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8) 서운한 감정 치유
눅15:25-32
오늘은 치유 8번째로 “서운한 감정 치유”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일상에서 서운한 감정은 예고 없이 시시때때로 다가옵니다. 어린이나 젊은이나 어른이나 노인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나 힘없는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목사나 승려나 예외가 없습니다. 올 3월 6일 내장사 대웅전이 불이 나 다 타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스님이 함께 생활하던 스님들이 서운하게 해서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불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도를 닦아도 서운한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충성을 다해 섬겼던 상관이 다른 사람은 다 악수하는데 자신만 빼어 놓아도 서운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 한마디에 서운해 할 수 있고, 연인도 사소한 일로 서운해 헤어질 수 있으며, 직장인도 서운해 그 감정에 빠져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서운함이란 시시각각 장소와 나이에 불문하고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인데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서운함이 시한폭탄으로 변형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서운한 감정을 극복하면 대인 관계는 원만하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서운함이 쌓이면 이별이 되지만 서운함이 녹으면 사랑은 더 돈독해집니다. 대인 관계의 최대의 적인 서운함의 노예가 되면 정서는 지쳐 수렁으로 들어갑니다. 서운한 감정을 잘 해소하면 사랑이 더 돈독해지지만 잘못 폭발하면 사랑한 것만큼 미움의 에너지로 방출됩니다. 부부가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서운함으로 이혼할 수도 있습니다. 의외로 작은 서운함이 관계를 파괴하고 행복한 인생을 무너뜨립니다. 먼 사막 길 걸어온 사람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맹수나 더위나 전갈이나 추위보다 끊임없이 신발 속으로 들어와 발을 상하게 하던 모래였다는 말처럼 서운함이 사소한 감정 같지만 잘 치유하지 못하면 부부관계를, 친구 관계를, 부모 자식 관계를, 형제 관계를, 목회자와 교인과의 관계를 불편하고 불행한 관계로 만들어 버립니다. 대인 관계를 파괴하는 서운함과 섭섭함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서운함을 덮어 버려야 치유됩니다.
왜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서운해 하고 있습니까? 29-3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큰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했는데, 집나 간 동생에게는 송아지를 잡아 잔치해 주고 자신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친구들과 즐겁게 잔치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과 관심을 받을 만한 상대에게서 그것들을 받기를 기대했는데, 충분히 받지 못했을 때 섭섭함을 느낍니다. 서운하다는 말은 뭔가 마음에 차지 않을 때,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의 교류에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사물이나 상황에 대하여 서운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서운함은 첫째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의 반응에 나타납니다. ‘어그러진 기대’ 때문입니다. 100을 주었는데 30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대하지 않았으면 서운할 일이 없을 텐데, 기대했기 때문에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거나 그 기대에 반하는 일이 일어날 때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기대하지 않았다면 서운함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운함은 기본적으로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심, 사랑을 받고 싶은 욕심에 기반을 둡니다. 연애하는 젊은 남녀가 처음에는 잘해 주다가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을 때 서운해합니다. 아픈 부모를 모실 때 자신은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하는데 다른 형제는 한 달에 한 번도 찾아뵙지 않으면 형제들에게 서운해합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한 평생 살았는데 한 달에 한 번도 전화하지 않는 자식들을 보며 서운해합니다. 아내가 시댁 식구들과 갈등이 있을 때, 남편이 자신의 편을 들어 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헌신했는데 매번 상사와 동료, 후배들에게 무시를 당하면 서운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왜 나에게 이런 대접을 하느냐고 서운해합니다.
서운해하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만 따돌려다고 서운해하는데,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소외시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을 위해 하루 잔치해 주는 것을 보며 너는 서운해하는데 너는 나와 항상 함께 하는 잔치에 있는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종으로 살았다고 하는데 너는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내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자신을 공평하게 취급해 주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는데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빼앗길까바 서운해 하는 큰아들을 ‘얘(테크논)’라고 호칭하는 것은 아주 애정어린 호칭입니다. 아버지는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과 질고 어려움을 겪으면 내가 얼마나 주를 위해 살았는데 왜 아프냐고 왜 가난하냐고 왜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왜 인정해주지 않고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서운해합니다. 서운함을 치유받으려면 기대에 맞지 않은 결과에 대하여 서운해하지 말고 그 외에 풍성하게 주신 은혜를 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에 비하면 조금 잃어버린 것, 조금 무시 받는 것, 조금 인정받지 못하는 것, 조금 사랑받지 못하는 것 별거 아닙니다. 영원토록 함께하시고 영원한 천국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면 서운함보다 감사가 넘치고 감사가 넘치면 관계의 서운함은 치유되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와 서운함을 쌓은 방법은 크게 세 가지라고 말합니다. 첫째 감사는 감사대로 서운함을 서운함 대로 쌓은 방법입니다. 둘째는 감사와 서운함을 더하는 방법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쌓이면 서운한 마음은 달아납니다. 우리의 마음의 감정을 10으로 잡을 때 감사한 감정이 8이 있습니다. 10개 일어난 일 중 8개는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2개가 서운한 일입니다. 그러면 8개 중 2개를 빼면 아직도 감사한 것은 6개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운한 마음은 사라집니다. 셋째는 감사와 서운함을 곱하는 방법입니다. 더하기를 하지 않고 곱하기를 하면 +8에 –2를 곱해 버리면 –16이 되어 버립니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도 서운한 감정을 집어 넣어 유혹했듯이 오늘날도 그 무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2,3)”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동기는 작은 ‘서운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구절입니다. 선악과를 보면서 아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선악과를 주시지 않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게 맞나? 혹시 아까워서,,,”라고 생각할 수있습니다. 섭섭마귀에 걸리면 오늘날도 동산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그것 하나 안준다고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작은 서운함을 사탄이 낚아 채어 문제를 키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버립니다. 사울왕이 왕인데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 하나로 서운함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 작은 서운함이 하나님과 관계를 깨는 쐐기로 작용하게 하여 결국 그 서운함이 시한 폭탄이 되어 인생을 망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서운함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섭섭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서운한 감정을 집어넣어 관계를 망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분열시켜 버립니다. 100가지 잘해 주었는데 1가지 잘못해 준 것으로 서운해하며 관계를 절단시켜 버립니다. 자식이나 배우자나 친구나 목회자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면 “내가 어떻게 해 주었는데 저 사람이, 저 자식이, 아버지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저 사람이, 저 자식이, 아버지가 얼마나 나에게 그동안 잘해 주었는데”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동안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데”라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나이가 많은 수록 자꾸 서운한 감정이 든다고 하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서운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 중에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행 1:17). 유다가 돈 궤를 맡았습니다( 요 12:6, 13:39). 그러나 그는 은화 30개를 받고 당시 예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그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22:3;요 13:2).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요12:4-6) 3백 데나리온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여인을 책망합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라고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둘째는 서운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눌 때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근심하며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마26:23-25)”라고 했습니다. 그때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섭섭한 것입니다. 서운한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충고가 서운한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충성 봉사하던 사람들이 목회자의 자신을 칭찬해 주지 않고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들으면 서운한 것입니다. 섭섭마귀의 올무에 걸리면 목회자를 비난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감사와 서운함의 곱셈 법칙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의 끝이 안 좋은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동안 월급받고 자식 가르친 것은 다 잃어버리고 대우 잘 안 해 준다고 서운한 감정을 가지면 좋지 않은 결과로 끝이 나버립니다.
죽을 때까지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시며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면 서운한 감정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 못합니다. 바울은 노년이 되었을 때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대부분 사람이 다 떠나 버렸습니다. 마가가 1차 전도 여행 때 힘들다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서운한 마음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바울은 마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청산합니다.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은 마가에 대해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 때문에 내가 더 성숙해지고 결과적으로는 유익하게 되었다는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해석하면 감사로 얼마든지 서운함을 덮어 버릴 수 있습니다.
2. 서운한 감정을 정직하게 창조적으로 표현하여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서운함 감정은 첫째는 사랑과 관심을 받을 만한 상대에게서 그것들을 받기를 기대했는데, 충분히 받지 못했을 때 섭섭함을 느낍니다. 둘째는 서운한 감정은 어떤 노력과 수고, 희생과 헌신을 했는데, 충분한 칭찬과 보상을 받지 못했을 때, 섭섭함을 느낍니다. 셋째는 서운함은 서로 받아들이는 해석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서로의 진실한 마음과 상황을 이해 못해서 생길 경우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는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신 분이시고(12). 아버지는 풍족하신 아버지이시며(17). 아버지는 언제나 기다리시는 아버지이며(20). 아버지는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인 것(22-24)을 모르니까 자신을 푸대접한다고 서운해하는 것입니다.
서운함은 섭섭함을 느끼게 한 그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고 확대해석한 후, 스스로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존재로 느끼고 거부나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동생을 위해 잔치해 주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서 차별대우한다고 생각하고 서운해하는 것입니다. 서운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이렇게 힘든데 하나도 안 도와주니 섭섭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싫어한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생일인데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죠? 너무 섭섭해요.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죠.” “어떻게 키웠는데 … 고맙다는 표현도 없으니 섭섭하죠.” 어떤 상황이 오면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서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랑이와 암소가 너무나 사랑하여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세월이 흘러 신혼의 단꿈이 사라져가던 어느 날, 드디어 참고 참던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 폭발했답니다. 호랑이는 "너는 왜 나를 사랑한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니?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맛있는 고기를 볼 때마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너에게 가져다주었건만 어째서 너는 너만 위하고 이기적이니?"라고 했고, 이 말에 암소는 "뭐라고? 내가 이기적이라고? 너야말로 왜 그렇게 너밖에 모르니?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해주었는데. 맛있는 풀이 생기면 모조리 너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왜 넌 나를 사랑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거니?" 라고 반박했답니다.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 원망으로 바뀌고 결국에는 서로 오해만 쌓인 채 '우리가 정말 사랑하긴 한 걸까?'라면서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서운해할 수 있습니다.
욥도 하나님께 서운하고 친구들에게 서운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며 경건하게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잃고 자식들을 잃고 자신도 질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대접을 하느냐?”고 서운해 했습니다. 친구들이 와서 죄를 회개하라고 정죄합니다. 친구들에게 “왜 죄없는 나에게 이런말을 하느냐?”고 서운해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연단을 통해 정금처럼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서운해했습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살았습니다. 자식을 준다고 했는데 25년이 지났는데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99세에 자식을 준다고 하니까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섭섭한 것입니다. 과정 가운데 약속을 성취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계획을 세워놓고 개인 개인에게 과정을 통과하면서 인격적인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세워놓은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려 이스라엘에 갔는데 선지자가 요단강에 몸을 씻으라고 하니까 서운해합니다. 선지자의 의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이 바로 오시지 않았다고 서운해 합니다. 언니 마르다도 섭섭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이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정확하게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운한 감정이 늘 찾아옵니다. 이해 못 할지라도 서운한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감정이 죄가 되지 않도록 창조적으로 처리를 해야 합니다.
서운함은 발전단계가 있습니다. 태동기가 있습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약간 섭섭함이 발생합니다. 약간 찝찝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 단계가 지나면 자각기가 다가옵니다. 섭섭한 마음이 하나 둘 쌓이게 되면 자신이 섭섭한 감정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왜 저 사람이 섭섭하게 할까를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가 아니면 저 사람이 나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그런가? 아니면 저 모습이 본래 저 사람의 모습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단계로 표현기에 들어갑니다. 섭섭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분노, 불화, 시기 질투, 미움, 분쟁 등으로 확대됩니다. 이때 서운한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파괴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입니다. 큰아들을 보십시오. 2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분노합니다. 서운함이 분노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결과 들어가지 않습니다. 단절해 버리는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게 제사를 드렸는 데 동생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동생에게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서운함을 해결하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그렇게 사랑한다며 당신 없이는 못살겠다는 사람들이 증오하며 헤어집니다. 죽는 날까지 만나기 싫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당신이 천국가면 자신은 지옥에 가겠다고 평생 증오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불행하게 삽니다.
둘째 방법은 자신을 향해 해소하는 방법입니다. 스스로 돌아보며 성찰하면 섭섭함은 자신을 성숙시키는 도구가 되지만 감정의 응어리를 쌓아 놓으면 병이 됩니다. 감정의 응어리는 시간 가면서 더 단단해지고, 꽁한 감정은 한이 되어 버리고 뒤늦게 표현하려고 하면 억눌렸던 감정이 상대를 비난하고 공격함으로 폭발해 버립니다. 힘이 없을 때, 상대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서운한 감정을 자신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 것입니다. 분노로 쌓이게 되고, 억울함으로 쌓이게 되면 그것이 상처가 되고 정서의 병이 됩니다. 그 서운한 감정이 렌즈가 되어 그와 유사한 상황이나 유사한 사람을 만나면 정상적인 감정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을 정서적으로 병들게 하고 대인관계를 정상적으로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스스로 고립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입니다. 서운한 감정은 불필요한 공기가 가득 들어간 풍선처럼 마음속에 쌓아 놓으면 그것이 부풀려져서 나중에서 펑하고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창조적으로 표현하여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큰 아들처럼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29-30절에 아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섭섭한 감정을 아버지에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반화시켜 말하면 안됩니다. 서운했던 실제 사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신혼 때는 매일 설거지를 도와주더니 지금은 설거지를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아 서운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중심으로 너 전달법으로 상대를 정죄하지 말고 나 전달법으로 솔직한 감정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요구사항을 정확히 말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의무적 관계가 아니라 자발적 관계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 100% 없습니다. 조금씩 손해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주었다고 반드시 돌려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기대를 상대가 알아서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욕심이 내면에 있기 때문에 서운해하는 것입니다. 표현해야 합니다.
엘리야도 서운한 감정이 들 때 하나님께 나아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이겼는데 이세벨이 여전히 자신을 죽이려고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섭섭해서 저들에게 잡혀 죽기 전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워 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위로하고 사명을 주어 일하게 했습니다. 서운함으로 주어진 사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명은 환경 탓으로 포기할 것도 아니고, 상대의 평가에 목매여 끌려갈 것도 아닙니다. 서운함도 얼마든지 창조적 에너지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온갖 서운함을 다 당하면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 구속 사역을 다 감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는 것처럼 서운함은 파괴적 에너지가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로 바꾸어질 수 있습니다. 서운한 것이 있으면 표현하여 해결함으로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 보혈의 사랑으로 서운함을 덮어 버려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서운해하는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해 주십시까? 3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섭섭해하는 것보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나나입니다. 큰아들이나 아버지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섭섭하기로 하면 큰아들보다 더 아버지가 서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재산 1/3을 나가서 탕진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나간 아들입니다. 가장 마음 아픈 사람은 큰아들보다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도 섭섭해하지 않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당위의 원리입니다. 형제관계, 부자 관계는 거래 관계가 아니라 한 몸이 된 사랑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손이 아프면 눈도 아픈 것이고 이가 시리면 위도 고달픈 것입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관계입니다.
왜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까?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잃었던 아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고 서운한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모두가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은 동생을 어떻게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삼켜버린 아들입니다. 살진 송아지가 아니라 하인이 먹는 음식도 주기에 아까운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과분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충성스럽고 성실한 아들이지만 살진 송아지를 먹을만한 자격이 없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도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동생을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종도 당신의 동생이라고 말합니다(27). 아버지는 이 내 아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라고 기뻐합니다(24). 그런데 3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불결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방인, 창기, 세리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방인과 창기와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고 기뻐하니까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함께 즐거워할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타락했고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볼품없고 아무리 가정에 망신시키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 사랑해야 할 사람이고 함께 관계를 누려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서운하게 하는 남편도 하나밖에 없는 돕는 배필로서 남편이고, 아무리 서운하게 하는 자식도 내 몸같은 내 자식이며, 아무리 짐이 되는 부모가 있어도 나를 세상에 있게 해 주신 내 몸의 근원인 유일한 부모입니다. 서운한 대상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의 의무를 가져야 하는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큰아들은 29절에 아버지의 명을 어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서운해할 때는 자기는 완전한데 너는 왜 불완전하느냐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교만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하면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버립니다. 자기가 심판자가 되어 정죄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다말, 라합, 밧세바, 사마리아 여인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한 여인입니다. 라합은 기생이고 창녀입니다. 밧세바는 남편 몰래 왕과 잠자리를 한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 번 갈아치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100%로 베푸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사랑하면 서운해할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받을 것을 상정해 놓고 베푸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돌려받기 위해 잘해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빌려준 것을 돌려 받아야 하기 때문에 돌려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식에게 해 준 것은 그저 베픈 것입니다. 부모에게 해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아내에게, 남편에게 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잘해 주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같아 두려워서 한 것이 아닙니다. 잘해주어도 못 해주어도 떠날 사람은 떠나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나 부모 형제는 잘해두던 못 해주던 떠나는 관계가 아닙니다. 다 천국에 가서 살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로 한 형제 자매된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형제, 부모관계를 거래로(give-and-take) 생각하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이 베푼 정 때문에 서운해합니다. 거래로 생각하기 때문에 100을 주었는데 100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서운해합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중요하게 여긴 만큼 상대가 자신을 중요하게 여지기 않으면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서운함과 섭섭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감정은 억울함으로 발전하고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게 합니다. 서운함은 가족이나 친구를 통해 입는 상처의 원인이 됩니다. 내가 너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너는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상대와 정을 주고 받았는데, 어느 날 받은 정만큼 받지 못할 때 서운해지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다른 이유로 깰 때, 다른 일을 하다 약속에 늦을 때, 밥값을 내는 것을 아까워할 때, 대충 생일 선물을 사올 때, 꼭 알려줘야 할 것을 제삼자를 통해 들었을 때, 자신이 대 놓고 우선순위에서 밀릴 때, 자신를 배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할 때 서운함과 섭섭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서운함이 치유되지 않으면 억울함으로 억울함은 복수심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큰아들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서운한 것입니다. 동생보다 아버지가 자신을 중요하게 여겨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운한 감정은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드는 것이 아니라 정은 많이 쏟은 사람에게 듭니다.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잘 대해 주었던 사람, 사랑했던 애인, 부모, 자식, 부부, 형제, 일가친척, 친구, 존경하는 선생님, 자신이 섬기는 목사님 등에게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서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손이나 발이나 한 몸입니다. 손도 나이고 발도 나입니다. 이미 베풀면서 충분히 만족과 행복을 누렸습니다. 아이들을 기를 때 얼마나 행복해했습니까? 노년에 자식들이 잘 못해 준다고 서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베푼 것으로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면 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서운함을 경험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다 배신하고 떠날 때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베드로가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갔을 때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얼마나 서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못 하시는 게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하필 아들을 십자가의 대못에 박아 죽이려고 하시는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으실 텐데, 죄인을 위해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만 바라보고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당하는 수많은 서운함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서운해 하는 우리에게 “힘들지. 나도 알아. 나도 너와 똑같이 서운했어. 나도 외롭고 고통스러워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했어. 언제까지냐고 서운해하고 있지, 나도 정말 괴로워 죽을 것 같았어. 그래서 산에서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밤새워 피땀 흘리며 기도했어, 서운하면 기도해, 괜찮아. 힘내. 모든 서운함을 다 겪었던 내가 있잖아. 내가 너를 이해하잖아. 내가 영원토록 너와 함께 하잖아, 내가 너를 도와줄게. 괜찮아. 서운함으로 관계 포기하지 마, 서운함으로 사명 접지마”라고 오늘날도 말씀해주시고 있을 줄 믿습니다.
서운한 감정을 어떻게 치유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서운함을 덮어 버려야 치유됩니다.
서운한 감정을 창조적으로 표현하여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서운한 감정은 그리스도 보혈의 사랑으로 서운함을 덮어 버려야 치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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