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믿음(6) 아브라함의 믿음(히11:8-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49519 추천수:9 220.120.123.244
2022-04-24 03:45:47

믿음(6) 아브라함의 믿음

히11:8-10

 

성경에는 인류의 조상 세 분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인류의 최초의 조상인 아담입니다. 둘째는 홍수로 모든 인류가 다 죽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와 그 가족입니다. 셋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민족의 아버지로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도 자신의 뿌리를 아브라함으로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믿음의 조상으로 믿고 있습니다. 다른 점은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나 기독교은 메시아로 믿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거의 반절이 믿음으로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분이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여러 신앙의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면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가장 많은 분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는 한 구절로 그들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8부터 19절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11:27-25:18절까지 무려 14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다루는 로마서에서도 4장 한 장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신앙생활에서 믿음의 표본이 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 그가 어느 지역의 사람이나 본받을 수 있는 믿음의 원리들을 잘 보여 주는 믿음의 모본,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믿음을 설명할 때 믿으려면 아브라함처럼 믿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로 믿음의 생활을 하려면 어떤 목사처럼 믿으라. 장로로 믿으려면 어떤 장로처럼 믿으라. 권사로 믿음 생활하려면 어떤 권사처럼 믿으라”라고 할 정도로 믿음의 모범이 된 사람입니다. 당시 핍박과 유혹으로 믿음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믿으려면 아브라함처럼 믿으라고 샘플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믿음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믿고 살려면 아브라함처럼 믿으라고 믿음의 모델로 우리게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1. 떠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께 순종한 믿음입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작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순종으로 반응하면 믿음이 되고 불순종으로 반응하면 불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 반응은 순종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시점에 반응은 조건 없는 순종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4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종하여’ 로 번역된 ‘휘파쿠오’는 ‘~아래에서(under)’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포’와 ‘듣다(hear)’라는 의미의 동사 ‘아쿠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의 아래에서 듣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인도할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주권이나 자신의 주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길을 물어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 “내가 함께 갈게”라고 할 때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순종입니까? 인격적인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아갔다는 것입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가갔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명령을 좇아서 어디론가 가고 있지만 그곳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나침반이나 지도, 레비게이션이 없이 그저 하나님만 믿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게 하는 믿음을 주도적으로 누가 가지게 해 주십니까? 아브라함보다는 하나님이 은혜로 그렇게 그런 순종하고 나가고 나가게 하는 믿음을 가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탐구하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창세기에 자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갈대아 우르 사람입니다. 그가 어떤 가정에서 살았는지 그런데 여호수아 24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 아버지가 데라인데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셈의 후예였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한 사람입니다. 외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 장사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따랐겠지요. 지금도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연스럽게 불교인이 되고,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유교인이 되고, 이슬람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슬람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첫 번째 하나님의 부름은 갈대아 우르 메소보다미아에서 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행7:2-3)" 어디에서 말씀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의 고향 메소보다미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무엇에서 떠나라는 것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고향, 친척입니다. 여기에서는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때 상황이 창세기 11장 31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 데라가 주동이 되어 떠납니다. 어느 날 아들이 어떤 신이 나타나 떠나라고 했다고 말을 들을 때 그는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런 말에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는 과학이 중심이 시대가 아니라 종교가 중심인 시대이기 때문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아브라함, 나홀, 하란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란이 죽은 것입니다(창11:27,28). 그런데 아브라함은 결혼은 했는데 아들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길하게 생각했겠습니까? 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으면 별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11:30). 아주 심리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상황입니다. 아들만 낳으면 죽는 집에 와서 어떤 스님이 절에 나와야 이 집안에 아들이 생깁니다라고 하면 대부분 절에 나가 시주를 합니다. 과학이 발달된 지금도 어떤 도사가 청와대에 들어가 살면 급살맞는다고 하면 그 집에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연초에 토정비결을 볼 때 8월에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일부러 8월에 물에 들어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5복을 원합니다. 수로 장수하고 부로 부유하여 풍족하며, 강령으로 일생동안 건강하게 살고, 유호덕으로 덕 좋은 사람으로 살며, 고종명으로 평안히 일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는 "빛"혹은 "불"이라는 뜻입니다. 불을 숭상하고 빛을 숭배하는 지역입니다. 다 5복을 누리기 위해 섬기는 신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달과 별을 숭상하는 우상 종교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 이런 환경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아버지 데라에게 말했을 것이고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그 뜻을 잘 모르지만 아들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결국 누가 주체가 되어 떠나게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란에 왔습니다. 국경도시입니다. 거기서 데라는 머묾입니다. 강을 건너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가는 것입니다. 이민을 완전히 가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데라가 망설입니다. 그렇게 되자 아브라함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많은 이익이 있고 편리함과 기쁨이 있습니다. 하란은 '교차로'란 뜻입니다. 이 지역은 교통의 요충지로 번성했던 곳이고 상업과 문화가 발달한 지역으로 갈대아 우르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이 두 지역에 공통의 신이 있었는 데 그게 달신(月神)입니다. 이 달신의 아내 이름이 '사라이', '사래'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이름이 '사래'입니다. 이것은 달신의 아내의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우상 숭배 가문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아브람 가문은 우상 숭배 문화에 깊숙이 놓여 있었습니다. 200년 동안 젖은 문화에서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떠나지 못하니까 아브라함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로 결단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휴머니즘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고 지체하니까 하나님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서 아버지 데라를 데려가셨습니다. 데라는 '지연시키다', '지체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는데는 지연시키고 지체시키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끝까지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별이라는 슬픈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재촉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거두어감으로써 모든 의존을 의도적으로 끊으신 것입니다.

데라가 205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보십시오. 다시 반복하여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아버지를 언급합니다. 이제까지 의지했던 아버지가 죽었으니 하나님이 인도를 전적으로 믿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고향을 떠나고 아버지를 떠났지만 여전히 친척을 떠나지 못합니다. 아들이 없는 그는 조카 롯을 아들처럼 생각하고 떠나지 못합니다. 나이 75세였는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돌아가셨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중년기입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롯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13장 6절을 보십시오. 소유로 말미암아 서로 싸우게 됩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게 만드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창세기 22장에 보면 이삭을 바치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떠남의 절정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이삭을 바침으로 철저히 떠나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백성을 결국 철저히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시고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결국 떠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사람들도 유대교를 떠나지 못해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핍박이 오니까 다시 유대교로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익도 기쁨도 편리도 없다고 생각하면 다시 옛생활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합니다. 그래서 마지 못해 교회에 나와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교회에 나오면 좀더 유익한 이야기 좀더 편한 이야기, 좀더 기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데 한 달 두 달 나와도 매 주마다 성경 이야기, 구름잡는 이야기, 비현실적인 이야기, 시대에 공감이 안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얼마 나오다가 너무 교회는 비현실적이라고 교회 방학을 해 버립니다.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동화같이 들리고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해 보십시오. 얼마나 귀를 세우고 들으려고 합니까? 그것이 안 되니까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립니다. 사탄은 생명 구원사역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도 끝까지 우리를 붙들고 떠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떠나 버려야 합니다. 떠나지 않아도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 숭배가 부르심을 방해한다면 과감하게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아실현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데 방해가 된다면 단호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담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떠나 버려야 합니다. 도박이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절단하는 것입니다. 스마트 폰 중독이, 컴퓨터 게임 중독, 텔레비전 중독이, 스크린 중독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떠나 버려야 합니다. 과소비가, 낭비가, 게으름이, 술중독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미련두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그것 없으면 못살 것같지만 그것 없어도 하나님을 따르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를 떠나고 아비를 떠나고 친척을 떠난다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우물쭈물 하고, 주저 할 때 빨리 결단 내리고, 한발 앞서 가고, 용기 있게 일어서서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 형제에게 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바로 버려야 할 것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그 때 여주인이 하룻밤 같이 자자고 유혹합니다. 이 때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우물쭈물하지 않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엘리사를 보십시오. 밭을 갈며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와서 "나를 따르라" 고 합니다. 이 때 어떻게 합니까? 그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집으로 가서 쟁기를 부수고 소를 잡아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고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그리고 끝까지 따라 다닙니다. 롯의 부인을 보십시오. 떠나지 못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십시오. 떠나지 못합니다. 신앙의 역사는 떠남과 분리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악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의와 거룩을 좇는 순례의 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차피 떠날 것들이라면 과감하게 떠나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떠나지 않으면 죽이고 싸워서라도 떠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2.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새번역 성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9절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류하여 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에 갔지만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사갈 준비를 하면서 순례자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땅이 전부인 줄 알고 그 땅에 뿌리를 내려서 집착하거나 연연하며 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모형으로 영구히 거류하는 땅이 아니라 언제 이사갈지 모르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약속을 받은 자식과 손자와도 영구적인 궁궐이 아니라 언제 수시로 이사가는 텐트에 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식과 손자와 함께 나그네처럼 테트를 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 가나안 땅으로 순종하여 왔지만 그곳이 영구히 거할 때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치 이방 땅에 거하는 것처럼 약속의 땅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의 매장지 막벨라 굴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헷족속에게 자신을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고 소개했습니다. 자신의 말대로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에 따라 산 광야 백성처럼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아브라함은, 땅을 소유할 수 없는 이방 나그네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비굴하고 비참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헤브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창 23:6)라고 평가할 정도로 세상에 영향력을 주며 살았습니다. 본토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살았습니다. 나그네라고 아무렇게나 산 것이 아닙니다. 약속붙들고 충실하게 산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분명하게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은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 여기서 '보여 줄'은 미래 미완료형으로 아직까지는 보여지지 않으나 미래에는 구체적으로 보여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땅'은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 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미 작정해 놓은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땅을 약속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한 땅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입니까? 구체적인 하나님의 약속 세가지는 무엇입니까? 12장 2절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세 가지를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후손도 땅도 없는데 큰 민족을 이루는 씨앗이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유명케 하여 그 이름이 길이 회자(膾炙)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열국의 아비(17:4, 5), 선지자(20:7), 하나님의 방백(23:6), 여호와의 종(시 105:5, 6) 하나님의 벗(약 2:23)으로 살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시조(始祖)로서, 또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길이 남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영적 축복이 단지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 붙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창세기 12장 5절을 보십시오. 약속을 믿고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곳에 가서 제단을 쌓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칩니다. 거기서 영구히 삽니까?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그 땅에 기근이 듭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풍년이 들고, 자식들이 출세하고, 질병에서 즉각 치유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데 인생의 기근이 듭니다. 그것도 심한 기근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 애굽으로 이민을 갑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 버립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아내가 외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당시 왕이 얼마든지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아내라고 말하면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같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만 얼마나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배신을 합니까? 신문에 보니까 보험금을 타려고 남편을 물에 빠뜨려 죽인 여인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비슷한 인간입니다. 바로가 궁전으로 사래를 불러 들여 아내로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래가 낳은 아들이 아브라함의 씨인지 바로의 씨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날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립니다.

아브라함은 비겁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자기 살겠다고 아내 팔아먹는 진상입니다. 그것도 성경에 보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으로 훈련시켜 진정 나그네로 살게 만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 대하여 사도행전 7장 5절에서 스데반이 설교 할 때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너의 유업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살이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약속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부자로 살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 땅에 한 조각의 땅덩어리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장사지낼 때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사서 아내의 무덤을 만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땅에 대한 약속은 받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던 때에 그 약속이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이사실을 히브리서 11장 13-14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삶으로 나그네인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은 모두 나그네였습니다. 그것도 남의 땅에서 나그네가 아니라 ‘자기 땅에서 나그네’ 요 ‘자기 고향에서 외인들’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서 그들은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왜 자기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까? 그들이 ‘본향’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내 당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복이 다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초라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나그네로 살았다고 초라하게 살았습니까? 성경은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성경이 만든 부자들1.2(이채윤 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을 유산으로 남겨 준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미국의 기본을 세운 믿음의 사람 벤저민 프랭클린, 신실한 믿음으로 백화점 신화를 만든 사람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 후반전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믿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큰 부자가 된 데이비슨 록펠러, 믿음으로 성직자와 같은 비즈니스맨으로 산 존 템플턴 등 여러 사람들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분들 다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그네로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부의 복음을 실천한 사람 앤드류 카네기가 나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가 아버지는 책상 보자기를 파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공장에 나가서 16시간이나 일을 해야만 했답니다. 아들 카네기도 공장에서 일을 하고 들어오면 저녁까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어머니는 한 벌 밖에 없는 아들의 옷을 빨아서는 밤새도록 그것을 말려서 다음날에 입혀서 보내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 최고의 재벌 중의 하나가 되었고 또한 미국 최고의 사회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방직공장직공, 전신국 하급직원, 전신기사 등을 거치며 갖은 고생을 하였지만 그는 세계의 강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의 사회 환원"이 기업가의 궁극적 목표가 돼야 한다며 "카네기재단"을 설립하여, 정부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공공 복지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45억 달러를 드려 3천개의 도서관을 설립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했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하여 "부의 복음"과 "인간관계론"라는 책을 써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이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믿음은 신비하게도 세상을 이기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세상 이기네(357장)"

 

3.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믿음입니다.

자기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시는 터,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나그네로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결코 어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다 실행해 주었습니다.

첫 번째, 후손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으니까 롯을 붙들고 갑니다. 롯을 자식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롯이 떠난 후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창세기 13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띠끌같게 하니니" 누가 주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15장 2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종을 상속자로 생각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5장 4-5절을 읽어 보십시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믿음의 의의 증표로 무엇을 합니까? 언약을 하시는 것입니다. 삼년된 암소와 암염소, 수양을 가져다 반절을 쪼갭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렇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를 누가 지나갑니까?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만 지나가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형식은 쌍방 언약이지만 내용은 하나님 스스로 절대주권을 가지고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나이 85세가 되었습니다. 10년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 16장 2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하와의 말을 듣고 넘어진 것처럼 아브라함도 똑같이 사래의 말을 듣고 첩을 얻습니다. 이 후로 13년 동안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아브라함 99세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7장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영원한 언약을 이룰 이삭을 낳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내가"입니다. 약속하시고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땅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약속된 땅입니다. 창세기 12:1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는 땅에 대한 약속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이 약속 붙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7). 막연히 보이던 땅에 대한 약속이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에서 구체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롯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롯과 헤어져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의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창세기 15장에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4대 후에는 차지하라 것을 공식적인 언약으로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17장 19절에서는 그 유업의 영원함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 후 야곱의 후예들이 애굽에 건너갔다가 거대한 민족이 되어 애굽을 나와서,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그 땅에 정착하게 됨으로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신명기 30:19-20에 의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강 건너 가서 땅을 정복할 때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아 9:7,8에서도 같은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인간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명성","신망","우월"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 위해 창세기 6:1-4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설쳤고 창세기 11:4에서는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었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언약해 주었습니다.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의 근원,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2:16-18에서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축복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그의 가계(家系)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창3:15)인 메시야가 나오리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누구를 말씀할까요? 갈3:16절을 보십시오(신약 305쪽).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의 백성 많아지고 예수님을 통하여 복의 근원이 될 것을 말씀합니다.

갈3: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갈 3:8)"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부름받은 성도의 믿음을 통해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천국도 이렇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천국에 대한 약속, 부활에 대한 약속, 재림에 대한 약속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목동인 다윗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는 약속을 주시고 결국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살인하고 도망간 모세를 찾아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결국 그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 롯이라도 붙드는 상황입니까? 종이라도 붙드는 상황입니까? 첩이라도 붙드는 상황입니까? 앞이 안보입니까? 약속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시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시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하였습니다.(행7:5)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였습니다. 동일한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정착된 생활이 아니라 나그네 같은 세상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절망적 상태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참 평안과 행복을 누릴 줄 알았는데 예수 믿는 것 한 가지 이유로 집을 빼앗기고 때로는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가족이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때는 AD 60-7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기독교인을 무참하게 핍박할 때였습니다(10:32-36 12:4 60-70)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디도 장군에게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하고, 원형 경기장에 끌려 들어가 사자들의 밥이 되어야 하고,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땅굴에 들어가 숨어살아야 하고, 화형을 당하여 밤의 횃불이 되어야 할 때였습니다. 지금 이들을 향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아브라함 때나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과학 문명이 조금 발달했을 뿐이지 삶의 방식은 동일합니다. 믿음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우리 성도님들은

떠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4.24.
SNS 공유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