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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4) 에녹의 믿음(히브리서11:5-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96204 추천수:6 220.120.123.244
2022-03-27 12:49:18

믿음(4) 에녹의 믿음

히브리서11:5-6

 

오늘은 “믿음” 4번째로 “에녹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지난 주 “아벨의 믿음”을 통해 어떻게 예배 드려야 할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히브리서를 받던 1세기에는 참으로 예배 드리기 힘든 때였습니다.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자신의 지위와 명예, 재산,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내 놓아야 할 때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역사가 시작된 시기에 예배로 인하여 순교당한 아벨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우리 자신을 먼저 드리고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예배에 둠으로 후대의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 본을 보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창조 1세기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에녹의 믿음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1년과 유사한 365년 살았던 에녹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반복하여 강조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합하여 평생 하나님과 동행했고, 평범한 생활 속에 동행했으며, 죽음을 초월하여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입니다. 에녹은 죽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까? 믿음으로입니다.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1.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해도, 가정생활을 해도, 공부를 해도, 봉사를 해도, 믿음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엘리야 처럼 대단한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모세처럼 민족 지도자로서 민족을 해방시킨 지도자도 아닙니다. 아브라함 처럼 고향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바울 처럼 위대한 선교사가 된 것도 아닙니다. 다윗처럼 민족의 추앙을 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기초를 가르치다”, “연단하다”는 뜻과 집이나 성전을 “봉헌하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하나크”에서 유래한 말로 “봉헌된, 헌신된”이라는 의미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경건한 자손인 에녹의 아버지 야렛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자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아담의 7대 손으로 하나님께 드린 자로 살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므트는 심판, 죽음을 의미하며, 살라트는 보낸다라는 뜻입니다. 므두셀라 라는 이름의 뜻은 므두셀라를 보내면 이 세상에 심판이 있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무두셀라가 죽으면 세상도 끝난다다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로 기록인 969년을 산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세상이 끝이 있다고 믿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삶을 산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에녹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창세기 5장 21절 이하를 보시기 바랍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비전을 맞추고 보폭을 맞추며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에녹 당시 사람들을 보십시오. 창4:16절 이하는 보십시오. 대단한 업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에녹성을 쌓았고(창4:16), 야발은(20절) 큰 장막을 치고 많은 육축을 기르는 목축가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21절) 수금을 치고 퉁소를 부는 예술가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22절)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도 아닙니다. 돈과 권력과 쾌락과 동행하는 삶이었고 자신들을 기쁘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고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자병 고주병에 걸려 있는 시대입니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사랑과 섬김의 대상을 상실한 시대입니다. 자신과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사는 시대입니다.

동물이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은 태고 때와 지금은 인간이 엄청나게 달라졌다고 하나 태고 때나 이 성경이 기록될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비슷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업적을 통하여 자기 기쁨을 추구하는 시대에 에녹은 뛰어난 업적이나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오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아들이 죽으면 세상이 끝이 온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1세기 성도들에게 바로 에녹의 믿음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교훈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1세기 당시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앙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본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2장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신앙의 초년 시절에는 큰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표적과 기사, 여러 가지 능력, 성령 충만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0장 32-34절을 보십시오. 고난을 참았습니다. 비방과 환란으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모욕과 박해, 심지어는 재산을 몰수 당했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투옥된 신앙인들과 함께 입장을 같이했습니다(히10:32,34). 고난을 잘 견뎌냈을 뿐 아니라 자신들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동정하였고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섬김으로써 형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였던 자들입니다(6:9-10).

그러나 계속적으로 유대인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의 핍박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당한 심문(행 3-4장), 사도들이 당한 투옥 및 심문(행 5:17-41), 스데반의 순교(행 7장, 사울이 행한 핍박(행 8:3; 9:1-2), 바울의 선교 여행 중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수난(행13:45-50; 14:2, 19-22; 17:5-14; 21:30-36; 22:12-30) 등을 보면 현실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장기화된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로마의 박해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아마 이 때는 히12:4절에 “너희가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다”라는 말씀을 볼 때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박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두려움(히10:32-34)이 생겼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미련(4:14-10:39; 13:9,10)이 생겼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하고 유대교와의 타협 혹은 유대교에로의 복귀 유혹을 가장 심각하게 받았을 대상은 당연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예수 믿는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출세하는 것도 아니니까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점차 지쳐 있었습니다(히2:1-2). 거대한 힘 앞에서 조그마한 가정교회에서 모여(히13:24)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그저 물결치는 대로 시류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것처럼 느꼈습니다(히2:1). 그들 중에는 신앙을 소홀히 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히2:2).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복음에 대한 헌신이 약화되어 가는 위험에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히2:1-4). 믿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가는 사람도 생겼습니다(히3:12,13; 4:1,11; 6:11; 12:15).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강퍅케 된 사람도 생겼습니다(히3:13). 마음이 믿음에 무감각해져 버린 것입니다. 불신으로 향한 유혹을 느꼈고(히3:12-14), 죄의 기만이 그들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기 시작했습니다(히3:13-16). 그들은 영적으로 자라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히5:11-14). 어린 아이와 같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성경공부하는 것도, 구역모임하는 것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기도회 하는 것도 훈련받은 것도 관심이 없습니다. 점차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히10:25). 어떤 이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히6:4-6, 10:26-31, 12:15-17). 신앙생활을 피곤하게 여기며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아벨의 믿음을 통해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권면하고 이제는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믿음을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녹처럼 유명한 발명가가 못되어도, 뛰어난 예술가가 못되어도,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가 못되어도, 위대한 건축가가 못되어도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롬14:23절에서는 바울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일하고 믿음으로 예배드리고 믿음으로 봉사하고 믿음으로 직장 생활하고 믿음으로 공부하고 믿음으로 대학을 선택하고 믿음으로 자식 기르고 믿음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2.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받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떤 불이익과 핍박과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시대였습니다.

에녹은 아벨이 죽은 후 아담의 아들 셋의 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녹이 아담의 7대 손입니다. 인류 초기 역사입니다. 생생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십시오. 문자적인 연대로 계산한다면 아담과 한 시대에 산 사람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930년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입니다. 4장 23절을 보십시오. 힘센자가 여인을 차지합니다. 악한 자가 득세합니다.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잔인합니다. 교만합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얼마나 타락해 있습니까? 이런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신이 아닙니다. 칸트가 말한 요청 신도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 정신위생에 도움을 받기 위해 믿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평범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루터 종교 개혁을 할 때 이제 최후 변론을 하기 위하여 웜스 공회에 나가야만 했습니다. 이 변론에서 정죄되면 그는 화형을 당하던지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고민하며 고통가운데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루터에게는 참으로 신앙이 좋은 아내가 있었습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입니다. 욥의 부인처럼 남편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반대하고 성숙한 신앙생활에 헌신하지 못하도록 발목잡는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부인은 참으로 신앙이 좋은 분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하게 믿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녀는 시토수도회의 수녀였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가의 주장에 공감하고 11명의 수녀와 함께 수도원을 떠나 1525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신부인 루터와 결혼하여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불길을 지핀 사람입니다. 루터가 두려워 떨고 있자 그녀는 상복을 입고 울기 시작했답니다. 루터는 왜 우냐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돌아 가셔셔 웁니다." "왜 이런 망령된 소리를 하느냐"고 루터는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그때 그 부인은 "왜 하나님이 돌아가지지 않았는데 당신은 그렇게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있는냐"고 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루터는 웜스 공회의 모든 기와 장이 다 마귀일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나아간다하며 소리치고 나가 승리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십니다. 침묵하는 것과 같이 보이니까 니체처럼 돌아가신 하나님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모세의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은 지금도 기적을 일으켜 주시고 엘리야를 통하여 살아계신 모습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신앙인의 마음 속에 삶 속에서 살아 계심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 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쁜 늘 충만하네)

 

둘째, 우리는 심판하시고 상급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녹은 심판하는 하나님과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에녹은 심판하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는 근거는 유다서 1장 14-15절을 보면 자세히 알 수가 있습니다. 번거롭더라도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를 행하여 심판을 예고합니다. 주님이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뭇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믿음없이 행하는 악한 일 가만히 놓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거슬린 완악한 말로 인해 정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치면서 300년을 산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예고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에녹이 65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무드셀라로 지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해 놓고 있는데 여기에서 에녹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놀라는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녹이 므드셀라를 낳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이 므두셀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에서 그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므트는 심판, 죽음을 의미하며, 살라트는 보낸다라는 뜻입니다. 므두셀라 라는 이름의 뜻은 므두셀라를 보내면 이 세상에 심판이 있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무두셀라가 죽으면 세상도 끝난다다는 말입니다. 매일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언젠가는 종말이 온다는 것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았으며 사람들에게 종말을 예고했을 것입니다. 에녹은 심판을 선언합니다. 언제가는 멸망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을 수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데 멸망이 온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에녹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5장 25절에서 에녹의 아들 무드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고 28절에 보면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무두셀라의 손자입니다. 계산해 보면 노아가 태어날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가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7장 11절에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때 므두셀라의 나이가 몇 살이 됩니까? 바로 969세가 됩니다. 무두셀라는 969살에 죽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므두셀라가 죽을 때 홍수는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은 이루어졌습니다. 개인 종말도 역사의 종말도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언젠가는 성경의 약속대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 땅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건강, 지식, 명예, 물질 영원히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다 놓고 갈 날이 있고 모든 것이 끝나 버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 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살 때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 수 있습니다. 동행하려면 목적지가 같아야 하고 보폭이 맞아야 합니다. 삶의 방법이 같아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뜻에 맞추는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에녹은 제멋대로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에 맞추어 산 것입니다.

오늘날도 인본주의가 팽배합니다. 하나님은 없이 인간끼리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간끼리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끼리 잘 살 수 없습니다. 코로나 19를 보십시오. 인간끼리 잘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향락 주의가 판을 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것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이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가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좋은 세상에 무슨 심판이 오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노아의 홍수로 경고했듯이 코로나 19같은 것을 통해, 자연재해를 통해, 기후 변화를 통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심판하시는 하나님만 믿은 것이 아니니다. 상 주시는 하나님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믿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에 비해 에녹은 365살로 그리 오래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간 제 일호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있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가라지로 살다가 지옥불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영벌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상급이 분명히 있습니다. 전도자에게는 기쁨의 면류관(살전 12:19), 선한 싸움을 싸운 자에겐 의의 면류관(딤후 4:8),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한 자에겐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고난받고 순교한 자에겐 생명의 면류관(계 2:10),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를 부정한 자에겐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 땅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 보다 더 좋은 세상이 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질병도, 고통도, 증오도, 슬픔도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갓 미물에 불과한 애벌레들도 어느 날 나비가 되어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봅니다. 나뭇잎을 먹고 살던 것입니다. 나비가 되면 이제 삶의 질이 바뀌어 집니다. 꿀을 먹고 삽니다. 땅을 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우리 인생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이 땅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영국의 크리스챤 문필가인 C.S 루이스는 “역사를 읽어보면 현세를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이들은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한 이들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한 후배가 와서 “목사님의 일생에 있어서 마음을 움직이게 한 삶의 동기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답니다. 그때 목사님은 “나는 심판대 앞에 서야 할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일생동안 살았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학자 나인홀더 니버 박사는 말하기를 현대인들이 심각하게 부도덕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심판대 아래 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밀물의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아니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우리는 상급 주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에녹처럼 평생 살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사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째,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300년 동안 동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홀로 사는 삶이 편합니까? 둘이 사는 사람이 편합니까? 동행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동행하려면 같은 목적지를 행해 가야 합니다. 상대와 보폭을 맞추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앞길을 예배하시고 적들을 물리쳐 주신 하나님이 에녹시대에서도 타락한 문화 속에서 에녹이 끝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심판하시고 상급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글들을 다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그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걸어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인생에서는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나면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주님께서 왜 저를 버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버리지 않는다. 네 시련과 고난의 시절에 한 쌍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내가 너를 업고 간 때이기 때문이니라.’”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 말로 얼마나 축복된 인생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인생 여정 동안 함께 하시니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고 진정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니까 사람들이 새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런데 만군의 하나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과 매일 매일 함께 걷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에녹은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동행하는 행복 속에 살았습니다. 우리도 하루일과를 시작하면서 주님과 함께 출근하고, 그분 모시고 사업하고, 주님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쁩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이런 복은 자동적으로 주어집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옛날 선지 에녹같이 주만 따라 가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둘째, 죽은 후에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는 말은 에녹이 땅에서 살아 있는 채로 하늘로 이사하였다는 말입니다. 옮기웠으니는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는 말입니다. 이주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이 땅에서부터 천국으로 데려가신 사실을 말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통과해야 할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천국에 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이 둘 나옵니다. 에녹과 엘리야(왕하2:11)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는 자도 둘이 나옵니다. 에녹(창5:24)과 노아(창6:9)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결국 승천한 사람은 에녹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죽음의 고통을 겪지 않고 천국에 갈 것을 소망할 것입니다. 에녹과 엘리야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런 복을 누리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재림할 때 성도들은 다 그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면 홀연히 변화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5:51)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육체의 변화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상급주실 하나님을 믿으면 죽음 이후에 펼쳐질 영광스런 세상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대를 가지고 소망 가운데 죽음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닐었습니다. 해변에서 모래성도 만들고, 고기도 잡고, 조개도 줍고, 달리기도 하고 재미있게 돌았습니다. 그러다 손자가 지쳐 마루에 잠을 잤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들어 침대에 눕게 했습니다. 일어나 보니 손자는 포근한 침대에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사람들을 영원한 천국에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경쟁도, 질병도, 노년에 달고 다니는 통증도, 근심도 걱정도 없은 영원한 곳에서 눈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다 보면 이런 축복은 자동적으로 주어집니다.

 

셋째,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에녹은 죽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아들에게, 딸에게, 부모에게, 동료에게 인정받는 것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어떻게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치인들을 선거철이 되면 국민에게 인정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어떻게 하면 국민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국민을 기쁘게 하면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주심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민족을 해방시키고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 모세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 40년 동안 통치한 다윗만 인정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에녹처럼 특별한 업적이 없어도 그저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300년 산 에녹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우리 하나님은 상을 잃지 않은 것이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다섯 달라트 남진 자만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 달란트 남긴 자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3)” 원치 않게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아 눈문로 힘겹게 양육하는 부모에게 우리 하나님은 언젠가 그 눈물을 닦하주며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인정해 주실 때가 옵니다.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상주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을 우리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를 기쁘게 한 자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코로나 19시대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다 할 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상급 주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기대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주일 마다 가정에서,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을 우리 하나님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고난과 유혹이 있을 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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