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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1),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요1:1)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3412 추천수:8 220.120.123.244
2021-11-28 12:56:56

성탄(1),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요1:1)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를 예수님 오시기 전(B.C)과 예수님 오신 후(A.D)로 나누어 기록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역사의 분기점이 됩니다. 성탄절은 인류 최대의 명절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성탄절까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5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첫 번째는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느냐가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느냐?”일 것입니다. 이 대답이 어떻냐에 따라 인생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성탄절의 의미가 달라지고 인생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이 땅에 사는 삶의 질이 달라지고 죽은 후에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님으로 이 땅에 탄생하였는데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본문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습니다(1)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태초’라는 말은 “아르케”라는 말을 번역한 말로 “시작, 기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빼레쉬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태초와는 의미가 다른 말씀입니다.

창세기 1:1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씀할 때 태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한 이 세상의 시작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공간이 만들어진 때와 세상의 시간이 시작된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있는 태초는 시간이란 개념을 초월한 의미로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을 뜻합니다. 곧 시작을 지정할 수 없는 시작, 만물이 있기 전의 영원을 말합니다.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 전부터 계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보다 먼저 계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요한복음 17장 5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창세 전에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아브라함 전에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예수님의 선재성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1:15)"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셨다는 것입니까?

“로고스(말씀)”으로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말씀"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로고스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별명입니다.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학적인 수사법인 은유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호수다”라고 말할 때 마음과 호수가 같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유를 통해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드러내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로고스’. 곧 말씀으로 지칭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창 1:2.6.9.11),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데 가장 근접한 용어가 ‘로고스’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형태로 태초부터 계셨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분으로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지창조를 할 때부터 이미 계셨고, 창세기에 이미 예언하셨고 구약에서도 활동하셨으며 인류 구속의 성취자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8-9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전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반적인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난 인간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창조되기 전 영원부터 계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했다는 말씀입니다.

 

2.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1).

계속 1절을 보십시오. 말씀으로 은유된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계셨다”는 것은 존재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였다는데 계속 계시는 것입니다. 세 번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미완료 시제의 특정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과거에 계속되어지는 동작이나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제 2위로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어 이 말씀이 곧 하나님(1)이시다는 말씀합니다. 태초부터 두 인격이 존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성품이나 활동의 일부가 아니라 별개의 인격체였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位)로서 아버지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고 함께 영광 가운데 계셨던 개별 인격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어떻게 말씀해주시는지 요한복음 10장 30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8:19)"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요1:2; 8:58; 17:5: 17:24), 어디에나 계시며(마18:20, 28:20), 전지하시며(마17:22-27, 요4:16-18), 전능하시고(마8:26-27, 눅4:38-41)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요일5:11-12)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는 것은 당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냐는 것인 인간의 삶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4대 성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3.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3).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모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믿습니까?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졌습니다. 새로 번역하면 "그를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나왔습니다(요10:9, 롬5:1). 예수님은 구원자인 동시에 만물 창조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는 존재 성립의 원인이요, 존재 시작의 원인이요, 존재 형식과 내용의 원이이요, 존재 가치의 원인이요, 존재 의미의 원인이요,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죽은 신이나, 없는 신이나, 악한 신이 아니라, 존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만물 존재의 근원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6절에 “그러나 우리에게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고 그로 말미암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어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장 2절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가 지은 바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을 보시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계시록 3장 14절을 보시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4.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은 생명의 구원주로 오셨습니다(4).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까?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임과 동시에 구원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특이한 표현 중에 하나가 “생명”이란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이란 말로 시작하여(1:4), 생명이란 말로 끝맺게 됩니다.(요한복음 20장 31절) “생명”이란 말에는 ‘비오스’란 말과 ‘조에’란 말이 있습니다. 비오스란 말은 보통 '생애' '생활'등을 뜻하고 '조에'란 말은 요한복음에 무려 35회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생명의 책'이라고도 합니다.

(1) 죽음과 반대되는 '삶' 그 자체를 뜻합니다. 곧 '영생'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는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받게 되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는 '생명에 이르는 부활'이 있고 '심판에 이르는 부활'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는 “예수께서 생명을 주시는 자는 결코 멸망치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명은 사망과 심판을 물리칩니다.

(2) 이 생명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그를 믿는 신자의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6장 57절로 58절에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나도 아버지로 인하여 살고...”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시 말하기를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원이시요, 생명 그 자체를 실제로 계시하신 자요, 우리의 생명을 값으로 사내신 분이십니다.(요6:40, 27, 17:2). 우리도 예수로 인하여 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생명, 죽음을 몰아내는 생명, 어두움을 몰아내는 생명,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생명,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생명,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생명, 약한 자를 강한자로 바꾸는 생명, 질병을 건강으로 바꾸는 생명이십니다.

(3)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입니다(4).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을 주는 운동'이입니다. 여기 빛은 달빛 같은 반사광이나, 별빛 같은 발광체도 아니고 횃불 같은 인위적인 빛도 아닙니다. 여기 빛은 본질적인 빛, 근원적인 빛, 생명 자체의 빛을 말합니다. 빛의 근원, 빛 중에 빛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참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9장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라고 하였습니다.

(1) 사람 안에 머무며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빛입니다.

(2) 이 빛을 받으면 혼돈과 어둠은 물러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이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에게 있는 사망과 사탄의 어둠이 물러가 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모두 어두움이요 혼돈 상태였습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파괴요, 절망적이고. 정욕적이요 마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물러갑니다.

(3) 이 빛은 앞을 밝히 밝히며 이끌어 주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상에 오고 간 수많은 사람들은 온갖 회의와 불안과 공포와 죽음의 어둠에서 빛이신 예수에게 나아 와 광명의 걸음을 걸었습니다.

(4) 이 빛은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빛입니다.

이 빛은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5). 예수님이 가는 곳에는 어둠, 절망, 불안, 공포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이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관과 좌절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빛이 오시므로 사망의 어둠이란 절단이 나 버린 것입니다. 이 빛은 사람들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줍니다. 애굽 바로의 빛, 곧 우상의 빛은 참 빛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의 황금빛, 헬라와 파사의 은빛(철학)은 참 빛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철(鐵)빛은 참 빛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사람들에게 있는 철학, 문학, 과학, 예술, 정치 경제 등의 빛은 참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이따금 사람들을 유혹하고 놀라게 하는 일시적 섬광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속을 비추어 주지 못합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운동이 없습니다. 죽음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참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고 사랑하게 합니다.

 

5. 우리 성도님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습니다(1)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1,2).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3).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4).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빛으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에 대하여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합니다.

1) 영접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왜 영접지 않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빛이 어둠 속에 왔는데도 어둠이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권력있는 헤롯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로마인도, 구약 성경을 잘 아는 대제장과 서기관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했습니다. 육안과 심안은 있지만 영안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듣고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은 시간의 창조자로 선재하였습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구원주이십니다. 메시아 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성경에 전쟁과 폭력이 있다고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고 탓하고 시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행한 불의와 폭력, 부정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산물이고 자유를 누리려면 하나님을 믿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을 물질로 대체하고, 하나님을 쾌락으로 대체하고, 하나님을 과학으로 대체하여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무신론을 주장하며 많은 젊은이들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신무신론의 4대 기수인 도킨스, 데닛, 히친스, 해리스 같은 사람은 과학적 차원과 도덕적 차원에서 기독교의 독선과 무지의 종교라고 맹공합니다. 진화의 신을 믿으며 하나님은 만들어진 신이라고 주문을 깨고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어아고 말합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맹목적이며 허구이고, 근거 없은 상상의 세계라고 말하고, 신앙은 폭력적이며 혐오감을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투적 무신론자' 도킨스도, '전략적 무신론자' 데닛도, '직설적 무신론자' 해리스도, '성역파괴 무신론자' 히친스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에서 "공식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지하는 상황에서 콘스탄틴 황제는 예수를 인간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신으로 도전할 수 없는 권한을 가진 하나의 실체로 변화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베드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마르다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7)" 의심만은 도마도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성탄절에서 예수님 이름 지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구시대 문화라는 것입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설치된 성탄 트리 꼭대기에 달린 십자는 특정 종교의 상징물이니까 철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스라는 인사를 하자고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크로스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화적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기자로서 예수님을 신화적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예수님에 대하여 수많은 취재를 한 결과 구원자로 받아들이게 된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이 거짓말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주장이 진실 아니면 거짓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라는 질문을 받을 때 선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였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거짓인 줄 알고 거짓말을 한 경우입니다. 이런 때는 예수님의 사기꾼, 거짓말쟁이입니다. 위선자입니다. 거짓인줄 모르고 그런 주장을 하였다면 정신병자입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 위선자 사기꾼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직하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은 사기를 쳤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헛된 소망을 가지라고 속였겠습니까?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사악자입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거짓을 철회했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거짓말했겠습니까? 예수님이 거짓말을 했다면 일관성 있게 계속적으로 거짓을 가장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루는 속일 수 있지만 평생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처럼 살았고 예수처럼 가르쳤고 예수처럼 돌아가신 분이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선포되는 곳마다 악한 사람이 선해집니다. 국가가 발전하고 도둑이 정직해 집니다. 알콜 중독자가 변하고 증오가 사랑으로 변합니다. 거짓말쟁이에 의해 이런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정신병자이겠습니까?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착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종종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정신병동). 정신분열증에 걸리면 현실을 도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심오하고 정신적 압박에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했고, 수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으면서도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만큼 건강하고 영향력이 있는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신적으로 예수님처럼 건강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의 주장대로 진정 하나님이십니다. 지성인들은 예수의 신성이나 그의 부활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과학적인 증명은 어떤 사실에 의문을 가진 사람 앞에서 그 사건을 반복함으로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은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법적-역사적 증명을 통해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법적-역사적 증명은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구두 증언과 문서상의 증거 그리고 증거물입니다. 과학적인 방법은 오직 반복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증언은 법적-역사적 증명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구주라는 사실은 증거가 부족하여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기를 꺼리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에 대하여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10:4)"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14:1)"라고 말씀하신다. 어리석음과 교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9-20)”

 

이 말씀을 기록한 요한을 보십시오. 권력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격이 활화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 자신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어쩌면 집안 망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증언하여 인간적으로 이익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에베소로부터 로마로 강제 송환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름이 끓는 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끓는 기름가마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를 입지 아니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도미티안(Domitian)은 그를 밧모섬으로 추방하였다고 합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고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거하다가 다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야고보는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빌립은 채찍에 맞았으며,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마태는 창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십자가의 두 끝을 수직으로 못박혀 죽었습니다. 마가는 몸이 찢기어 순교 당하였습니다. 빌립도, 바돌로매도, 시몬도 십자가에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도마는 창에 찔려 순교 당하였고, 다대오는 화살에 맞아 순교 당하였습니다. 거짓을 위해 이렇게 순교를 당하였겠습니까? 제자들이 꾸며냈겠습니까? 예수님의 가족을 보십시오.

당시 예수님의 가족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 7:5)" 막3:21

예수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주장했습니까?(요10:36,요14:6-9) 그러나 그 가족이 변하여 오순절 성령이 임하실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합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기도의 대상자로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기도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육신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야고보서를 기록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말합니다.

 

2)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권세(엑수시아)’란 말은 ‘맡겨진 권위’를 말합니다. 이 권세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주인공이 되어 세상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중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환경과 어떤 처지에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권세를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권세,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특권을 누리는 권세, 죄의 지배를 벗어나는 권세, 사탄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권세,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는 권세, 회개하여 모든 죄로부터 용서받는 권세, 저주로부터 해방받는 권세, 믿음으로 기도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권세,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특권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내게 주신 권세를 깨닫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 걱정과 두려움의 노예로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닉 부이치치를 보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던 아이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신의 신체적 장애로 인해 아픔과 절망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의 생명, 참 빛이 있었습니다. 8세 이후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15살 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서핑을 하고, 드럼을 연주하고, 골프공을 치고, 컴퓨터하며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가진 기적의 주인공이 세계에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1.3 1.3 송가네 공부법>을 쓴 송하성 교수님을 보십시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답니다. 빛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희망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교회 가까이서 자취하다 자연스럽게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의 권세로 살게 된 것입니다. 학생회 예배 외에도 주일예배를 꼬박꼬박 참석하고, 새벽기도를 매일 나가면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는 "그 말씀 하나로 가정에는 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어둠의 가정에 빛이 들어 온 것입니다. 동생들은 "형이 교회 다니면서 달라졌다"며 증거했고, 동생들도 형을 따라 공부했답니다.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며 행정고시에 합격했답니다. 5형제인데 모두 고시에 합격했답니다. 그리스도가 가는 곳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드러납니다.

조쉬 맥도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예수를 종교라고 하는가?>의 저자입니다. 전세계적으로 1천 5백만 부나 팔린 책입니다. ccc 간사가 되어 84개국 700여개 대학에서 1천만명 넘는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한 사람입니다. 110권 이상의 책을 단독 공동으로 저술한 사람입니다. 미국기독교 출판협회에서 선정한 골드메달리언 상을 4번이나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회의론 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행복과 자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신의 즐거운 시간들을 망쳐 버리는 지름길로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참여했다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습니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구세주로 모셨습니다. 그의 인생은 변화되어 마음에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어릴 때 성적으로 괴롭혔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를 용서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여서 어머니를 폭행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심하게 맞아 헛간의 거름더미 위에 누워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아버지를 사랑하고 용서했답니다.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을 찾아와 "조쉬, 어떻게 나같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니?"라고 물었답니다. "아버지 얼마 전만 하더라도 전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제 삶에 영접한 후 삶이 변했어요... 아버지의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요." 아버지는 그 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고 완전히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생명이 살아납니다. 지금도 수많은 생명이 예수님을 생명으로 모시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구유에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땅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권세,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특권을 누리는 권세, 죄의 지배를 벗어나는 권세, 사탄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권세,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는 권세, 정죄함을 받지 않는 권세, 모든 저주부터 속량함을 받는 권세, 믿음으로 기도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권세,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특권을 누리고 사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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