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3) 파괴적 수치심 치유
요한복음4:28-30
오늘은 치유 세 번째로 파괴적 수치심 치유에 대하여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제가 5가지 질문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 성도님들이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어느 정도 수치심을 느꼈는지 주보에 1.2.3.4로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면 1번, 조금 그렇다면 2번, 많이 그렇다면 3번 매우 많이 그렇다면 4번으로 적어 주시면 됩니다.
1. 방에서 몰래 청소년 불가 영화를 보다가 부모님에게 들켰다.
2. 부모님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학교 학부모 모임에 오셨다.
3.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4. 선생님이 수업료를 못 낸 아이들 이름을 불렀는데 내 이름도 불렀다.
5. 걸어가다 바지가 내려가거나 스타킹이 구멍 난 것을 보고 웃는 사람을 발견했다.
20점 중에 몇 점이나 나왔나요? 수치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수치심이 적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지 못하다고 스스로 부끄럽게 느끼는 감정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수치심은 ‘몹시 부끄러운 마음’으로 타인에게 노출되어 실제 경멸, 무시를 당할 때 혹은 가상의 부정적 판단을 받았다고 느낄 때 경험되는 불쾌한 정서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당혹감을 주고, 죄책감을 주며, 굴욕감과 모멸감을 주는 것이 수치심입니다. 혼자 방에 있다 넘어지면 별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야구 시구를 하다 넘어지면 수치심을 느낍니다. 혼자 방에 있다 바지가 내려가면 수치심을 느끼지 않지만 길을 걸어가다 바지가 내려간 것을 알게 되면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어릴 때를 뒤돌아보며 생각해 보십시오. 쓰리고 아픈 수치스러운 경험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급하여 여자 화장실인 줄 모르고 들어갔다가 수치심을 느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길을 가다 손수레를 끌고 오는 장사하는 아버지를 만나 수치심으로 피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오줌을 싸고 키를 들고 남의 집에 소금을 받으러 갔던 수치스러운 기억을 가진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수업료를 못 내 교실 밖에 서 있던 수치스러운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식권이 없어 밥을 먹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외모와 체형에 대하여, 돈과 직업에 대하여, 부모와 가정환경, 자녀교육에 대하여, 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 영적 건강에 대하여, 장애, 성적, 중독, 성적 욕구에 대하여, 나이 듦과 트라우마, 오해 등에 대하여 여러 가지 수치심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수치심이 있지만, 수치심은 크게 유익한 수치심과 해로운 수치심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창조적 수치심과 파괴적 수치심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창조적이고 유익한 건강한 수치심은 말 그대로 건강한 인격의 사람이 느끼는 감정으로서의 수치심을 말합니다. 죄를 지으면 당연히 느끼는 수치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창2:25). 그러나 죄를 지으므로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고(창3:7) 숨었습니다.
<수치심의 치유>라는 책을 쓴 존 브래드쇼(John Bradshaw)는 건강한 감정으로서의 수치심을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건강한 수치심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수용하는 수치심입니다. 건강한 수치심은 우리가 인간이므로 저지르게 되는 실수나 한계를 허용하고 인정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에 방향을 결정하고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인격이 뛰어난 사람을 만났을 때 부끄러움, 학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왜 이정도 밖에 되지 못할까라고 생각하는 부끄러움은 건전한 수치심입니다.
두 번째는 당황함을 느끼는 수치심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비밀이나 신체적인 부분이 노출되었을 때 우리는 당황함을 느낍니다. 당황함으로 느끼는 수치심은 아주 자연스럽고 건강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부끄러움의 수치심입니다. 이 수치심은 말 그대로 특별히 낯선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느끼는 어색한 감정입니다. 이때 느끼는 수치심은 우리가 외부에 노출되거나 낯선 사람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게 해주는 경계선 역할을 해준다고 합니다.
네 번째는 공동체 형성을 위한 수치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형성과 돌봄,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 또한 다른 이를 돕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수치심의 경험을 통해 인간이 공동체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발달단계로서의 수치심입니다. 보통 사람은 3살이 되면 처음 수치심을 느낀다고 하는데 인간은 모두 발달단계를 거치면서 수치심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치심은 생애 초기부터 발달된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서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는 영적 각성의 수치심입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영적인 욕구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한계를 깨닫는 것에 그치지 않고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실재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수용하는 수치심과 영적 각성의 수치심은 창조주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에 중요한 정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강한 수치심은 자신의 한계와 잘못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며 자신을 성장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합니다. 인간으로 지녀야 할 올바른 양심을 갖게 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도덕적 규범에 민감성을 갖게 하고 공유 가치를 존중하게 합니다. 반성적 행동을 하게하고 영적 각성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건강한 수치심은 다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반성하고 노력하게 합니다. 이런 수치심을 모르면 사이코패스가 됩니다. 사이코패스는 죄책감, 양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연쇄살인범, 상습 성폭행범 뿐 아니라 변호사ㆍ의사ㆍ대기업 간부 등 사회 상류층에 속하는 전문직 종사자에게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정서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후회나 죄책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과대 망상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들을 향해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고 말씀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수치감을 느끼는 것도 복입니다.
파괴적이고 해로운 수치심은 정체성으로서의 수치심입니다.
해로운 수치심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수치스러워하게 되는 정체성으로서의 수치심을 말합니다. 수치심이 정체성 즉 성격의 핵심이 되는 경우입니다. 수치심의 상황에 감정의 기능이 멈춰서 아예 성격 스타일 자체로 굳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맨날 투덜대는 사람, 늘 부정적인 사람, 만나면 불평과 원망을 하는 사람, 날마다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항상 슬픔에 젖어 사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특정 감정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어 그런 성격, 성향의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수치심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을 가다 바지가 내려왔던 수치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면 모욕감, 수치감을 받습니다. 혐오적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수치심에 묶여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신경 써서 허리띠를 졸라맵니다. 존재 중심에 수치심이 자리 잡고 늘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맞춥니다. 언제 또 내려 갈까 불안해합니다. 이런 것을 강박증이라고 합니다. 강박증이 생겨 바지를 살 때 다른 좋은 바지도 많은 데 늘 허리띠 튼튼한 특정 바지만 사게 됩니다. 도착증, 집착증이 생겨 나는 바지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스스로 낙인찍고 비하해 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경험을 통해 수치심이 내면화되어 자신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낙인찍어 버리는 것을 병적 수치심, 파괴적인 수치심, 해로운 수치심, 내면화된 수치심, 신경증적 수치심, 핵심 수치심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문제가 있고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가난은 부끄럽다. 장애는 수치스럽다. 실패는 창피하다” 등과 같은 사회적 편견에 의해 편견적 수치심을 가지고 살면 과거의 수치를 숨기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이중인격이 나타나 진실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이에 대해 존 브래드쇼는 수치심이 인간 내면에 형성되는 과정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처음으로 수치심이 내재된 사람에게 양육을 받아 수치심을 학습하여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 사람과 똑같아지는 경우입니다. 수치심이 내면화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면 그 아이들은 부모와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키워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완벽주의를 추구하다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자신도 완벽주의적 수치심에 빠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작은 실수에도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종종 열등감에 빠져 자학하게 만들어 버리고 조금만 수치스러운 것이 드러나면 그것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릴 적에 버림받고 학대받은 충격으로 인해 감정과 욕구, 동기가 수치심에 묶인 경우입니다. 어릴 적 양육자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거나 누군가에게 학대를 받게 되면 그 상처와 충격으로 인해 참 자기에 대한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른 어떤 상황과 감정을 배재하고 수치심의 경험만이 내재화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수치심이 드는 기억들이 내면화되어 악순환으로 작용하는 경우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꿈에서 어릴 적 수치스러운 경험이 나타난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느꼈던 모든 감정이 우리의 무의식속에 기억되고 저장된다고 합니다. 수치스러웠던 경험도 예외가 아닌데 특정한 사건이나 행동으로 인해 수치심을 느꼈던 감정들이 무의식 속에 저장되는데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경우 그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위 세 가지의 수치심이 내면화하게 되면 자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쉽게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부모가 바람피워 자신에게 수치심으로 내면화되면 더 이상 감정적인 수치심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수치적 경험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은 나쁜 사람이며 부적절하고 흠이 많고 무가치하며 쓸모없는 존재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과거 수치스러운 경험을 개인의 기본적 본질로서 확장하여 수치심의 안경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집니다. 타인의 칭찬이나 격려도 거짓으로 듣거나 자신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알게 되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희생하거나 상대방을 희생시킵니다. 수치를 방어하고 숨기려고만 합니다. 자기 경멸을 합니다. 완벽주의자가 됩니다. 자기 소외와 고립을 만들어 세상으로 도피합니다. 중독의 중심요소로 작용합니다. 심하면 분노 장애, 우울증, 인격 장애, 감정 장애, 불안, 강박 신경증, 정신분열증, 약물 남용, 편집증에 사로잡힙니다. 수치와 오욕스런 경험들을 혼자만 간직하며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자신이 만들어 낸 가면 뒤에 숨기도 하며 체면을 중시하며 역설적으로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로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내면은 항상 공허하고 수치심의 노예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존 브래드쇼는 그의 책 <수치심의 치유>에서 해로운 수치심을 악마 같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해로운 수치심이 뿌리 깊이 자리를 잡으면 병적인 수치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병적인 수치심은 우리를 파괴하고 끌어내리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즉 내가 한 가지 일을 잘못했다면 나라는 사람 전체가 곧 무가치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결론은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적 수치심은 우리의 삶 전체를 꿰뚫는 만성적 질병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병신 같은 자식, 겨우 그것밖에 못 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란 소리를 듣고 그 수치심을 평생 지우지 못하고 그 말에 발목 잡혀 자신의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단정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제자훈련을 시키며 어머니가 둘인 형제와 자신의 형은 서울 대학에 들어갔고 자신을 형보다 공부를 못해 아버지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 수치심의 노예가 되어버린 성도님을 만나 치유하려고 애를 썼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이 바로 파괴적인 수치심의 노예가 되어 멍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거쳐 가면서 평생 수치심으로 정상적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남들을 만나는 것이 수치스러워 남들이 물을 길지 않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우물에 나왔습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숨기는 것에 온통 마음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파괴적인 수치심을 치유 받고 부끄러워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랑하는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파괴적인 수치심을 치유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파괴적인 수치심을 치유 받으려면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경험을 하는 그때 그 모습을 보고 그게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떤 수치스러운 경험을 하는 우리를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치스러운 경험과 자신을 분리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릴 때 코흘리개였다고 어른이 되어서도 코흘리개는 아닙니다. 어릴 때 오줌싸개였다고 장로님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오줌싸게가 아닙니다.
16절에 보면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합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내 남편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말을 옳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과거 결혼하여 남편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식 남편이 아닌 자로 사는 여인입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수치스러운 경험을 했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타인의 평가에 의해 수치심으로 시달리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수치스러운 경험을 하면 자기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해 버립니다.
수치의 경험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치 경험을 곧 자신이라고 생각해 버려 자신의 수치가 자기의 정체감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낙인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이 여인의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보십시오. 9절을 보십시오. 물을 달라하는 예수님께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당시 문화는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여성들이 사람 대우받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물건처럼 취급하는 문화였습니다. 여인은 남자의 재산처럼 취급받은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여자는 남자의 사유재산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스 시대 대는 여자는 노예처럼 취급해야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했습니다. 16세기 때도 이런 풍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에게 투표권이 영국에서 허용된 것은 19세기부터입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 이름 없는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에게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이방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혼혈족이 많이 나온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지을 때 이들이 방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이지만 원수처럼 생각하였고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천대받는 지역의 여인입니다.
자신은 남편을 다섯이나 거친 수치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버림받고 육체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여인입니다. 수치심으로 사람들이 많은 때에는 물길러 나오지도 못하고 사람이 없는 한 낮에 우물가에 나와야만 하는 여인입니다. 수치스런 존재,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수치심의 노예로부터 완전하게 해결해 주시기 위해 찾아가신 것입니다. 오물 보듯 피하는 수치스러운 여인, 수치스러운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유다를 떠나 갈릴리고 가는 길은 두 길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지름길입니다. 베뢰아와 데가볼리를 거쳐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우회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멀지만 우회로를 택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수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물에 앉아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녀에게 물을 요구합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줄 수 있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대접을 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수치스러운 여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상종해 주지 않아도 예수님만은 상종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근거해서 자신을 평가하고 나의 존재 가치를 발견합니다. 수치심은 자기 평가 정서입니다. 어떤 경험을 긍정과 부정으로 평가하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파괴적인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근거해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도 그렇게 평가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수치 경험을 불명예의 수치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요7:35), 거라사 귀신들린 자(막5:1-20), 혈루증 앓은 여인(눅8:43), 세리 마태, 세리장 삭게오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러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리 수치스러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찾아와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딸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를 믿고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에 대한 자기 평가 감정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도 우리를 존귀한 자로 여기십니다. 우리는 과거 어떤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예수 안에서는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치심을 극복하려면 먼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과거 수치는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를 대신 죄값을 치르시고 돌아가셔서 내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내가 내 생명의 가치를 누구도 함부로 평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은 수치거리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수치는 남의 평가에 따른 자기 인식입니다. 남의 평가를 절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평가해 주시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마케팅 시장의 선전 문구의 평가보다,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친구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사43:4-5).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요3:16).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합니다(요15:14-15).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34:5)“
수치심의 노예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쓸모없는 존재, 열등한 존재, 거부된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부모의 적극적인 학대(구타, 욕설, 희롱, 성적학대), 소극적 학대(무시, 과잉보호, 방치, 비난) 비현실적 기대 등으로 자신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거부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수치심은 시작됩니다. 자신을 버림받은 존재로 받아들이고 자라서도 숨기고 싶은 가족의 비밀을 수치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어, 우리 집은 가난한 집이야, 나는 외모가 내 놓을 것이 없어, 나는 이혼한 사람이야, 나는 누구 앞에 말할 수 없는 직업은 가진 사람이야" 등 자신의 환경과 조건을 다른 사람 앞에 내놓기에 지극히 부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신앙인을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하며 우상 숭배하며 우상 장사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자랑스러운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야곱은 과거 형과 아버지를 사기를 친 수치스런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자랑스러운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과거 살인이라는 수치스러운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자랑스러운 민족 지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세리 삭개오는 세리라는 수치스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에스더는 어릴 때 부모를 다 잃어버린 수치스러운 가족 경험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입다는 첩의 아들로 태어난 수치스러운 태생 경험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들을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했습니다. 38년 된 병자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랑스러운 인생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다 하여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참으로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보고 계십니다. 산에 있는 쓸모없는 돌일지라도 위대한 조각가의 손에 붙들리면 위대한 조각품이 나오게 됩니다. 허름한 바이올린일지라도 위대한 음악가의 손에 붙들리면 참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다 낡은 붓일지라도 훌륭한 화가의 손에 붙들리면 사람을 감동시키는 작품이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수치스러운 인간을 영광스러운 인간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국의 비평가이며 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모래와 흙과 불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 사파이어가 될 수 있다 모래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오팔이 될 수 있다. 맨흙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 다이아몬드가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 16:3)"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의 평가를 들으며 스스로 수치스런 경험으로 인해 수치스런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치스런 경험과 자신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수치스런 경험이 있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한 자입니다.
2. 파괴적인 수치심을 치유 받으려면 고립과 숨김에서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께 내어놓고 예수님을 통해 수치심을 치유 받아야 합니다.
수치심을 가지면 사람들은 고립하게 됩니다. 숨기게 됩니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을 멀리하고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까 봐 관계를 가지지 않습니다. 자꾸 위장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아무도 만나지 않기 위해 정오에 홀로 물을 길으러 옵니다. 자신을 상대해 주는 예수님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와 대화하며 자신의 수치심을 예수님께 털어놓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만난 후 어떻게 변합니까? 28, 29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수치스럽게 보고 있는 동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수치심의 노예가 된 사람은 자신에게 수치심을 준 사람에게 분노를 가지게 되고 그들과 상종하기를 꺼려합니다. 파괴적으로 수치심을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최대한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진실성과 진지성이 없어집니다. 자신을 과대 포장합니다.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삶을 살게 만듭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큐티를 하며 나눔을 해도 자신의 속마음을 다 감추어 버립니다. 진실성이 없는 말 형식적인 말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 평생 수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그 문제에서 자유함을 받지 못합니다. 수치심은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숨기려 하면 더욱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고 밝고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우울하게 하고 침체되게 만들고 매사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지금까지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던 수치심으로 해방되었습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 마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만듭니다.(17)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주님께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저는 다섯 번 결혼하였으나 실패한 사람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제 남편이 아닙니다. 저는 상처투성이입니다. 모순덩어리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람입니다.
수치심은 자신의 죄의 결과로 생기길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자꾸 숨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수치심을 가리는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그옷은 조금 가면 마르고 헤어져 다시 수치심이 들어납니다. 하나님을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그들의 수치심을 가리어주었습니다. 그 짐승이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수치심을 완전히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수치를 다 당하였습니다.
수치심은 타인의 범죄의 대상 또는 희생물이 된 결과로 생기게 된 수치심도 있습니다. 더러운 것과 접촉에 의해 생기는 수치심입니다.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해 생긴 수치심입니다. 우리 주님은 죄가 있기 때문에 수치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고위 공직자들이 세상에서 그래도 도덕적으로 살았다는 사람들이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잘살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완벽주의 자들이 되고,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교만으로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자기 의를 증명하려고 하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 수치심일지라도 털어놓으면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에게 털어놓으면 올무가 될 수 있지만, 주님께 내어놓으면 깨끗하게 치유시켜 주십니다. 창조적으로 수치심을 해결하는 방법은 수치심을 은폐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공동체에 나 내어놓는 것입니다. 남 탓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치심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 부끄러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수치심도 주님 앞에 내어놓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벌거벗겨져 나무 위에 못 박혀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벌거벗겨진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힘없이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 했다고 조롱합니다. 따르던 제자들도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극악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형에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수치스러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하여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0장 11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13장 1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옷입니다. 평생 수치심의 노예로 산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부끄러운 수치심을 가려주는 분으로 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자신 대신 부끄러움을 당할 분이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끄러움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 분으로 믿은 것입니다. 부끄러운 모습이 있지만,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을 보십시오, 자기 죄를 솔직히 예수님께 고백하고 여인은 자신의 목마름을 깨달았습니다.(15) 영생의 물을 내게 주십시오. 저는 여기 이렇게 수치 때문에 몰래 물을 길러 오기 싫습니다. 영원히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이 저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놓다 보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발견합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9) 당신이라고 했습니다.(12) 그러나 그녀의 호칭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15절에는 주라고 합니다. 19절에는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29절에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안다는 것과 고백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것과 고백하는 것도 다릅니다. 사랑하여 결혼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으로 결혼한 것 아닙니다. 사랑의 고백을 하고 그 고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결혼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이 영혼 깊숙이에서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 입술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 나의 왕, 나의 주로 고백하고 시인하면서 우리의 수치심을 주님께 다 내려 놓으면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보이는 세계가 달라집니다. 수치보다 크신 예수님이 내 마음을 지배하면 인생의 수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수치와 비교하면 우리가 당한 수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만 그런 수치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 말고 수치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의 시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수치심도 주님이 우리를 부르는 도구입니다. 수치심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많은 수치심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께 내어 놓고 죄는 용서받고 수치심은 치유받고 잘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무리들에게 붙잡혀 못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간 마가였지만 그는 자신의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수치를 감당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수치스런 경험을 가진 베드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수치 문화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으로 평생 살았습니다.
3. 파괴적인 수치심을 치유받으려면 수치심을 파괴적 에너지가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보도된 여군의 죽음처럼 성추행을 당한 깊은 수치심은 일을 도중에 그만두게 해 버립니다. 의욕도 상실하게 하고, 회사도 그만두고, 가정도 포기하며, 꿈도 포기하고, 삶도 포기해 버리게 합니다. 운동선수가 감독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그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운동을 포기하고 삶을 포기한 경우도 언론을 통해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수치심을 자신을 향해 파괴적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신매매한 유다는 수치심을 견디다 못하여 죽음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디나가 성폭행당했을 때 그의 형제들은 수치심을 외부적으로 세겜 족속을 죽임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근원적인 수치심을 치유 받은 이 여인은 그 후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올바른 관계로 새롭게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수치심으로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자신과의 관계도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수치심이 파괴적 에너지가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 수치심을 치유받은 이 여인은 삶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타인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기피하던 동네 사람들에게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브라운에 의하면 좋은 관계를 맺음을 막는 가장 강력한 힘이 바로 수치심이라고 합니다. 그는 수치심은 기쁨이 오려고 할 때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완벽주의에 빠지게 하며, 감정을 무뎌지게 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세상은 수치심을 권하는 사회입니다. 언론을 통해 세상은 끊임없이 수치심을 강요하는 곳입니다. “너는 원래 그래왔어, 네가 아는 것이 뭐 있다고, 네가 하는 것이 다 그렇지, 너는 00도 사람이잖아, 00대학 나온 것이 뭐 한다고, 아버지 직업은 뭔데, 장애인이 뭐 한다고” 등 질책하고 모멸감 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제 그 수치심을 자극하는 세상에 담대하게 뛰어듭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신의 흠을 구태어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자신의 수치스런 조건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않습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습니다. 동네로 담대히 들어가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합니다. 누가 말을 걸까 두려웠던 사람입니다.
수치심을 파괴적으로 푸는 사람은 수치심의 안경을 쓰고 냉소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수치심으로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가족도 만나길 싫어합니다. 수치심의 노예가 되면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스스로 움추러 듭니다. 사람을 기피합니다. 숨고 숨고 숨다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으면 심하면 자살해 버립니다. 모 기업사장처럼 한강에 투신 자살해 버립니다. 모 기업 대표처럼 산에 들어가 자살해 버립니다. 부산 시장이, 전남도지사가, 파주시장이, 서울 시장이, 유명 국회의원이, 전직 대통령이 수치심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파괴적 해결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수치심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죽음으로 수치심에서 자유로운 수 있지만, 사랑하고 마지막까지 보호하고 싶었던 가족에게 더 큰 수치심을 남겨 놓게 됩니다. 우리는 수치의 경험을 수치로 끝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 대하여 바른 관계를 가집니다. 이제 자신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기며 숨지 않습니다. 당당해집니다.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수치심 때문에 몰래 들고 가던 물동이를 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안 것입니다. 용기 있는 결단을 합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사람은 연약하여 실 수 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자아는 늘 이상적인 자아가 되지 못합니다. 자신의 기대에도 남의 기대에도 못미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치스런 환경을 만나 자신감 없이 살 수 있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수치스런 일을 만들어 평생 수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사명으로 일어납니다.
어느날 살다 보면 누구나 수치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치가 수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사명감을 가지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수치스럽게 평가하는 그들에게 담대히 나아갑니다. 수치적 경험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창조적으로 쓰임만 받으면 더 큰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나 해결받고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과거가 인생의 발목을 잡지 않았습니다. 수치심으로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패배 의식을 갖고 사람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저히 부끄러워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던 여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피해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그들에게 나아가 말합니다. 과거 남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수치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수치심을 완전히 해소해 주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면 우리 주님 다 용서해 주십니다. 다윗 보십시오. 간음죄를 짓고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왕으로 얼마나 수치스런 일입니까? 그것 숨기고 살았으면 평생 수치심의 종이 되었을 것입니다. 위선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 앞에서 깨끗이 회개하였습니다. 내가 수치심 숨기고 붙들고 있다고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다 고백하고 용서받고 새롭게 살아가면 됩니다. 자기 인생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나의 수치심을 제거해 주신 주님을 자랑하며 됩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 43:25)"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수치스런 경험 때문에 자신감을 잃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다 용서 받고 자신감을 가지고 일어 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면 우리는 수치심을 파괴적으로 푼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해결하며 일어난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치심을 삶의 유익을 위한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감정엔 힘이 있습니다. 수치심도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파괴적인 힘으로 발산될 수도 있고 창조적인 힘으로 발산될 수 있습니다. 수치심은 도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하면 도피처를 찾게 되고 그 도피처가 중독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중독이 되면 잠깐 수치를 잊을 수 있으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취를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일중독에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알코올을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아 알코올 중독에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를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아 관계 중독에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증오합니다. 수치심이 있으면 다른 것을 도피처로 삼아 그것에 중독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에너지로 수치심을 활용해야 합니다. 남편 다섯이나 두어 그 수치심으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없었던 여인은 그 수치심 때문에 예수님 만나 수치심에서 해방되어 온 동네에 돌아다니며 메시아를 전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을 때 우리의 수치도 함께 지고 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히브리서 12:2).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낸 이지선 교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2000년 7월 30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취 상태의 운전자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화상을 입었답니다. 소생 불가능한 상태에서 살아나 수십 번의 수술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자신의 외모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답니다. 눈썹이 없습니다. 손톱도 없습니다. 그런데 눈썹이 없으니까 눈썹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고, 손톱이 없으니까 손톱이 있을 때는 몰랐던 손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더욱 공부를 하여 유학을 하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수치심을 파괴적으로 사용했다면 온갖 상처투성이로, 만취상태로 운전하여 사고를 낸 그 사람을 평생 원망만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을 한탄하여 수없이 자살을 시도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외모에 대한 수치심으로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장애우와 인생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선아, 내 사랑하는 딸아, 내 너를 세상 가운데 세우리라. 아프고 병든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하리라!”라고 하시는 내면에 들려오는 말씀을 들었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모든 수치를 가리고 과거의 수치심을 창조적 에너지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회복될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파괴적인 수치심을 어떻게 치유받을 수 있겠습니까?
첫째 파괴적인 수치심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치유받으려면 수치스러운 경험과 자신을 분리시키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경험이 있다고 해도 우리를 위해 수치를 다 당하신 예수님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둘째, 파괴적인 수치심을 치유받으려면 고립과 숨김에서 나와 수치스러운 경험을 예수님께 나와 다 내어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해야 할 수치를 다 십자가에서 받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수치를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치유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모든 수치심을 예수님을 통해 치유받으시길 바랍니다.
셋째, 파괴적인 수치심을 치유받으려면 수치심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창조적 에너지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수치심으로 왜곡된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관계, 나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일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하고 수치심이 사명을 이루는데 쓰임 받고 예수님 때문에 깊은 수치심이 자랑거리가 되는 인생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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