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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13)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 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506 추천수:9 220.120.123.244
2022-06-05 13:47:05

회복(13)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

요21:1-6

 

그동안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온 가족 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 오늘 2년 반 만에 온 가족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을 계기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예배가 회복되고, 기쁨이 회복되고, 찬양이 회복되고, 열정이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되고, 관계가 회복되고, 행복이 회복되고, 영적 능력이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되고, 비전이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영육간의 건강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감격과 사랑이 회복되고, 선교와 성경공부와 각종 모임과 봉사와 신앙의 순수함과 감사가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실패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1. 우리 주님은 실패의 현장에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가실 때가 언제입니까? 날이 새어갈 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을 새벽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디베랴 호수에서 그날 밤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실패의 현장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에 실패하고, 가정에 실패하고, 건강에 실패하고, 관계에 실패하는 등 각종 실패의 현장에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2절을 보세요. 시몬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2명 총 7명입니다. 이들은 3년 전에 예수님으로부터 사람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고 전도하며 권능을 행하게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자고 함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꿈꾸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주님과 함께 하며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다 주님을 버린다고 해도 자신은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갔을 때 대제사장이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특히 부탁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오늘밤 사탄이 너를 시험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위하여 기도 하였다. 그러니 잘못하고 난 후에도 회개한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여라 도와 주어라.”라고 예수님은 간곡하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함으로 실패했는데 예수님은 두 번이나 찾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여 주며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지금을 무엇을 합니까? 3절에 베드로가 주동자가 되어 형제들을 충동질해 무엇을 합니까? 갈리리 바다도 가서 고기를 잡자고 한 것입니다. 대부분 베드로처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상상력을 발휘해 추측해보면 “야 이제 다 필요없어. 예수님이 왕이 되면 국무 위원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이제 다 끝났어. 무엇보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해 우리가 예전에 해 왔던 고기나 잡어 먹고 살자”라고 했을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야 이 교회에 다녀봤자 자식들 결혼도 못시킬 것같아 청년들 많이 다니는데 나가야 배우자도 만나니까 코로나도 일상화되는데 큰 교회에 다니자”라고 누군가가 충돌질하고, “야 이 직장 미래가 없어 미래가 확실한 직장으로 옮기자, 이 사람과 더 살아 보왔자 미래가 없어 이 기회에 그만 두자” 등과 같이 예수님이 부활은 했지만 자신들은 국무위원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생계나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편리와 자신의 기쁨에 도움이 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지명하며 부탁하면서 형제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형제들의 신앙을 견고하기는커녕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선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베드로의 선동에 따라 고기잡으로 간 것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누구나 가까운 사람들이 선동하고 충동질하면 쉽게 사람은 의리도, 신뢰도, 관계도, 살아온 정도 배신하고 자기 갈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를 떠나 세상에 취해 본 것입니다. 술마시고 춤을 춰보고 노래도 해보고 고래사냥도 해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섬기던 교회를 떠나 십자가를 벗어 버리고 이익과 편리를 주는 교회를 다녀본 것입니다. 조강치처를 버리고 젊은 아내와 살아 본 것입니다. 공부의 본업을 떠나 실컷 오락을 즐겨본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전문 어부가 형편없이 그 밤에 실패하고 텅빈 배 속에 허탈해 하면서 돌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나오는 것처럼 큰 고기를 잡아 항구에 도달해 보니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두 번이나 보여 주었는데도 믿지 못하고 고기잡으로 간 결과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배신자로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망하고 알거지가 된 사람입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한 작은 아들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찾아가겠습니까? “나를 떠나더니 잘 되었다고, 마땅한 형벌을 받았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통쾌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실패자, 배신자, 망한 자, 비굴한 자, 변질자, 변덕자, 신앙이 약한 자 등을 외면하지 않고 회복시키기 위해 찾아가십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내가 그렇게 잘해 주었는데 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회복시키시고, 사랑을 회복시키고, 사명을 회복시키기고 비전을 회복시키기 위해 찾아가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회복은 첫 단계가 주님의 찾아 오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광인이 된 사람을 찾아 가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 살리심으로 기쁨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은 더러운 여자라고 아무도 상종해주지 않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인생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이 아무도 상종하지 않는 세리를 찾아가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38년 동안 한 번도 걷지 못한 베데스다 연못의 장애인을 찾아가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은 음행 중에 잡혀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있는 여인을 찾아가 용서해주시고 생명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은 40년 동안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을 찾아가 눈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행복을 회복시켜 주시고 소망을 회복시켜 주시고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2. 제자들은 찾아오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회복시키기 위해 찾아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리적 거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 서 있고 제자들은 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물리적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한 오십칸 쯤 됩니다. 약 100m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늘 주님과 같이 다니던 사람들이 주님과 물리적 거리가 떨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오시지만 우리가 자꾸 주님을 멀리하면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아무리 회복시키기 위해 문을 두드리지만, 마음 문을 닫아 버리면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과 관계에 대하여 부정적이게 됩니다. 가까이하기가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람을 만나거나 상대가 호의를 갖고 다가와도 웬만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철통같이 방어벽을 치고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하려고 합니다. 애초부터 관계를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심리적 자원을 총동원하여 과거의 상처를 덮어두는 일에 열중합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 아니면 뭐 우리가 못살 줄 아나요 얼마든지 우리도 돈을 벌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요”라고 말하며 쿨한 척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일도 피함으로 회복되는 것은 없습니다. 인생은 실패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실패했다는 것은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말이고 인간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며 실패할 필요가 없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회복을 위해 필요한 두 번째 단계가 직면입니다. 문제를 직면한다고 해서 문제가 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직면하지 않고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상담 기법 중에 직면이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신뢰 관계(라포)가 형성되면 상담자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문제를 알아차리도록 깨우치는 것입니다. 문제의 사고, 문제의 감정, 문제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목사님이 전문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회복되려면 나를 바라보는 나 즉 메타 인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나를 정확히 보려면 객관적으로 나를 알아야 합니다. 직명하게 하게 할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인간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직면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 직면 요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반하고 도망가 고기잡이하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은 고기가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주님이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다 아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없이 사는 삶이 행복하더냐? 나없이 사는 것이 진정 원하는대로 잘 되더냐? 나없이 너희가 주인이 되어 살아 보니까 성공하더냐? 나떠나 살아 보니까 그래 잘 되더냐?”라고 그들의 문제를 바로 볼 수 있도록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주님 없는 삶의 결과가 결국 무엇인지를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백합니다. “없나이다.” 이게 인생의 정직한 고백힙니다. 회복을 위한 두 번째 단계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시인하는 것입니다.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 수명의 한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없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무지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력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교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병들었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난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주신 생명을 거두어 가면 그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는 인생은 누구나 자신을 냉철하게 직면하면 낫씽(nothing)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살아서 펄펄 뛰니까 주님도 사람도 세상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고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패하면 남 핑계 대고 너무 억울하고 죄책감에 시달려 못 견디면 회복하지 못하고 가룟유다처럼 죽어 버립니다. “없나이다” 이 고백이 주님 없는 인생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부화 명예와 권력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결국 제자들 같이 빈 그릇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렇게 살면 교회 생활도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게 되고 다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하나의 도구에 불과해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삶은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을 이용하여 내가 사는 삶입니다. 타인을 이용하여 자신만을 살려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런 것으로 생각하니까 코로나 19같은 위기가 찾아오니까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내 안에 사는 삶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서 가난함에 처하면서도 만족하고 부함에 처하면서도 만족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행복해하고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행복해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어떤 처치에서도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난 삶에는 참 만족도 평안도 행복도 진정한 성공도 없습니다. 예수님 아니면 인생은 결국 텅빈 것이 되어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채우고 채워도 결국 때가 되면 다 살아지고 밤이 지나면 빈 배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할 때 회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회복은 무조건 회복을 위해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그 다름에는 주님을 만나 자신의 텅 빔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한 분밖에는 아는 사람 없어요 가슴 깊이 숨어 있는 주를 사랑하는 맘 주님 한 분밖에는 기억하지 못해요 처음 주를 만난 그날 울며 고백하던 말 나는 행복해요 죄 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 안에서 떠나 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3. 그때 회복시키려 찾아오신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회복시켜러 찾아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는 회복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참으로 중요한 결단의 단계입니다. 순종의 문을 통해 회복은 들어오는 것입니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주님은 고기잡는 전문가인 어부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갈리리 호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전문가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누군가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면 던지겠습니까? 고기가 잡힐 만한 곳에 이미 그물을 다 던져본 그가 이 새벽에 지친 몸으로 던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내 지식, 내 생각, 내 경험에 맞지 않는 일에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합리성과 객관성, 타당성이 없는데도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회복을 위해 상담자을 찾아가는데 내담자가 상담자의 말에 순종하려면 충분한 신뢰관계(라포)가 형성이 되어야 합니다. 환자가 의사의 말에 순종하여 약을 먹으려면 의사를 신뢰해야 합니다. 의자를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순종이란 말 속에는 신뢰, 긍정, 수용, 모방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신지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순종을 할 수 있게 되었겠습니까? ‘얘들아’라고 부르시는 칭호를 보면서 예수님인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단어는 ‘파이디아’라는 단어이며 보통 7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향해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자신들을 이렇게 부를 사람은 자신들의 부모 외에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님들은 자녀를 보며 친근하게 애정을 담아 “얘야”라고 부르는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애정어린 말로 “얘들아”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고는 그들을 그렇게 부를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직감했을 것입니다. 관계의 경험을 통해 안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의 경험을 통해 안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이 상황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날도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짜고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를 않습니다. 지체하지 않고 즉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때 상황에 대하여 성경은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직감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즉시 순종한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듣지 않고 미루고 핑계하고 버티다가 손해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돈 잃어버리고 건강도 빼앗기고, 다치고, 사고 나고, 남에게 사기 맞고, 배신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당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불순종은 사망과 재앙을 가져오고 말씀에 순종하면 생명과 복을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다”라고 말하고 순종을 말씀하고 있는데 에덴 동산에서부터 순종하는 것은 쉬지 않았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정령 죽을 것이라고 말씀했는데 사탄의 유혹에 져서 그것을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배후를 지배하는 것은 불순종의 영입니다. “사단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엡2:2)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불순종의 영이 배후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고 살기기 쉽지가 않습니다. 순종만 하면 기쁨이 회복되고, 영적 질병이 회복되고, 삶이 회복되고,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회복되는데 사탄은 너 자신을 믿으라고 유혹합니다. 이런 과학문명이 발달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비문명적 비과학적 사고이고, 결국 손해보고 망하는 길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보다 사탄의 말을 더 믿으니까 사탄의 수하에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탄의 말을 따르다 보면 왜 속는지도 모르고 불순종의 자리에 들어가 사탄에게 종속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와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자기가 속은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 자리에 들어가 사단의 권위 아래 종속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란스럽고, 아프고, 갈등과 번민으로 힘들어합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 따르다가 이 교회 저 교회 방황하다 결국 신천지 같은 이단에 노예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회복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얻는 것도,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것도,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고침받은 것도, 히스기야가 생명을 연장받은 것도,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도 결국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야면과 같은 것입니다. 믿으면 믿을수록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낙원의 상실에서부터 회복에 이르기까지 그 법칙은 변함이 없이 순종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불순종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고 요한계시록에서의 순종은 다시 그 길을 회복케 했습니다. 계시록22:14에서 “그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라고 말씀합니다. 12:17에서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기록하였고, 14:12에서는 성도들의 인내에 대해 설명하면서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사는 순종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또한 빌립보서 2:8-9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그리고 히브리서 5:8-9 “그가… 순종함을 배워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 사역의 목적은 순종을 다시 회복하는 데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만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새로운 선조인 노아도 택한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은혜를 받아 순종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성소를 만들던 때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는 말씀이 열아홉 번이나 반복되고, 명하신 대로 다 행한 후에야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중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불순종의 대가로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한 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때도 순종할 때에만 가나안 땅이 축복의 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이 임명될 때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하고 전적인 순종이 필요함을 엄히 경계하였습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모두가 순종을 싫어하지만 회복의 비결은 작은 것에서부터 순종에 있습니다. 회복은 작은 순종에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병든 아이가 약 먹기 싫다고 약을 먹지 않으면 아이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순종보다 더 최상의 회복의 원리는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와 관계를 회복하려면 부모에게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부부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남편에게 주신 말씀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내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원수 관계에 있는 사람과 관계를 회복하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사람과 관계를 회복하려면 490번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자식과 관계를 회복하려면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버지과 관계를 회복하려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진정한 복을 잃었습니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명령을 불순종하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 19:26). 노아 홍수 때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받는 자들은 다 순종치 않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3:20).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거꾸러진 것은 불순종 때문입니다(민14:26-39) 순종하는 것은 단순한 미덕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의 본질입니다. 심장도 뇌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허파도 뇌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으면 호흡이 멈춥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삼상15:22). 순종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신 28: 1-14, 사1:19), 순종하면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행5:32). 그러나 불순종하면 신명기 28장에서 모든 저주가 네 게 임하고(15,45,46), 모든 민족에게 놀램, 속담, 비방거리가 되고(37), 모든 경내의 열매가 떨어지고(40), 모든 나무의 소산을 메뚜기가 먹고(42). 모든 성을 원수가 에워싼다고 했습니다(52,53,55). 순종이 에너지 향상의 근원이며 불순종은 에너지 저하의 근본요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

 

순종을 통해 회복해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말씀에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집니까까?

첫째는 성과를 거두는 풍요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말씀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153마리를 잡았는데 그물은 성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순종을 통해 일어난 현상을 보면서 주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 부활하여 회복케 해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내려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작을 배들 타고 갔습니다.

넷째,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게 됩니다.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신 예수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주님을 떠난 사람들이 회복케 해주닌 주님께 오니까 자동적으로 먹을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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