과 억울함만 많아집니다. 학벌, 외모, 키, 직업, 연봉 등으로 비교하면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지게 되고 비교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되고 지속적으로 비교하면 그 사랑은 파멸로 끝이나 버립니다. 사랑은 비교 가능한 대체물이 아닙니다. 비교의 함정에 빠지면 불행하게 됩니다. 신생아실에서는 누가 더 날씬한지 누가 더 귀여운지 비교하지 않고 세 살 때는 누구의 장남감이 중고품인지 명품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측정과 평가하는 세상에 살다보면 비교의 함정에 빠져 살게 되어 있습니다. 비교는 영혼을 좀먹는 암과 같이 행복을 파괴해 버립니다. 비교의 함정에서 빠져 나오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시선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살면 무엇을 하든 행복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아카페 사랑은 값어치 없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는 희생적 사랑입니다. 성경은 십자가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아직 십자가의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사랑, 우리를 위하여 멸시를 당한 사랑,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한 사랑, 우리를 위해 버림을 당한 사랑, 우리를 위해 슬픔과 질고를 당한 사랑, 우리의 허물을 위해 찔림을 당한 사랑,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한 그 대속적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라고 말씀하셨고, 서로 누가 높냐, 누가 옳으냐를 놓고 비교하며 싸우는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계속 강조했지만 베드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를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자식들이 잘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받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자신이 자식을 낳아 길러보면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쓸 것 제대로 쓰지도 못하신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됩니다.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배신하고 도망간 그에게 찾아오셔서 사랑하시는 주님을 경험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도 우리를 사랑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고 의롭다 해 주었으며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 안에서 즐겁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살면 얼마든지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사람과 같이 살아도 행복하게 사역을 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혜택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대명사 "후토스"를 사람들로 번역하지 않고 "이것을"로 번역해 "이것들 보다 더 사랑하느냐"로 번역했습니다. 물고기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의적 표현을 할 때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시켜 말씀하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문맥에서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밤새도록 일곱 명이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기를 보면서 야 이 고기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해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혜택을 더 사랑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 아무런 혜택이 없자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내가 주는 혜택이 아니라 정말 아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너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어"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총리나 부총리 쯤 예수님이 주실 줄 알고 예수님을 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런 것 안 주어도 사랑하겠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그 사람으로부터 혜택을 받아야 사랑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은 아무런 혜택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혜택이 아니라 손해를 끼쳤는데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요 13:1)"는 사랑입니다. 거짓말 하는 아브라함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살인한 모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살인하고 간음한 다윗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냐고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물어 보십니다. 주님은 이 사랑을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데 153마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주님을 떠나 버리는 것이 인간의 사랑 수준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꾸 사랑의 대상을 주님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교체하려고 하니까 인간은 불행해지고 날마다 목마르며 만족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서로 누가 높냐고 싸울 때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2-13절에서 새계명을 준다고 말씀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잘못되면 인간은 불행해집니다. 153마리가 사랑의 대상이 되면 인간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딤전6:10)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까 돈을 섬길까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153마리를 채우기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삶이 불행해지고, 세상이 혼탁해지는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대부분 탐욕 때문입니다. 푸틴이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까? 사랑을 이용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정이 파괴되고 불행해지고 있습니까? 사람은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채워진다고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153마리 없어도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 한분밖에는 아는 사람 없어요 가슴 깊이 숨어있는 주를 사랑하는 맘...,. 주님 한분밖에는 사랑할 이 없어요 작은 가슴 뜨거웁게 주님 피가 흘러요...나는 행복해요 죄사함 받았으니아버지 품 안에서 떠나 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인간은 주님 한 분 사랑하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님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영국의 백만장자였던 피츠제럴드 남작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들 하나를 낳아 금지옥엽으로 길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그 아들이 10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내 잃은 슬픔을 외아들을 양육하며 달랬습니다. 그런데 그의 바람과는 달리 아들이 병이 들어 안타깝게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돈이 있었고 유럽의 유명한 예술품을 수집하는데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자식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한 그는 죽기 전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변호사에게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수집한 모든 예술작품을 경매에 붙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소장품을 경매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예술품들은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했습니다. 그 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방의 어느 무명화가가 그린 보잘 것 없는 남작의 외아들 초상화였습니다. 경매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보잘것없는 그림에 입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입찰자가 나타났습니다. 남작의 아들이 살아있을 때, 그 아들을 돌보아주고 시중을 하며 사랑했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죽은 남작의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은 그 초상화를 사려고 했습니다. 그 그림은 1 파운드도 안 되는 값에 팔렸습니다. 경매인은 입찰을 중단하고 다음 순서를 위해 변호사에게 유언장을 한 번 더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변호사가 유언장을 읽어나갔습니다. "누구든지 내 아들의 초상화를 사는 사람이 모든 미술 소장품은 물론 나의 모든 재산을 다 소유하게 될 것!" 경매는 끝이 났고 그 아들의 초상화를 가진 늙은 하인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주님을 사랑하면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으로 얻을 수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10절 말씀에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조반을 주시는 것은 그들이 잡은 생선이 아닙니다. 12절에 보십시오.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가져오라는 것은 교훈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대로 그물을 던지니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153마리를 잡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것은 153마리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고 살면 행복하며 만족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3. 예수님은 부족한 사랑일지라도 사랑의 동기로 사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 보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죄송합니다. 부끄러워서 뵐 낯이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친구의 사랑을 표현하는 필레오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베드로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조건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연약하여 배신하긴 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건적인 친구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아가페 사랑과 필레오 사랑을 꼭 다르게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꼭 구분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본문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로 베드로의 사랑은 필레오로 구분하여 기록해 놓고 있기 때문에 아마 이런 뜻일 것입니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인지라 부끄럽고 예수님께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제가 예수님이 사랑하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적인 필레오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줄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고백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다시 물어 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필레오)하느냐." 예수님은 세 번째 베드로가 고백한 필레오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십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세 번 다시 물어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가페 수준의 사랑을 요구하지만 베드로는 우정 수준의 사랑으로 멈출지라도 예수님은 제자로서 사역을 맡길 때 다시 한 번 사랑의 동기를 회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님 앞에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변치 않는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아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인간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저는 저의 이 사랑이 언제 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하지만 그게 접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수준의 사랑을 말하지 못합니다. 사랑의 완성도가 예수님의 원하는 정도에 못미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직장 부하가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교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사 무엇을 시키든 완성도가 떨어진 부교역자를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사랑의 동기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종류는 사랑하는 수만큼 많을 것입니다. 육체적 사랑인(에로스), 유희적 사랑(루드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우애적 사랑(스토르게), 친구와 우정의 사랑(필리아), 논리적 사랑(프래그마), 집착하는 소유적 사랑(마니아), 이타적 사랑(아가페) 등 다양한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사랑이든 사랑에는 서로를 공유하는 친밀감, 난관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지속시키려는 관여, 열정 등이 포함됩니다.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 양육받으며 필리아에 의해 다듬어지고 아가페에 의해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사람마다 사랑은 말로 정의할 수 없는 단계가 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아가페의 사랑을 말씀할 때 계속해서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 주님을 그를 사랑의 수준이 미달된다고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랑 고백을 하는 그에게 목양의 사역을 맡깁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먹이다’ 는 헬라어로 ‘보스코’인데 안 먹으면 죽습니다. ‘치다’ 는 헬라어로 ‘포이마이노’인데 가축에 풀을 ‘먹인다. 돌본다(take care)’는 뜻도 있지만, 아울러 ‘다스린다(rule)’는 뜻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어린 양이고 둘, 세 번째는 성장한 양입니다. 각각의 양을 먹이고 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각각의 양에게 최상의 꼴과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보호하는 전문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랑의 수준이 높아야 합니다. 가능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아가페 사랑의 수준의 사랑의 동기가 필요합니다. 양을 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완성도가 높아야 합니다. 구약에는 백성들을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이끄는 것이 얼마나 힘이듭니까? 모든 생물은 자기 생존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 원칙을 따릅니다. 이타적 삶보다는 이기적 삶에 익숙해 있습니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못된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질 사나운 양, 변덕 심한 양, 제멋대로 하는 양, 병든 양, 추락한 양, 말썽 부리는 양, 삐진 양, 이중적인 양, 멍청한 양, 잘난 체 하는 양... 별별 양이 다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양이니까 사랑을 가지고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다 안다. 너의 약함도 알고, 너의 실패도 알고, 죄의 부인도 알고, 너의 성격도 알고, 너의 처지와 환경도 알고, 너의 죄도 알고, 너의 한계도 안다. 너의 사랑 가지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사랑을 가지고 시작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이든 필레오 사랑이든 사랑하면 상대를 아끼는 것입니다.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사역을 해야 지키지 않고 행복하게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목양도 해야 하고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자녀 양육도 해야 하고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전도도 해야 하고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봉사도 해야 합니다.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사역을 하면 물고기 153마리 없어도 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사랑은 '옳으냐 틀리냐'를 초월하여 부정한 짐승 먹을 먹을 수도 있게 합니다. 이방 땅에 갈 수도 있게 합니다. 죽음의 자리까지도 가게 만듭니다. 사랑 “애”자에는 “애지 중지”와 같이 애쓰다는 말이 담겨 있습니다. 아끼다는 말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아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애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장에 가고 싶어하고,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고 싶어합니다. 일하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초대교회는 사랑의 용광로에 세상이 녹아졌습니다. 3천명이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면 인생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면 교회 생활하면서 불평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재미가 있습니다. 야곱이 그 어려운 인생살이를 하면서도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창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바울은 그 험난한 세월을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은 부족한 사랑일지라도 사랑의 동기로 사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내었습니다. 그것은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로 가서 그곳에 사는 청소년 2백 명의 생활환경을 조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그 청소년들 각자의 미래에 대한 평가서를 써냈습니다. 평가서의 내용은 모두 동일했답니다. "이 아이에겐 전혀 미래가 없다.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또 다른 사회학과 교수가 우연히 이 연구 조사를 접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그 2백 명의 청소년들이 25년이 지난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추적 조사하라는 과제를 내었주었답니다. 학생들의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답니다. 사망을 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2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80명 중에서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답니다. 그들의 직업도 변호사와 의사와 사업가 등 상류층이 많았답니다. 교수는 놀라서 그 조사를 더 진행시켰답니다. 다행히 그들 모두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고, 교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직접 물어볼 수 있었답니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답니다. "여 선생님 한 분이 계셨지요." 그 여교사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답니다. 교수는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가서 물었답니다. 도대체 어떤 기적적인 교육 방법으로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었습니까? 늙었지만 아직도 빛나는 눈을 간직한 그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지요. 난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인생의 미래와 삶의 질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로댕은 "사랑의 힘은 기적을 낳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죽음도, 원수도, 욕심도, 경쟁심도, 이기심도, 증오도, 가난도 수치도, 창피함도, 수모도 사랑의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아 버립니다. 소포클레스는 "참다운 사랑의 힘은 태산(泰山)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그 힘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황금일지라도 무너뜨리지 못한다."라고 말했고, 체홉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이 공격 본능을 막아주는 가장 강력한 억지책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생을 인간과 사건에 관해 연구한 월 듀란트는 "이 천년 동안의 역사가 지니는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를 서로 사랑하십시오. 역사에 관한 나의 최종적인 교훈은 예수의 교훈과 같습니다. 당신네들은 이 말을 막대에 달린 사탕 정도로 여기시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이 회복되어야 교회가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해복한 가정은 사랑하는 가정이고, 가장 행복한 교회는 교우끼리 사랑하는 교회이며, 가장 행복한 회사는 직원끼리 서로 사랑하는 직장이며, 가장 행복한 나라는 국민이 서로 사랑하는 나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으로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혜택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사랑일지라도 사랑의 동기로 사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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