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3) 끝까지 형통하는 길
역대하31:20-21
우리는 새해 첫 예배를 “형통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첫주부터 “형통”이라는 주제로 시리즈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첫 주일에 여호수아에게 형통하고 형통케 해주시겠다는 말씀을 통해 “형통을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형통을 누리려면 첫째 형통을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둘째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셋째 그 약속대로 현장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주일에는 “예고된 고난 가운데서도 형통하는 길”에 대하여 바울의 삶을 통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형통한 삶을 살려면 첫째 예측된 고난 앞에 무릎꿇지 말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둘째, 고난이라는 장애물보다 사명에 집중하고 셋째, 내 뜻이나 네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끝까지 형통한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신앙인에게 형통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올 한해, 길게는 우리 인생 전체를 통해 사업에서, 직장에서, 학업에서, 신앙생활에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모든 일에 시작부터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21절을 같이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 밑줄을 그어 보시기 바랍니다.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시작하는 모든 일에서’입니다. “그”는 유다 13대 왕 히스기야 왕을 말합니다. “행하는”이라는 말은 “하랄”를 번역한 말로 “시작하다(begin)”는 말입니다. 20절의 “행하되, 행하였으니” 21절의 “한 마음으로 행하여”는 히브리어 “아싸”를 번역한 말로 다른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모든 일을 시작할 때마다 어떻게 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찾다'는 말은 "다라쉬"의 번역으로 영어로는 "to seek"하는 것입니다. '구하다', '묻다', '요구하다', '밟다', 혹은 '자주 가다' , ‘예배하다’라는 말로 번역이 됩니다. 히스기야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권력을 찾고, 돈을 찾고, 이방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는 사람 중에는 용한 무당을 찾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사서 웃는 돼지머리를 사서 고사를 지내고 절하며 시작하기도 합니다. 집을 짓고 입주하기 전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거주하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학진학을 위해 취업을 위해 결혼을 위해 먼저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고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모든 일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자기 단독적으로 일을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일을 수행했다는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왕입니다.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전문가 의견보다 먼저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 사업을 하기 전에, 개업하기 전에, 이사하기 전에, 결혼식 하기 전에, 집을 이사하기 전에, 유학 가기 전에, 군대 가기 전에, 공부를 하기 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잠을 자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상의 하며 시작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는 왕으로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고 사업들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하나님을 구하면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히스기야는 일평생 형통한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늘 함께 하여서 인생 마지막까지 평생 하나님이 뜻을 이루는 형통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형통의 이유를 열왕기하 18장 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여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 유다 10대 왕 웃시야가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대하26: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 왕직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역대하 29장 1절을 찾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오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25살에 왕이 되었을 때 무엇부터 합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성전문을 열고 성전 예배를 회복시켰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왕이 되자 마자 그들을 모아 놓고 술잔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고 성전 예배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 아버지가 통치하던 나라가 형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조상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 7절을 보십십시오.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하시고 내버리사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라” 진노하시고, 내버리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칼에 엎드러지며 자녀와 아내가 사로잡혀갔다는 것입니다. 자식도 형통하지 못하고, 가족도 형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을 때 어떻게 시작했는가 보십시오.
28장 1절을 보세요. 20살에 왕이 되어 16년을 왕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왕이 되어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것을 본받아 자녀들을 불사르고 고사드립니다. 그래야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5절 보십시오. 아람 왕에게 망하고 이스라엘 왕에게 패배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아 앗수르에게 어려움을 당한데도 정신을 못차립니다. 이러면 정신을 차리고 여호와를 찾아야 하는데 22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합니까? 곤곤할 때 더욱 범죄합니다. 23절을 보세요. 오히려 이방신을 섬깁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성물을 부수어 버리고 성전 문을 닫아 버립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36살의 젊은 나이로 죽습니다. 죽어서 왕실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하나님의 전 문을 열고 수리한 것입니다. 29장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전을 성결하게 합니다.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29장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배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30장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들에게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 하나님께 예배로 나올 때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올 한 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아니 평생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모든 일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고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2.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마지막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히스기야 왕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에 밑줄을 그으시기를 바랍니다. “보시기에”에는 “리프네”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얼굴을 향하여”라는 의미로 “앞에서(before)”라는 의미입니다. 29장부터 히스기야의 개혁에 대하여 전반적인 평가를 하면서 한 마디로 그의 삶은 “여호와 앞에서” 행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형통하지 못한 왕들은 한결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들입니다. 히스기야 아버지 아하스 왕에 대하여 한 마디로 어떻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까? 28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아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형통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왕들이 들어가는 왕들의 묘실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대하28:27). 지금 말하면 대통령으로 살다 죽었는데 국립묘지에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할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평가는 무엇입니까?
할아버지는 11대 요담 왕으로 25세에 왕이 되어 16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무엇입니까? 대하 27장 2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요담이 그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조건이 붙은 삶입니다. “목사는 목사였으나 신앙은 평신도 만도 못하였다. 장로는 장로였으나 본받을 만한 장로는 아니었다. 사장은 사장 이었으나 인간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공부는 잘 하였으나 인정은 바닦이었다. 남편은 남편이나 다시 태어나면 결혼하고 싶지 않다. 아내는 아내였으나 마지 못해 사는 아내였다” 등과 같이 그 사람의 일생을 볼 때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인가 부족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인지행동치료에서 핵심 신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과 세상 그리고 미래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견해입니다. 대개 특정 상황에서 도출되는 자동적 사고는 바로 이런 핵심 신념을 통해 만들어 집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는 무력하다는 핵심 신념(무력감 나는 궁지에 몰렸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핵심 신념(무존재감,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가치하다라는 핵심 신념(무가치감, 나는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라는 핵심 신념이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철이 되어 앞으로 투표를 할 것입니다. 무엇에 따라 투표합니까? 대부분 핵심 신념에 따라 자동적으로 투표할 것입니다.
비슷한 개념으로 핵심 감정이 있습니다. 마음 속 깊이 가지고 있는 반사적이 감정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 사람만 보면 기분이 나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경험한 좋지 않은 느낌은 풀리지 않으면 세월이 갈수록 커지고 단단해집니다. 이처럼 어려서 형성되어 평생 영향을 미치는 감정을 '핵심감정'이라고 합니다. 깨달아 풀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핵심 신념은 대부분 어릴 때 생깁니다. 부모님의 양육 형태, 성장과정, 외상(트라우마) 등으로 생겨 어떤 사건과 정보를 처리할 때마다 자동적 사고로 반응하게 됩니다. 핵심 신념이 잘 못되면 자아관은 아주 부정적입니다.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야, 나는 열등해, 난 머리가 나빠, 나는 사랑받을 수 없어 뭐 내가 늘 그렇지 등과 같이 무력감, 무존재감, 무가치감에 빠져 버립니다. 세상관은 세상은 위험해, 사악해 믿을 수 없어, 나쁜 사람만 우글거려 등과 같이 부정적이 됩니다. 미래관은 그래서 희망이 없어, 우울해, 나아질리 없어, 어쩔 수 없어 등과 같이 비관적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살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살았지만 아버지의 핵심 신념을 자기 신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라는 핵심 신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고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늘 의식하고 살았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그가 체험하고 그가 경험하고 그가 인도받고 그가 잘못할 때 징계하시고, 그의 삶을 인도한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만나고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개인적으로 동행한 히스기야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믿는 하나님이 아니라 체험적 신앙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체험을 하고 변화체험을 하고 소명체험을 한 것처럼 실제적인 체험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핵신 신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히스기야도 전쟁에서 실제적인 체험을 합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처들와 왔을 때 기적적으로 승리를 합니다.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떤 핵심 신념으로 살았다는 말입니까?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선(토브)”은 불순종하지 않은 의로움을 말합니다. “정의(야샤르)” 올바름, 정직을 말합니다. “진실함(에메트)”은 거짓이 없고 참됨을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윤리적 사회적 선이나 정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충성했다는 말입니다. 인간 보기에 그렇게 행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 붙들고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할아버지처럼 백성을 하나님을 떠나게 하지 않고 온 유다에 이같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죄를 멀리하였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종교 개혁을 수행하고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길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그가 어떻게 선과 정의와 진실로 개혁을 단행하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시대 때 나라를 형통하지 못하게 했던 적폐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31장 1절을 보십시오. 모든 우상을 타파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분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31장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왕의 재산 중에서 얼마를 정하여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 곧 아침과 저녁의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의 번제에 쓰게 하고” 왕 스스로 하나님 앞에 헌물을 드립니다. 물질은 핵심 신념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질은 신앙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물질을 섬길까 하나님을 섬길까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질을 섬기는 삶을 살다가 앗수르에게 망하고 바벨론에게 망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형통의 삶의 비결인 것을 알았습니다. 백성들이 마지마까지 형통한 삶을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물질을 드리는 삶을 산 히스기야가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1장 4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에게 명령을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십일조를 회복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만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 경제적인 풍요로 형통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경제생활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평생 형통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신 6:18)”
연세 드신 성도님들은 실제로 뒤를 돌아보며 생각해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는 것이 행복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형통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이 형통이었습니까?
영혼의 문제 뿐 아니라 경제 생활도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형통이고 행복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경제학과의 조너선 그루버가 조사를 해보았답니다. "예배 출석률이 2배가 되면 가계소득이 9.1% 증가하거나 복지지원금 수혜가 16% 감소하고 이혼확률이 4% 줄어든다"고 밝혔습니다. 예배 참석 빈도가 높을수록 학력과 소득도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영혼만 살찌는 것이 아니라 지갑도 두둑해진다는 것입니다. 맨소래담의 창업자 미국의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라는 분이 계십니다. 서점을 경영하여 거부가 되었는데 1887년에 밀어닥친 경제공황으로 빚만 10만 달러를 지고 사업은 다 살아져 버렸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때 오히려 가족의 보금자리인 집을 팔아 이미 YMCA에 기부하기로 약속했던 기부금을 내고 십일조를 하였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제 정신이 아니다고 했답니다. "헌금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었을 때나 하고, 먼저 빚부터 갚아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지당하고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드의 생각은 달랐답니다. 그는 다시 시작할 때 사람의 빚보다 하나님께 빚진 것을 더 두려워했답니다. 그는 결국 3년 후 맨소래담 회사를 창립하고, 이전에 받았던 축복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받아 수입의 구(9/10)를 하나님께 바치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주님 앞서 평가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태복음 25:23)”라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최선을 다하여 행하여야 합니다. /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21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여기에서 “한 마음으로 행하여”에 밑줄을 그어보시기 바랍니다. ‘빼콜 레바보’는 문자적으로 “그의 온 마음으로”라는 의미입니다. 히스기야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하나님의 전에서 수종드는 일이든지, 율법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는 일이든지, 무슨 일을 막론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100% 발휘하면서 애써 여호와의 뜻을 이루었으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어떻게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를 보십시오. 적당히 종교개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31장 1절을 보십시오. 온 땅에 있는 우상들을 다 제거해 버립니다.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자손들이 동참을 합니다. 왕이 된지 14년이 되었습니다. 32장 1절을 보십시오. 당시 가장 강력한 나라 앗수르 왕 산헤립(센나케리브)이 처들어 왔습니다. 18만 5천명의 군인을 이끌고 왔습니다. 이미 북쪽 이스라엘은 이들에 의해 망했습니다.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앗수르 군대가 물을 먹지 못하도록 물 근원을 막아 버립니다. 5절을 보십시오. 무너진 모든 성벽을 보수합니다. 무기와 방패를 많이 만듭니다. 군인들을 위로하며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7-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
산헤립이 이런 히스기야의 행동을 조롱합니다. 왕이 너희를 주림과 목마름 죽음에서 건져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11). 예배드렸지만 그것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이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예배드리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입니다(12) 요즈음 말로 하면 코로나 위기에 무슨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꾀임을 받지 말라 그를 믿지도 말라 어떤 백성이나 어떤 나라의 신도 능히 자기의 백성을 나의 손과 나의 조상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였나니 하물며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겠느냐 하였더라”
16절을 보십시오. 산헤립의 신하들도 더욱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비방합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포기합니까? 32장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백성들과 함께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백성들은 많이 두려워하며 히스기야를 불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46개의 성은 점령되었습니다. 예루살렘만 남았습니다.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이 때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 선지자와 더불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납작 엎드려 회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사 37:6~7) 그 밤에 랍사게와 앗수르 정예부대를 여호와의 사자가 쳐 죽였습니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쥐가 옮긴 전염병 페스트로 한꺼번에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22-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더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통을 평생 누리기를 원하시는 우리 성도님들도 위기를 당할 때 이런 형통의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이 막히고 뒤로 막혔다고 모든 것이 막힌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늘 열려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백성이 범죄하고 잘 못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합니까? 30장 20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아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찾아가 기도합니다. 얼굴을 벽을 향하여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히스기야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32장 25절 26절을 기록해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질병이 치료받았는데 그 때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에서 치료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들을 통해 예물을 보내주었습니다. 세계 정복의 야망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앗수르의 18만 5천을 하룻밤 사이에 이긴 히스기야가 불치병에서도 치료받았다고 하니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정탐하러 온 것입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궁중의 보물과 무기고를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보물과 자신의 무기를 자랑한 것입니다.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신의 소유에 있다는 것을 자랑한 것을 오늘 성경은 교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히스기야는 회개하였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통을 누리려면 겸손도 끝까지 가져야 합니다. 잘 되었다고 건강하다고 부자가 되었다고 승진했다고 기적을 체험받았다고 아무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겸손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히스기야의 약한 고리는 겸손이었습니다. 쇠사슬의 강도는 가장 약한 고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질병도 약한 고리를 노립니다. 코로나19를 보십시오. 모두가 안전할 때까진 아무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끝까지 형통하려면, 강해질려면 , 건강하려면, 성공하려면 가장 약한 고리를 보강해야 합니다. 요즈음 대선 후보들을 보십시오. 약한 고리가 그들을 얼마나 많이 괴롭히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9:12)”라고 말씀합니다. 잘 될 때 사단이 더욱 노립니다. 형통할수록 겸손하여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니라(잠16:18)”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하며 교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단4:30,31)” 교만하면 끝까지 형통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약한 고리를 타고 들어와 인생을 불통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최소치의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식물에 있어 ‘최소율 결정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화초는 영양분과 물, 위치, 화분의 크기가 잘 갖추어져야 잘 성장합니다. 이 중 한 가지만 부족하면 화초는 성장을 멈추거나 죽습니다. 나무로 만든 물통은 절대로 긴 막개기 만큼 채워지지 않습니다. 낮은 막대기 만큼 채워지는 것입니다. 약한 부분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합니다. 성실이 없는 사람은 성실성을 끌어 올려야 하고, 열정이 없는 사람은 열정을, 지혜가 없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을, 부지런함이 없는 사람은 부지런함으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영적 전투를 하는데도, 기도하는데도, 사업하는데도, 겸손히 사는데도, 공부하는데도, 신앙 생활하는데도 최선을 다하여 최소치를 끌어 놀려야 합니다.
우리는 올 한해 마지막까지 아니 인생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형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모든 일에 시작부터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 하나님과 함께
2.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마지막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3.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형통한 삶을 살려면 최선을 다하여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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