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2) 예측된 고난 가운데서도 형통하는 길
사도행전21:12-14
2022년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새해 첫 예배를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옵소서”라는 시편 기자의 말씀을 통해 “새해 형통하게 하옵소서(시118:25)” 말씀으로 첫 예배를 드리고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말 ‘형통’이라는 말의 뜻은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 되어감”입니다. 누구의 뜻입니까? 자신의 뜻입니다. 기준이 자신입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잘 되어지는 것이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남이 잘 되고 자신의 잘 못되면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히브리어 ‘찰라흐’를 번역한 말인데 성경에 형통이라는 말을 개혁개정 성경에 찾아보면 67번이 나옵니다. 공동번역이나 현대인 번역은 형통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시편 118:25절도 공동번역은 “승리를 주소서”, 현대인 번역은 “성공을 주소서”라고 번역했습니다. 원어 성경을 찾아 보면 64번 사용되어 있습니다. 신약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고 구약에만 나옵니다. 이 말은 “형통하다, 앞으로 나가다, 번성하다. 발전하다, 유익하다, 성공하다, 전진하다” 등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올 한 해 우리 열린교회 성도님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번성하고, 발전하고, 유익하고, 성공하는 형통의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지난주에 우리 하나님은 형통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호수아 1장 7-8절을 통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행해 출발하는 여호수아에게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네가 형통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올 한 해 출발하는 우리에게도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고 형통하리라”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수험생들에게는 어느 학교에 들어가든지 형통하고 형통하리라고 약속해 주고 있고, 취업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직장에 들어가든지 형통하고 형통하리라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입대하는 자에게도, 사업을 하는 자에도, 결혼을 원하는 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출발부터 나는 망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 말씀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형통의 축복을 홀 한해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첫째가 형통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살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면 가나안의 형통의 축복을 우리는 것처럼 올 한 우리도 형통의 축복을 풍성히 누릴 줄 믿습니다. 오늘은 형통 두 번째로 “예측된 고난 가운데서도 형통하는 길”입니다. 우리 앞에는 형통한 삶을 사는데 방해하는 무수한 장애물이 있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려면 골짜기도 통과해야 합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으려면 분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학생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려면 잠 못 이루는 고통을 참고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합니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사업가가 사업에 성공하려면 수많은 난관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과학문명이 아주 발달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오늘의 시대는 초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통한 길을 가고자 할 때 앞길에 장애물과 고통, 고난 등이 예측될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다하여도 온 한 해 끝까지 형통한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예측되는 고난 가운데서도 형통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예측된 고난 앞에서 형통한 길을 가려면 예측 앞에 무릎 꿇지 말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5).
오늘 성경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다섯 번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입니다. 이방인들이 모아준 구제헌금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의 앞길에는 핍박과 결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바울은 이때 잡혀서 5년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 바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0장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자신이 결박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측 앞에서 무릎 꿇고 두려워하며 포기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쉬운 예로 들면 이런 것입니다. 지난주 태장로님이 손녀를 보았는데 며느리가 아이를 낳기 위해 산부인과를 가는데 누구가 와서 아이를 낳으면 죽을 고생을 하여야 하니까 병원에 가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를 낳는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은 뻔히 예측된 고난입니다. 예측된 고난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예측 앞에서 무릎 꿇고 예측된 고난에 노예가 되어 두려움과 공포로 병원에 가는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것은 진정 어머니의 형통한 길이 아닙니다. 예측된 고통이 있으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며 병원에 가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 두로에 갔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가지 말라고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예측하는 것은 데이터 즉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사용하는 지능 즉 예측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갯벌 촬영할 때 갯벌에서 일하시면서 바지락을 잡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갯벌에 발이 들어가지 않고 쉽게 가는데 연예이들은 갯벌에 발이 빠져 어쩔 줄을 모르는 광경을 볼 것입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납니까? 예측 능력의 차이입니다. 갯벌에서 평생 바지락을 잡고 사는 사람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발을 디딜 때 발을 빼는 시간을 예측하고 걷기 때문입니다. 예측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형통한 삶, 일이 잘되고, 성공하고 삶을 전진시키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예측이 탁월한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초(超)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미래 예측력은 개인이나 조직, 기업이나 국가 모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기업경쟁력의 핵심은 미래 예측력이라고 합니다. 미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보는 눈 미래 예측 능력이라고 합니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기업의 경쟁력은 미래에 대한 예측과 준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측 능력이 뛰어나면 선점하고 이를 위해 전략을 수립하여 경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세계 시계 시장의 90% 가까이 지배했던 스위스가 디지털 시대를 예측하지 못하여 지금은 시장 점유율 8%로 추락하였습니다. 231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리태니커는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백과사전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나 정보화 시대를 예측하지 못하여 시장에서 밀려났습니다. 131년 전통을 자랑하며 '필름 왕국'을 만들었던 코닥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여 몰락하였습니다. 예측 능력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면 큰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예측 능력은 누구에게 온 것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누가는 “성령의 감동”으로 온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의 예측은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합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뻔히 확실하게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때 예측된 고난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통을 위해 무엇을 합니까? 고난의 예측 앞에 가던 길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형통의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우리는 바울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그리고 행20:4에 동행자로 나온 부로의 아들 소바더,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아리스다고 등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동조하지 않고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측되는 고난의 노예가 되지 영적인 방법입니다. 예측되는 고난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불안과 두려움으로 좋은 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공도, 성취고, 발전도, 성장도, 형통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이 예측됩니다. 그러면 예측되는 고통의 노예가 되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것입니다. 질병이 걸려 수술을 받으러고 합니다. 그러면 예측되는 고통 때문에 수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술을 받고 건강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면서 코로나19로 자금과 판매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측이 됩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면접관 앞에서 고통스런 질문을 받을 것을 예측합니다. 그러면 무조건 두려워하며 포기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측보다 더 위대하고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성령님께서 미래의 고통을 알려준 것은 두려워하며 포기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기도하며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홀로 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힘으로 그 일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를 지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 앞에 처절한 십자가의 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엄청난 고통, 모멸감, 수치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길을 가지 말 것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때 어떻게 합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땀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전심전력하여 밤새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다 시험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형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해야할 일 앞에서, 이루어야 할 목표 앞에서, 성취해야 할 사명 앞에서 고난이 예측된다고 예측된 고난의 노예가 되어 해야할 일을 두려워하며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예측된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불안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상황이 안 좋으면 안 좋을수록 더욱 예수님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업이 잘 안 되면 안 될수록 더욱 강력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웃시야 왕이 나오는데 “저(웃시야)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역대하 26: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기도할 때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무엇을 합니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솔로몬 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기에 앞서 무엇을 합니까? 1천 번제를 드리며 기도합니다. 에스더가 민족의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무엇을 합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예측되는 고통이 있습니까? 예측되는 고난을 보며 예측되는 고난의 노예가 되어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먼저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2. 고난이 예측될 때 형통한 길을 가려면 앞 길을 막는 장애물에 집중하지 말고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13).
기도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가이사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8). 빌립 집사님의 집에 여러 날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왔습니다(10), 그가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1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두로에서 제자들은 바울에게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언가 아가보는 아주 구체적으로 성령에 감동되어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와서는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발을 잡아매고는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신처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결박되어 감옥에 가는 고난이 예측되니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가올 고난이라는 장애물이 확 마음에 다가옵니다. 아가보가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11장 28절을 보면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근을 예언했는데 그대로 기근이 들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예언이 얼마나 권위가 있겠습니까? 미래 예측의 전문가 중의 전문가입니다. 그러니 바울과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했겠습니까?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아가보의 말에 동조하며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자고 말합니다. 전문가의 말이 확 장애물로 다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지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측근들이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에코 챔버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존 신념이 닫힌 체계로 구성된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계속 증폭되고 강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유튜브를 보면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의해 크릭을 하면 그 취향과 성향에 맞에 맨 첫 화면이 뜨게 됩니다. 요즈음 선거 계절이 되었는데 여당 유리한 유튜브만 보는 사람들은 여당 유리한 유트브 영상만 뜨고 야당 유리한 정보만 보는 사람에게는 야당 유리한 영상이 첫 화면에 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있는 것만 보게 되어 그 속에 갇혀 버립니다. 필터 버블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용자가 좋아하지 않는 정보는 구글이나 아마존,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과 같은 정보 제공자가 아예 차단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애물에 초점을 맞추면 바로 그런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보이지 않고 내가 그 일을 이루면서 당해야할 고통과 희생만 크게 보이게 됩니다. 장애물만 크게 보이고 크게 보일 뿐 아니라 전부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 담을 넘지 못하면 전진하고 성공하는 형통의 축복을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부하다 공부를 포기하고, 사업하다 사업을 포기하고, 가정생활하다 가정을 포기하고, 직장생활하다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신앙생활하다 신앙을 포기해 버리고, 자녀 양육하다 자녀 양육을 포기하고, 운동하다 운동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비슷합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여 이곳에 종교부지를 받고 교회를 건축할 때입니다. 교회의 중직자들 여러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를 건축은 좋지만, 헌신과 희생의 고통이 예측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평생 교회 하나 번듯하게 세우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아무나 그런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인간들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선을 긋고 하나님께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하나님께 자유롭게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가르치고 선교하는 장소를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생명을 살려 천국에 가는 공개된 장소를 만든다는 것은 고귀한 일입니다. 중직자들은 대부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룰려면 희생과 헌신과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귀하게 여겼던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들도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도,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고, 결혼할 때도, 취업할 때도, 직장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정작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까지 같이 가자고 했던 동지들이 함께 가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은 이때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사업가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쉽게 이루어야 할 사명, 목적, 목표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격 심리학에서 “자기 결정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웰빙과 행복은 세 가지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의 충족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자율성입니다. 활동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도, 사업하는 것도, 직장생활도, 신앙생활도 자기 스스로 선택해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고 컴퓨터 게임이나 영상에 빠지는 것은 거기에는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빠져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취감(유능감)입니다. 바라던 결과가 자신의 노력을 통해 달성되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학교 공부를 하면서 그런 성취감을 누리지 못하면 게임에 빠져 성취감을 누리며 행복해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관계성(연결감)입니다. 타인과의 긴밀하고 긍정적인 연결을 이룰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다 경쟁자이기 때문에 관계성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넷 게임 세계로 들어가 게임 파트너를 만나 행복감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도 이 이론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자꾸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성과도 없이 머물고 있습니다. 자신을 정말로 지지해 주어야 할 동지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때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은 죽을 각오도 하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가장 큰 고난은 죽음입니다. 적당히 하는 것과 죽을 각오를 하고 하는 것과는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20장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면 죽어도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예측될 때 그 고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강요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지금 이루어진 성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고난은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산모가 고난 없이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감수하지 않고 어떻게 공부를 잘하며, 사업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없이 어떻게 부활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 다 아십니다. 총독에게 심문을 당하고 책찍을 맞을 것이고, 십자가에 손발에 못 박힐 것이고, 침뱉음을 당하고 조롱과 수모를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 길을 회피합니까? 그렇게 했으면 인류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과 희생이 있다하여도 그 길이 옳은 길이면 감수하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내가 목사가 되었는지 왜 내가 장로가 되었는지 왜 내가 교사가 되었는지, 왜 내가 권사가 되었는지, 왜 내가 사장이 되고, 왜 내가 과장이 되고, 왜 내가 어머니가 되고, 왜 내가 아버지가 되었는지 주어진 독특한 나만이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왜 내가 결혼하고 왜 자녀를 낳았습니까? 어렵다고 포기하고 어렵다고 자녀들 방치합니까?
바울은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할 분명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사명을 이루는 디딤돌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명은 넓게는 목적이고 작게는 목표입니다. 예측된 고난을 전부로 보고 멈추는 사람은 결코 결과로 주어지는 형통의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것입니다.
<목표, 그 성취의 기술>에서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내가 만일 5분 동안 당신의 성공에 도움이 될 만한 딱 한 가지 생각만을 전해줄 수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날마다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나가십시오.' 이 조언을 충실히 따르기만 한다면 이제껏 배워온 그 어떤 것보다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명은 고난이라는 영양분을 먹고 이루어지는 열매입니다. 고난이라는 영양분 없이 좋고 아름답고 건강한 열매는 맺혀지지 않습니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 첫째가 목표가 분명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전부로 보고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은 것입니다.
로버트 클필톤은 세상에 많은 영향력을 미친 여덟명의 영적 지도자를 연구하여 <초점이 있는 삶>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는 밝히기를 그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의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삶에는 초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표를 향해 걸어갈 때 고난 앞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평생 복음 증거의 분명한 사명을 세우고 갖은 장애물을 뛰어 넘고 사명을 향해 달려간 바울의 마지막 인생 고백은 무엇입니까? "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3. 고난이 예측될 때 형통한 길을 가려면 내 뜻이나 네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붙들어야 합니다(14).
드로아 제자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난 결박되고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예측되는 고난을 피하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해석을 잘못한 것입니다. 똑같은 사실이고, 똑같은 일이고, 똑같은 사건이고, 똑같은 말씀일지라도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대처 방법은 정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결박되는 모습을 보고 바울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려움이 있을 것을 보여 주며 미리 준비하고 십자가를 질 각오로 가라는 의미로 보여 주었는데 그는 그렇게 해석해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제자의 길이라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도 연약하기 때문에 삶의 현장에서 늘 내가 중심이 되어 내 이익되는 것, 내 편한 것, 내 즐거움이 있는 것만이 형통의 길인 줄 알고 이익되지 않는 것을 피하고, 편하지 않는 것을 피하고 즐거움이 없는 것을 피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진정한 형통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겠다는 바울의 단호한 신앙의 결단을 보고 바울의 동료들이 결국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타인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내 뜻보다, 타인의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신앙인의 궁극적 형통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뜻도 네 뜻도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형통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혔더라”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주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도행전 23장 11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날 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바울은 로마 군인의 보호를 받고, 국비로 여행비도 숙식비도 다 제공받으며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뜻을 다 성취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형통이었습니다. 내뜻이나 네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 형통입니다.
고집을 부리며 내 뜻을 성취하려고 하니까 고비용을 치르는 것입니다.
요나가 왜 그렇게 풍랑을 만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고비용을 치루며 형통을 누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다 그런 어려움의 늪 속에 한 동안 빠져 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이스마엘을 낳고 고비용을 치루며 형통을 누리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아내의 뜻을 성취하려다 한 때 형통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사울왕이 형통하지 못한 것도 하나님이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성취하려다 그랬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형통을 누리지 못한 것도 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아내의 뜻을 성취하려다 그런 것입니다. 아합도 아내 이세벨의 뜻 성취하려다 형통치 못했습니다. 성경에서 근본적인 의미의 형통의 뜻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잘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대로 잘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형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슨 기도를 드립니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통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감당하십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 육신을 입으신 인간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은 고통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올 한해 어떤 고난이 예측된다고 하여도 형통한 길을 가려면
고통스러운 예측의 앞에 무릎 꿇고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5).
올 한 해 고난이 예측된다고 하여도 형통한 길을 가려면 예측되는 고통스러운 장애물에 집중하지 말고 사명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13).
올 한 해 고난이 예측된다고 하여도 형통한 길을 가려면 내 뜻이나 네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바랍니다(14).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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