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함께 천국에 갑시다(9) 복된 죽음(요한계시록14:13)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4108 추천수:7 220.120.123.244
2021-10-31 13:46:43

함께 천국에 갑시다(9) 복된 죽음

요한계시록14:13

 

10월 30일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었습니다. 한 때 대한 민국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권력 있는 사람이나 지식 있은 사람이나 돈 있는 사람이나 누구나 한 번은 예외없이 죽습니다. 그분은 12.12 신군부 세력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소뇌위축증, 암, 천식 등 18년 가까이 긴 투병 생활을 하시다 갔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구나 한번은 죽는데 어떤 죽음이 복된 죽음이겠습니까?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웃음>이라는 장편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은 프랑스인이 좋아하는 다리우스 워즈니악이 올림피아에서 공연 후 자신의 분장실에서 죽기 전 크게 웃다가 갑자기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웃음>에는 사람의 일생에 대하여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2세 때는 똥오줌 가리는 게 자랑거리였고, 3세 때는 이가 나는 게 자랑거리였으며, 12세 때는 친구들 있다는 게, 18세 때는 자동차 운전할 수 있다는 게, 20세 때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35세 때는 돈이 많은 게 자랑거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0세를 기점으로 자랑거리가 뒤집어 진다는 것입니다. 50세 때는 돈이 많이 있다는 게 자랑거리, 60세 때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게, 70세 때는 자동차 운전할 수 있다는 게, 75세 때는 친구들이 남아 있다는 게, 80세 때는 이가 남아 있다는 게, 85세 때는 똥오줌을 가릴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이란 똥오줌 가리는 것 배워서 자랑스러워 하다가 사는 날 동안 똥오줌 내 손으로 가릴 수 있다는 걸 자랑하며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 살면서 누구나 소원이 있다면 잘 태어나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일 것입니다. 잘 죽는 것, 복된 죽음, 좋은 죽음, 품위 있는 죽음, 안락한 죽음, 웰 다잉은 어떻게 죽는 것일까요? 노 전 대통령처럼 대단한 권력을 누렸지만 오랜 세월 병상에서 투병하다 죽은 것이 좋은 죽음일까요? 다리우스 워즈니악처럼 공연을 끝내고 분장실에서 크게 웃다가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일까요?

이명숙씨의 박사논문인 “노인이 인식하는 좋은 죽음”이라는 논문을 읽어 보면 우리 나라 노인들이 인식하는 좋은 죽음은 ‘배우자와 비슷한 시기에 함께 하는 죽음’, ‘어느 누구에게 폐치지 않는 죽음’,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죽음’, ‘적당한 수명을 누리는 죽음’, ‘명을 다하는 죽음’, ‘내 집에서 맞이하는 죽음’, ‘편안한 죽음’, ‘잠자는 듯한 죽음’, ‘아프지 않는 죽음’, ‘임종 과정이 길지 않는 죽음’, ‘준비된 죽음’, ‘삶의 최선을 다하고 맞이하는 죽음’, ‘삶을 즐기고 맞이하는 죽음’, ‘베푸는 삶을 살고 가는 죽음’, ‘신앙 속에서의 죽음’, ‘자손이 잘되는 것 보고 가는 죽음’등 16개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유행하는 “구구팔팔이삼사” 인생이 복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99세까지 88(팔팔)하게 살고, 2~3일 앓다가 4일 만에 죽자"라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죽음이 복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된 죽음을 하기 위한 비결은 "일십백천만"의 이론을 실천해야 한다고 합니다. 일은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좋은 일을 하고, 십은 하루에 열 번 이상 웃고, 백은 하루에 백 자 이상 글을 쓰고, 천은 하루에 천 자 이상 글을 읽고, 만은 하루에 만 보 이상 걷는 것이라고 합니다.

 

1. 하나님은 어떤 죽음을 복된 죽이라고 말씀할까요?

주님 안에서 죽는 죽음이 복된 죽음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표준 새번역으로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이 하늘에서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무슨 음성입니까?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는 음성입니다.

오늘 성경은 어떤 죽음이 복된 죽음이라고 말씀합니까? 주 안에서 죽는 죽음이 복된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죽음이든 주님 안에서 죽은 죽음이 복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주 안(in christ)에서 죽는 자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접붙여진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주안에서는 ‘주를 위하여’ 혹은 ‘주 때문에’라고도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죽음이든 주님을 위해서, 주님 때문에 죽는 죽음은 복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말은 ‘행복에 가득 찬’, ‘행복한’, ‘은총 입은’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행복이 가득 찬 죽음, 은총 입은 죽음, 좋은 죽음, 복된 죽음, 품위 있는 죽음, 좋은 죽음, 웰 다잉은 주님 안에서 죽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서 죽던, 젊어서 죽던, 늙어서 죽던, 병원에서 죽던, 집에서 죽던, 아내나 남편보다 먼저 죽던, 늦게 죽던, 질병으로 죽던, 사고사로 죽던, 자연적으로 죽던, 많은 업적을 남기고 죽던, 아무런 없적이 없이 죽던, 가난한 자로 죽던, 부자로 죽던, 자식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죽던, 자식들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죽던, 잠자는 듯하게 죽던, 고통을 받다 죽던, 임종 과정이 길던 임종 과정이 짧던, 삶을 최선을 다했던,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삶을 즐기고 맞이한 죽음이던 고생 고생만 하다 맞이한 죽음이던, 더 베푸는 삶으로 죽던, 도움받은 삶으로 죽던 주님 안에서 죽는 삶은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주안에 죽은 자들이 본문에서 직접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1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성도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를 위해 죽은 자들입니다. 주님 때문에 죽은 자들입니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는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 엄청나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 시대 때 기독교인들은 10번에 걸쳐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박해를 한 황제는 네로 황제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불태워 황제의 정원을 밝혔다고 할 정도로 잔인하게 신앙인을 처형하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 사도도 바울 사도도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지만 저주받은 죽음이 아니라 복된 죽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지만 저주받은 죽음이 아니라 복된 죽음이었습니다. 네로에 이어 두 번째 기독교인들은 잔인하게 박해한 황제는 90년부터 96년까지 핍박을 한 도미티안 황제입니다. 그는 정권 말기에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을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의로운 신앙인은 황제 숭배를 반대하였고 황제 숭배를 하지 않는 신앙인을 잔인하게 처형하였습니다. 이때 로마의 클레멘트가 순교하였고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이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두운 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잠 못 이루는 맹수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공포심을 자아내 감옥은 마치 지옥을 연상시켰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친형인 야고보는 제자 중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같이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끔찍한 순교의 장면을 보기도 하고 들어 알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형은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순교를 당하였고 제자들도 다 순교를 당하고 이제 마지막 자신만 살아 남았습니다.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이 티투스에 의해 멸망당했고 매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로 섬긴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죽어갔습니다. 로마인들은 콜롯세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피흘리며 쓰러지는 잔인한 장면을 즐기기 위해 모였습니다. 팡파레가 울리자 관중들이 조용해지면서 도미티안 황제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군중들은 환호를 보냈고 도미티안 황제는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자기 자리에 앉습니다. 잔인한 격투기가 벌어지고 경기가 끝난 다음에는 감금되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로 경기장에 밀려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데 뭉쳐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그것도 잠시일 뿐 곧이어 쇠문이 열리면서 여러 마리의 굶주린 사자들이 뛰쳐 나와 사냥감을 발견하고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순식간에 뿔뿔히 흩어지고 비명소리, 살려달라는 아우성 소리와 함께 하나 둘씩 죽어갑니다. 밤에는 화형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경기장 안에 횃불을 밝혀 놓고 곳곳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그 아래 장작을 쌓 놓았습니다. 형리들은 그리스도인들 수십 명을 십자가에 묶은 뒤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로마인들은 조롱합니다.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냐? 더 빛나게 해주랴?" 주님을 위하는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불꽃 가운데 죽어갑니다. 어떻게 이런 죽음이 복된 죽음이고 어떻게 이런 죽음이 좋은 죽음이고 어떻게 이런 죽음이 품위 있는 죽음이고 어떻게 이런 죽음이 웰 다잉이 되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집을 빼앗기고 가족과 이별하고 유리하다가 붙들려 화형을 당하는데 어떻게 이런 죽음이 복된 죽음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하여 믿음을 지키며 살다 죽는 죽음은 복된 죽음이다. 좋은 죽음이다. 품위 있는 죽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습니까? 반대도 9988234해도 주님 밖에서 죽는 것은 복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교한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이란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받는 문이기 때문에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죽음을 잠자는 것이고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며 생명의 완전한 완성에 들어가는 복락이기 때문에 죽음은 복된 것입니다. 시편 116편 15절에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좋은 죽음에 대한 세상의 소리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산 강아지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고 합니다. 세상은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화형당하고, 십자가 형을 당하고, 사자에게 찢기는 죽음을 좋은 죽음 복된 죽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되도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땅의 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소리입니다. 아담은 하늘의 소리를 듣지 않고 땅의 소리를 듣다 불행해졌습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기 2:16∼17)”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와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여자로부터 “내가 먼저 먹었는데 이렇게 죽지 않았어요.”라는 땅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땅의 소리를 듣고 그 열매를 먹고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담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 사탄은 또 유혹합니다. 땅의 소리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 사탄은 또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 이때 예수님을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땅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둘째 아담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복된 죽음, 좋은 죽음에 대한 땅의 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음, 복된 죽음은 죽음은 주안에서 죽은 것이라는 것을 꼭 믿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것만큼 행복한 죽음, 좋은 죽음, 복된 죽음은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꼭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주님 안에서 살다 주님 안에서 죽는 복된 죽음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2. 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된 죽음입니까?

왜 주님 안에서 죽는 죽음이 복된 죽음인지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쉽게 번역한 표준 새번역에서는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안에서 죽은 죽음이 복되다”는 하늘의 소리를 “그렇다”라고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주님 안에서 죽는 죽음이란 영원한 천국에서 이 땅의 수고를 마치고 편히 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수고란 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행한 어떤 정상적인 노동이 아니라,그들의 변치 않는 믿음 때문에 당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의 시대에 그 당한 일은 황제 숭배로 인하여 신실한 자들에게 닥친 시련과 고난이었으며,그들의 가장 큰 수고는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주님 안에 산다는 믿음 그 자체 지키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동네에서 추방되기도 하고 농토를 빼앗기기도 하고, 집을 떠나 땅 속에 들어가 살아야 했고, 때로는 굶주려야 했고, 때로는 원형 극장에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역하면서 신앙을 신실하게 지키기 위해 시련과 고난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 수고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을 지키는 수고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수고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수고였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수고는 시험을 이기는 수고였습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수고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수고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결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계 14:11).

죽음은 이런 수고가 그치고 쉬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고, 가족에 대한 수고, 교회에 대한 수고, 국가에 대한 육신적, 정신적 수고를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 푹 쉬어 평안히 쉬게 됩니다. 죄악으로 오는 세상의 고통과 근심에서 쉬는 것입니다. 무거운 죄 짐으로 죄에 속박된 것에서 자유 얻어 쉼을 얻게 됩니다. 천국에서 평화, 기쁨,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수고가 끝나고 드디어 쉼이 허락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죽는 죽음은 복된 죽음입니다. 주님 안에 죽은 자는 소망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했습니다(행6:15). 주님 밖에서 죽는 사람은 모든 것의 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의 상실이기 때문에, 고통의 시작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고 저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죽은 것은 죽음 후에 바로 복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세상적으로 보면 불행한 것일 수 있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축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삶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인생은 고난의 삶입니다. 죽음은 이와 같은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축복입니다. 이제는 그만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편안히 쉬라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인생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주심으로 힘들고 어려운 우리의 삶에 쉼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교회가 처한 고난을 벗어나 더 이상 슬픔도 혼란도 고난도 동요도 유혹도 죽음도 없는 안식하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죽은 죽음을 복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고 하셨는데 이 땅에서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쉼이 완성되는 곳이 천국입니다.

 

둘째는 주님을 위해 믿음을 지키다 죽는 죽음이란 그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상급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행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로 주신 의로운 행위들입니다. 그 행위들은 바로 본문 14장 12절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고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2장 6-8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위해 믿음을 지키며 선행을 행하는 것이 억울한 것도, 낭비도, 아무 소용없는 것도 아니고 다 보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을 위해 산 모든 것이 다 인정을 받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행함으로 상급을 받는 원리입니다. 주를 영접한 성도가 주의 이름으로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이 있습니다. 그 행위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반드시 상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0-42절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주님을 위해 의를 뿌린 자의 상이 있습니다. 잠언 11장 18절에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닮아 가는 자가 상을 받습니다. 신앙 인격이 전혀 자라나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갈지라도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3;12-13).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켰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려고 노력했습니다(고후5:3).

좋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에 대한 상이 있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 다 헛된 것이 아니라 상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4-35절에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 손해가 아닙니다. 저주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핍박당하면 하늘에 상급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다 무시할지라도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계11:18),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에게(잠 13:13)에게 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상급이 있습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보다 제일 큰 상은 이미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구원의 상은 모든 상급의 총화입니다.

 

3. 함께 천국에 가야 할 우리 신앙인은 죽음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은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짐과 동시에 지옥에 들어가는 관문이 됩니다. 그래서 죽음은 저주이고, 불행이고, 고통이고, 단절이고,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뭇솔리니는 죽음이 두려워 사형 형장에 끌려가면서 잠시 동안 머물러 달라고 세번이나 애원을 했으며, 스탈린은 임종시에 두려워 떨며 소리를 지르고 발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화형대 앞에서도, 십자가 앞에도, 사자들 앞에서도 찬양하며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끝이지만 주님 안에 있는 신자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신자에게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이며(계21:4), 천국에 들어가 참 안식과 위로, 상급을 받는 삶의 새로운 출발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으로 삶의 거주지가 옮겨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천국은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예수가 함께 거하실 처소입니다(계 3:4) 우리를 괴롭히는 악한 자들이 없고 의인들만 거합니다(히 12:22-24). 악한 사탄의 유혹이 없는 곳으로 천사들이 영광 중에 성도를 수종드는 곳입니다(히 12:1-5) 생명수와 생명과가 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걱정하고 투쟁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딤후 4:8). 우리 앞서간 사랑하는 가족 친구를 만나볼 수 있는 곳입니다(눅 16; 19) 천국은 사랑이 충만한 곳이며(고전 13:13) 죄가 없는 곳입니다(계 21:27).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이고 예수님이 친히 목자가 되는 곳입니다. 다시는 죽음이나 질병이나 근심이나 걱정이나 번민이나 슬픔이나 고통이나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없는 곳입니다. 사단과 대적들의 핍박이 없는 곳입니다. 부패한 죄악의 성품이 없는 곳입니다. 그것들로 인하여 또는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수고가 전혀 없는 곳입니다. 오로지 위로와 만족과 평안과 안식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문을 통해 이런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으로 성화가 완성됩니다. 죽음은 영이 불완전한 육체 속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창조시에 완벽했지만 범죄 이후 육체는 불완전해져서 늙음과 질병, 사망이 찾아 왔습니다. 인간이 불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살기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먹고 자라고 영혼이 육체를 떠남으로 완전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남은 생애에 대하여 사명을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죽음 후에 행한대로 상을 받습니다. 잘 죽(well dying)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사는 것(well being)은 더욱 중요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 말씀한 것처럼 이 땅에서 맡겨준 사명을 잘 이루어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수고한 일은 절대로 헛된 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고전15:58). 바울은 미래에 하나님께 받을 상을 바라보고 주의 일을 했습니다. 사도행전20:24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고, 디모데후서4:7-8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고, 빌립보서3:14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명을 다 이룰 때까지 우리 하나님이 나를 천국에 대려가지 않는다는 자세로 이 땅에서 천국처럼, 천국 복음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연세대 영동 세브란스 병원의 암센터 소장인 이희대 박사님이 <희대의 소망>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암 환자가 이겨야 할 통증 중의 하나는 ‘죽음의 공포’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는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지 못했답니다.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같아서’ 좀 창피하기는 했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답니다. 대장암 2기였기에 수술과 치료를 잘 받으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었답니다. 그랬는데도, 수술 전날 저녁에 병실에 누워있으려니,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곤두섰답니다. 자려고 불을 끄고 잠을 청했지만, 시커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답니다. 누워있던 침대가 땅 밑으로 쑤욱 꺼져 들어갔답니다. 비몽사몽간 가위에 눌린 느낌이랄까, 불길한 예감이 제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답니다. ‘혹시 수술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열어보니, 손쓸 수 없는 상태라면 어쩌지?’ ‘의료진이 혹시 실수라도?’

외로움과 죽음이라는 공포에 짓눌렸답니다. 그 누구보다 의지와 자존심이 강했지만 엄습하는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답니다. 평소에 잠을 잘 자던 저였으나, 그날 밤은 잠을 잘 수 없었답니다. 밤새도록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렸답니다. ‘죽음의 공포가 이처럼 어마어마한 것이란 말인가?’ 저는 그럴 때마다 찬송가를 부르고 서투른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주여, 이 공포에서 저를 자유케 하소서!’ 주님 안에서 죽음의 공포를 이겼답니다.

2003년도에 대장암이 발병이 되어 암세포가 간과 골반 뼈에 전이되어 암4기, 말기 암 상태가 되었답니다. 이 정도 되면 보편적으로 3개월에서 6개월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8년이 지나도록 환자를 돌보았답니다. "암이 허락 없이 와서 돈도 안내고 전세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암은 하나님을 만나게 채 주었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차라리 축복이었답니다. 기독교 학교도 나왔고 성경을 접한 적도 있었지만,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답니다. 그런데 암을 통해서 철저히 낮아짐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2003년 6월에 이미 4기였답니다. 자신과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죽는다, 죽는다 했더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몰랐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과 싸움에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치료 외에 영적인

치료를 허락하셔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주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믿음으로 암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로서 의술도 중요하지만 의술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 해야 할 사명이 있어 하나님은 그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있게 해 놓는다는 신앙으로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사명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세째는 복된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은 영혼이 우리 몸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흙으로 지어졌습니다(창2:7) 하나님이 그 흙으로 만든 몸에 영혼을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우리 몸속에 살다 떠나는 것이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몸과 영혼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야고보서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다라고 말씀합니다. 손이 고무장갑에 들어가면 살아서 움직이지만 손을 빼버리면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버리면 몸은 아무 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장막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것입니다(벧후1:13-14). 죽음은 이 땅의 장막이 무너지고 영원한 집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고후5:1). 죽음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주신 우리 영혼을 데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의 죽음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말씀합니다(창5:24). 그래서 죽음을 불완전한 몸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나이들면 몸이 쇠해 불편하고 괴롭고 힘듭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고통이 동반되는 데 그 몸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쉼으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여 주었듯이 제한 받던 몸에서 완전한 해방입니다. 죄의 종노릇하며 그 죄로 파생되는 걱정, 근심, 불안, 불평, 원망, 고통, 갈등, 두려움 등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병들면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죽음이 두려워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 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2/3는 의료기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죽음보다 나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엄하고 평화롭고 안락한 죽음이 아니라 의료 기기에 의해 수명만 연장하다가 고통과 우울감, 비탄 속에 홀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산소호흡기를 한다거나 심폐소생술을 한다든가 심장박동기를 달게 한다거나,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영양제를 놔서 며칠 동안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기 1개월 전에 평생 쓰는 병원비의 36%를 쓴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6%를 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기 6개월 전에 평생 쓰는 병원비의 절반 이상을 쓰는 반면 미국 사람들은 33%를 쓴다고 합니다. 신앙인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무작정 살려고 애를 쓰지 말고 이만한 돈이 있다면 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치 있게 사용하며 천국에 가야 합니다. 어차피 천국 가는 길인데 80년 90년 이 땅에 살았는데 중환자실에서 기계에 의해 인간답지 못하고 존엄하지도 못한 생명을 고작 며칠, 몇 주, 1, 2년 더 연장하겠다고 몸부림 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명숙씨의 박사논문인 “노인이 인식하는 좋은 죽음”이라는 논문에서는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12가지를 제시합니다. ① 자신이 죽는다는 것과 앞으로의 일을 예상할 수 있을 것 ②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조절력을 가질 것 ③ 존엄성과 사생활을 보호받을 것 ④ 고통완화와 다른 여러 증상들에 대해 적절한 통제력을 가질 것 ⑤ 어디서 임종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것 ⑥ 어떤 내용이든 필요한 경우 전문가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 ⑦ 영적 그리고 정서적 지지를 받는 것 ⑧ 병원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지 호스피스 간호를 받을 것 ⑨ 임종 시 함께 할 사람을 선택 할 수 있는 것 ⑩ 생명 연장술 사전선택을 통해 본인의 바람이 존중받는 것 ⑪ 주변사람과 이별할 시간을 갖는 것 ⑫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하지 않는 것 등입니다.

신문에서 이어령 교수님이 암 선고를 받았다 글을 보았습니다. 의사가 ‘암’이라고 했을 때, ‘철렁’하는 느낌은 있었으나 ‘절망하지 않았다’고 했답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죽음의 연습’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생명 속에는 죽음도 함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시는 분입니다. 이 교수는 방사선 치료도, 항암 치료도 받지 않는답니다. 석 달 혹은 여섯 달마다 병원에 가서 건강 체크만 할 뿐이라고 합니다. ‘투병(鬪病)’이란 용어를 쓰지도 않고 대신, ‘친병(親病)’이라고 불렀답니다. “암과 싸우는 대신, 병을 관찰하며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사시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암 세포가 뇌에까지 전이됐기 때문에 더 이상은 손쓸 방법이 없답니다. 퇴임 이후 요란한 기념행사나 기념건물을 세우지 않고 조용히 봉사활동을 하며 세계평화를 위해 애쓰며 오히려 재임 시절보다 더 존경을 받던 카터 대통령이었기에 미국의 모든 언론이 이 사실을 알렸답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은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고 매주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진행하던 성경 공부를 평소와 같이 진행했답니다. 많은 기자들이 몰려 걱정스럽게 소감을 묻자 오히려 “살날이 몇 주밖 에 남지 않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너무나 몸과 마음이 편안합니다. 건강과 상황이 허락한다면 평소처럼 성경공부를 진행하며 남은 삶을 보내고 싶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답니다. 그는 95세에도 작은 교회에서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죽든 살든 그것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난 우리 가족과 카터 센터(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비영리단체)의 일, 가끔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일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는 품위 있는 죽음을 끌어안았는데 오히려 완치되어 미국 최장수 대통령으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1.10.31.

 
SNS 공유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