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5) 영적 가족이 함께 지속적으로 행복하려면
요한복음15:9-14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족 시리즈로 설교로 첫주는 자녀의 행복을 원한다면, 둘째 주일은 부모와 자식이 행복하게 살려면, 세 번째 주일은 부부가 행복하게 살려면, 네 번째 주일은 가족이 이웃과 함께 행복하려면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오늘은 2022년 5월 마지막 가족 시리즈 설교로 영적 가족이 함께 지속적인으로 행복하려면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영적 가족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가족들의 모임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한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곳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가족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세상 가족관계는 이 땅 살다 끝이 나면 그것으로 끝이 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신앙인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영원한 가족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9)라고 말씀합니다. 권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 하나님”에게 입양되어서 주 안에서 서로가 형제가 되고, 서로가 자매가 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야곱, 모세도, 여호수아도, 사무엘도, 다윗도, 엘리야도, 엘리사도, 이사야도, 에스더도, 다니엘, 바울, 베드로, 요한도 다 영적 한 식구입니다. 오늘 함께 가정에서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도 다 영적 가족으로 영원히 천국에 살아갈 식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애경사가 있을 때 서로 찾아 보고 같이 웃고, 같이 울며, 서로 돕고, 기도해주며 한 시대를 같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관계로 인하여 불행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영적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오래도록 행복하게 하는 것은 “관계”라고 말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1938년부터 하버드 대학교 성인발달 연구소가 75년 이상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사람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좋은 관계’라고 합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인간관계에 대하여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첫째, 사회적 연결성은 우리에게 유익하며, 반대로 외로움은 뭔가를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과 친구 또는 공동체와 더 많이 연결된 사람들은 관계가 적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합니다. 외로움 속에는 심각한 독성이 들어있는 걸로 드러났답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고립된 상태로 사는 사람들은 중년에 덜 행복하고 건강이 쇠퇴하기 쉬우며, 노년에 뇌 기능이 더 빨리 저하되고 더 일찍 사망한답니다. 알츠하이머와 치매와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답니다.
둘째, 사회적 연결성은 인맥의 양이 아니라 질이고, 친밀한 사이일수록 질이 더 중요하답니다. 갈등 속에서 사는 것은 건강에 해롭답니다. 갈등이 심하거나 애정이 없는 결혼 생활은 매우 해롭답니다. 그 연구에서 콜레스테롤 수치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피실험자들의 나이가 아니라,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만족도였답니다. 50대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사람들은 80대에 더 건강했답니다.
셋째, 좋은 관계는 신체를 보호할 분만 아니라, 뇌도 보호한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애착으로 단단히 연결된 관계를 가진 80대는 그렇지 않은 80대보다 더 건강했답니다. 노년기에 다른 사람과 안전한 애착 관계를 맺으면, 그것이 보호막이 되고, 그런 사람들의 기억은 더 오랫동안 더 선명하게 유지된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다고 느끼는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일찍 기억을 잃어버린답니다.
연구대상들이 젊은 시절에는 대부분 부와 명성, 높은 성취를 추구해야만 좋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가장 행복한 삶을 산 사람들은 그들이 의지할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성를 가지려면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소통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세 가지 요소가 꼭 필요합니다. “민감성, 반응성, 일관성”입니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타인의 감정을 예민하게 알아채야 합니다. 민감하게 알아차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상대에 대하여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도록 질 높은 좋은 관계를 가지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관계를 가지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두 가지만 꼽으라면
첫 째는 누가 높냐?라는 경쟁의식입니다. 둘째는 누가 옳은가?라는 정의 전쟁입니다. 이것 때문에 같이 교회 생활하면서도 서로 원수가 되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영적 가족이 된 교인들이 지속적인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요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 가족으로 부름받았지만 누가 높냐라는 권력 투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거 동락하며 살았던 제자들은 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오래도록 이 땅에 살면어 행복하게 살도록 하나님의 영적 가족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가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제 인류의 구원사를 완성하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씀하는 것입니다(마18:1-14). “선생님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에게 해 주길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을 때 하나는 예수님 오른편에 하나는 예수님 왼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열 제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소위 말하면 서열경쟁, 권력다툼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숨기지 않고 권력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날 로마를 무너뜨리고 로마와 결탁한 악한 왕을 제압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왕이 되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과 평화와 정의를 이루어 주시길 바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 다윗 왕국을 이루면 그때 한 자리씩 해 먹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속마음은 이제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서로 “누가 높냐?”라는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세속적 권력에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대권을 잡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국무총리도 되고 교육부 장관도, 법무부 장관도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요한의 어머니도 자기 아들들이 좌의정 우의정을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지배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을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사용한 방법이 이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하나님 자리를 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결국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고 그 후 끊임없이 누가 크냐는 싸움을 하며 불행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누가 높냐? 누가 크냐?”는 싸움을 합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까? 누가 지배권이 크냐? 누구의 집이 크냐, 누구의 차가 크냐?, 누구 아들이 잘 사느냐?, 누구의 회사가 크냐? 등 끝없이 서열경쟁, 고지점령 경쟁을 하고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니체는 일찍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아들러 역시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원천을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끝없이 자기 지배권을 확장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데이비드 L. 와이너는 그의 책 <권력중독자>에서 권력중독자는 "외면적으로는 순진하고 따뜻한 성품"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를 보통사람과 구분시켜주는 특성은 "좀 더 높은 수준의 지배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종종 도덕이나 윤리, 예의, 상식마저 무시한 채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배력이 강한 권력중독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과대 망상적 신념"을 가지고 있고 "역지사지"나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 등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떤 잘못에 대해서든지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울 방도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고 합니다. 우월감에 대한 열망은 오래도록 함께 행복하게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지방선거철을 앞두고 권력 추를 누가 잡느냐는 권력 투쟁이 한창 진쟁 중입니다. 예전에는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지금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투표로 결정되기 때문에 고대처럼 그렇게 피바람이 불지 않지만 법이라는 도구를 통해 피바람을 일으킵니다. 누가 크냐 누가 높냐라는 싸움만 하는 세상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닮아 누가 높냐 누가 크냐는 싸움을 하면 오래도록 행복한 영적 가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옳냐?”는 정의 전쟁을 벌였습니다(요13:21-22).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제 십자가를 지실 날을 앞에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된 예수님께서 이렇게 발을 씻겼으니 너희들도 서로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서로 의심을 하면서 상대가 팔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악하고 나는 선하다, 너는 불의하고 나는 의롭다”라는 의의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쟁을 하는 교회는 행복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핵심 세력인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십니까?
먼저 누가 옳으냐는 정의 전쟁을 하는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영적 가족으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의의 전쟁을 하면서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의의 기준으로 알고 있는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의롭냐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의해져 행복을 잃어 버린 인간에게 의를 부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예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의롭게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강조한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 14장 1절을 보십시오.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1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되어질 일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믿게 만들기 위해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요한 복음 16장 30,31을 읽어 보기시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의의 경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28절에서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서는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만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교회 생활하면서 의의 전쟁을 하면 하나님의 영적 가족으로 오래도록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불의하고 장로님이 옳고, 내가 옳고 너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함께 행복하게 신앙생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어 영적 가족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어떻게 살으라고 말씀합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옳으냐 경쟁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3장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자 22절에 소로 의심합니다. 너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싸우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요한복음 13장 34-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이 제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적 한 가족이 되었으면 누가 의롭냐고 싸우는 것보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의의 경쟁자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사람을 싸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데 예수님을 돈을 사랑하지 말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 전서 6장 10절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
첫째는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되고 죄는 그에 따른 징계와 형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15장 9절에서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라하고 말씀합니다.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친구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같이 사랑하였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의 전쟁을 이용한 사탄의 전략에 넘어가지 않고 영적 가족으로 평생 행복하게 살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의로운 길이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으면 어떤 경우에도 서로 사랑해야 영적 가족이 되어 평생 교회생활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내일 맑음(김민홍 저)>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후배 목사님이신데 책을 내었다고 한 달 전에 보내왔습니다. 그동안 읽지 못하다가 지난주에 읽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하여 시력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안과 진료를 제일 잘한다는 대학병원에 수술을 받기 위해 6인실에 입원했답니다. 그래도 모범생으로 살면서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고 열심히 목회했는데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답니다. 마음이 지옥같았답니다. 그때 병실에 자신을 중학교 2학년 때 교회로 인도하신 목사님께서 심방을 오셨답니다.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인데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예배를 드리며 시각장애인 헬렌켈러와 태어난지 6주만에 시각장애인이 되었지만 수많은 찬송가를 작시한 크로스비 여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민홍아 괜찮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잘 극복하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이올린, 비올라, 플루트 등의 악기로 성도들이 제인 크로스비 여사가 작곡한 찬송가 몇 곡을 연주해 주었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민홍아 이 찬송가도 장님이 작사한 곡이다. 이 찬송을 통해 너도 용기를 내기 바란다”라고 했답니다. 갑자기 9층의 어느 병실에서 큰 소리로 악기 소리가 들리니 간호사도 쫓아왔고, 복도를 걷던 환자나 보호자들까지 병실로 모여들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연주를 막는 사람이 없었고 그후 저자는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 순간 육신의 눈은 캄캄한 암흑 천지였지만 주위가 환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같은 병실에 있는 분들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명 속에 10년 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분도 교회를 다니겠다고 하고 천주교 신자인 분도 오늘 오신 목사님을 꼭 한 번 뵙기를 원하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되지 않아 장님처럼 생활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은 한 쪽 눈을 빼서 저자에게 기증하겠다고 했답니다. 그 결심을 식구들에게 말하여 허락을 받았고 본인이 섬기는 성도들에게도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목사님께 자신은 눈 가장 안쪽에 있는 망막에 이상이 있는 질병이라 이식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목사님의 사랑에 주체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한의사이자 고려대학교 교수님이신 집사님은 3년 동안 매주 토요일이면 자신의 집을 방문하여 1-2시간씩 대화하며 전인치유를 가르쳐 주었답니다. 신장 이식을 해야 하는데 선교사로 사역하던 친구가 소식을 듣고 와서 자신의 신장을 주겠다고 하는 제안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이 아들이 한 자매를 사랑하여 임신이 되었답니다. 지금은 며느리가 된 자매는 자신의 집에서 아들과 살겠다고 짐을 쌓가지고 쳐들어 왔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가정에 핵폭탄이 터진 것입니다. 목사님은 가정 사역에 비전을 두고 부부 성장학교 남편 사랑 교실,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결혼 예비학교 등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모든 사역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답니다. 설교할 자격도 잃었다고 판단하였답니다. 목사로서 교인들에게 면목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교인들 앞에 아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사표를 내었답니다. 교인들이 찾아와서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아프신데 사표내고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아들 덕분에 교인도 한명 늘고 내년이면 주일학생도 한 명 더 늘어나겠네요. 저희들은 다 이해하니까 사표는 없던 걸로 하시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만들어 주신 우리가 이 땅에서 교회 생활하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 3:18)”
사탄이 사용하는 누가 높냐는 싸움을 이기고 오래 도록 영적 가족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누가 높냐 누가 잘났느냐 누가 많냐를 놓고 싸우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그들의 말을 씻겨주면서 선생님으로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섬겼듯이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누가 높냐고 싸우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마가복음 10장 43-45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서로 섬겨야 오래도록 영적 가족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은 섬기는 생활을 할 때 영적 가족으로 행복하게 오래도록 살 수 있습니다. 모든 힘은은 섬김의 바구니에 담길 때 빛이 납니다. 때로는 '신의 대변자'로, 때로는 '개혁의 주체'로, 때로는 '정의의 집행자'로 자처하며 폭정을 행했습니다. 폭군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이기심을 충족하는 데 집중합니다. 다니엘 마이어슨은 그의 책 <폭군들>에서 네로와 러시아를 40년간 지배한 미치광이 차르 이반 4세, 거리의 부랑자에서 최고의 선동가로 올라선 히틀러,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했다가 비겁한 겁쟁이로 전락한 스탈린, 과대 망상증 환자 후세인을 대표적인 폭군으로 뽑았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사람들은 오래도록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농구황제 조던을 만든 사람은 딘 스미스 감독이라고 합니다. 그가 돌아가실 때 장례식에 1만명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조던은 그 자리에서 "내가 필요로 할 때 항상 그곳에 있었던 코치 이상의 코치였다. 나의 멘토이며 선생님이며 제2의 아버지였다"며 추모했답니다.
그는 1967년 남부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흑인 농구 선수를 발탁해 편견을 깼다고 합니다. 스미스 감독은 조던을 선수로 기르기 위해 내성적이고 집을 떠나기 싫어했던 그와 부모를 설득해 선수로 만들었답니다. 스미스 감독은 "우리 팀에 꼭 필요로 하는 선수가 바로 너" 라며 자심감을 복돋아주며 신입생인 조던을 주전으로 출전시켰답니다. 그는 농구 기술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제자를 섬기는 품성 좋은 스승이었다고 합니다. 스미스 감독에게 미국 시민의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스미스 감독이 남부의 인종차별을 몰아내는 데 기여하면서 민권운동을 진전시켰다"며 그에 대하여 "전설적 코치이자 신사였다"다고 애도했답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자란 그는 마지막 자신이 섬겼던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의 교회에서 가족장을 치르면서 "꽃을 대신해 스미스 감독이 도와 온 자선 단체에 기부해 달라"는 성명을 냈다고 합니다. 그는 농구장을 '하나의 교회'로 여기며 섬겼답니다. 그는 천국에 가기전 유산 관리인에게 200달러짜리 수표 180장을 건네며 "내가 죽으면 곧바로 우편 발송해 달라"고 요청했답니다. 깜짝 선물을 받은 수신자는 자신이 손수 가르친 제자들. 스미스 감독은 200달러짜리 수표와 함께 "내 선물이다. 이 돈으로 저녁 식사라도 즐기라"라는 글귀를 보냈답니다. 끝까지 섬기는 삶을 산 것입니다. 주어진 것으로 섬김의 삶을 살면 크던 작던 행복한 울림을 남기도 떠날 것입니다. 주어진 힘으로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보다 남을 섬기는 것이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섬김의 도를 가르쳐 준 후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4-1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영적 가족으로 교회 생활하면서 섬김도 기회입니다. 무디 목사는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데리고 있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가에 따라 판가름 난다."라고 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처녀의 몸으로 조선에 와서 5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 양 서거'라는 제목과 '재생한 예수'라는 부재로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고 합니다.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그는 간호학을 전공하고 32세 처녀의 몸으로 조선에 와서 조선 사람들을 섬김의 기회로 삼고 살았습니다. 고아 13명을 자신의 자녀로 입양하고 38명의 홀로된 여인을 거두며, 한센인 요셉을 아들로 삼아 함께 살았습니다.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에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고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를 하고 금주, 금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였습니다. 1933년 6월, 일본 총독부가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펼 때 동역자들과 함께 50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했고,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 530여명이 이 행진에 동참해 결국 총독부의 두 손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떠날 때 남긴 것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고 합니다. 한 장의 담요도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누었고, 시신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재능, 물질을 섬김의 기회로 활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과는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인생의 결실은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누가 높냐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면되는 것입니다. 누가 높냐라는 관심보다 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느냐에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교회는 서열 다툼하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5장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주님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의 열매, 성품의 열매, 사역의 열매가 주님 안에 거하면 맺혀지게 됩니다. 단순히 열매만 맺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안에 거하라는 말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4,5,6,7,9,10, 11).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여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16). 둘째, 기도응답을 받습니다(7). 기도하여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죄악 때문입니다(시66:18).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동기가 잘 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입니다(약4:3). 인간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마6:15). 믿음이 적어 의심을 가지고 구하기 때문입니다(약1:6-7)
셋째,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됩니다(8).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8).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첫째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5) 둘째, 밖에 버리워 말라진다고 말씀합니다.(6) 셋째, 불에 던지운다고 말씀합니다.(6)
열기 닫기
| 쪽지 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