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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남(1) 일어나 걸으라(행3:1-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208 추천수:0 220.120.123.244
2020-01-05 03:59:00

일어남(1) 일어나 걸으라

행3:1-10

 

2020년 새해가 시작되어 첫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이곳에 교회를 건축하고 11년째 되는 첫주일 예배입니다. 분당에서 23가정이 이곳에 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10년 동안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와 함께 섬기는 교인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는 2020년 1월 1일 새해 출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이곳에 와서 첫 예배를 드리며 붙잡았던 이사야 60장 1-5절 말씀을 다시 전해드리며 세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11년째가 된 올 한 해를 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일어나자고 했습니다. 둘째는 빛을 발하자고 했습니다. 셋째는 눈을 들어 사방을 보자고 했습니다. 올 한 해 이런 복을 누리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개인도, 가정도, 기업도, 교회도, 우리 민족도 일어나야 합니다. 1월 달은 일어남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말씀드릴 것입니다. 오늘 첫주일은 첫 번째 일어남으로 “일어나 걸으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깊이 읽어 보면 6절을 중심으로 세 가지가 대칭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앉은 뱅이 삶과 예수 믿고 일어남 삶이 세 가지로 아주 대조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서 일어나 걸어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올 한 해 앉은뱅이 인생에서 걷고 뛰는 인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2,7,8,9).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라고 말씀합니다. 태생적 지체 장애인입니다. 선천성 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10살 때부터 기분 나쁘거나, 걷기가 싫거나, 어쩔 수 없이 안 걸을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걸으려고 해도 걸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의 재산으로도, 의학적 기술로도, 자신의 신념이나 노력으로도 어쩔 수 없이 앉은뱅이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몇 년을 걷지 못했습니까?

4장 22절을 찾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40여 세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 평균수명은 83쯤 됩니다. 1900년대까지만 해도 인간 평균수명은 남자가 48세, 여자가 51세였다고 합니다. 지금 이분이 산 때는 아마 33년부터 40년 사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당시 평균연령으로 보면 거의 인생을 다 산 사람입니다. 노년에 이르도록 한 번도 일어나지도, 앉지도, 서지도, 뛰지도 못한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도 가난을 벗어나고 싶은데 한 번도 경제적으로 일어나지 못한 성도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을 벗어나고 싶은데, 위장병에서, 관절염에서, 통증에서, 당뇨에서, 고혈압에서, 심장병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여전히 건강의 앉은뱅이로 주저앉아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느 날 문득 찾아 온 병입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습관을 고쳐 보고 싶은데 여전히 앉은뱅이로 주저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을 해치는 술과 담배로 여전히 앉은뱅이로 살 수 있습니다. 어느날 주어진 정리하지 못하는 습관, 남을 허물을 보고 비판하는 습관, 늘 시기와 질투로 바라보는 습관, 늘 부정적으로 말하는 습관,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습관, 게으른 습관, 스마트 폰이나 영상에 중독된 습관 등으로 고쳐 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앉은뱅이가 되어 버린 성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불행하게 하는 이런 것들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 사람은 40여년 동안 앉은뱅이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뛰게 되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것입니다. 자신을 40년간 할 수 없었는데 자신을 앉은뱅이 자리에서 일어서게 만들어 줄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도의 사람들이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여기 올라갔다는 말은 어느 날 우연히 한 번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아네바이논”은 문법적으로는 미완료 과거 형태로 계속 이루어지는 동작 습관적 동작을 말합니다. 기도하려 매일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매일 세 번 기도를 했습니다. 제 3시, 6시, 9시인데 현대식으로 하면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입니다. 제 9시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고 했으니 지금 말하면 오후 3시입니다. 기도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한 번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 번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수없이 만났지만 여전히 자신은 앉은뱅이로 살았습니다. 그날도 아무 생각없이 평소대로 구걸하였는데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6절을 크게 읽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그에게 선포합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 선포적 기도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성도님과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름으로”로 번역한 헬라어 전치사 ‘엔’은 직역하면 ‘~안에(in)’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일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단순히 명칭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라 그리면 일어나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본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증명되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올 한해 불치의 병이 고쳐질 것이라고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자신의 선택입니다. 올 한 해 가정 경제가 일어날 것인가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올 한 해 나쁜 습관에서 벗어날 것인가? 여전히 지금처럼 나쁜 습관의 노예로 살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도 예수님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됩니다. 과학은 할 수 없어도 예수님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됩니다. 내 구원, 내 습관, 내 환경, 내 한계 돈으로도, 권력으로 , 지식으로, 노력으로도 할 수 없어도 예수님이면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실제 자신에게 일어날 것으로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을까요?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믿음으로 성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완전히 낫게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에도 올 한 해 믿음으로 완전히 낫게 되는 은혜가 임하시길 바랍니다.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그러자 믿음으로 베드로의 손을 잡자 발과 발목에 힘이 생깁니다. 힘이 강해진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뛰어 서서 걸으며”라고 말씀합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걷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완전한 육신적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기뻐서 제자리에서 뛰기도 하고 이리 저리 걸어다녔다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런 놀라운 은혜로 한해 앉은뱅이 인생에서 걷고 뛰는 인생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올 한 해 동정받는 인생에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황홀한 인생이 되어 예수님을 전하는 인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2,8,9,10).

이 사람은 베드로가 전해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기 전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2절을 보십시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그를 메고 성전 미문 앞에 놓아 두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는 인생입니다. 사람들의 동정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인생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부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을 꿈꾸며 결혼했을 것입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얼마나 기대를 가지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낳고 보니 지체부자유자입니다. 기뻐해야 할 가정에 갑자기 슬픔과 우울함이 찾아 온 것입니다. 온통 그 아들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는 집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좋아하는 친구도 없습니다. 결혼도 못합니다. 경제적으로 바닦이 납니다.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내가 저 아들보다는 더 오래 살아야 한다며 다짐하고 눈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의 부모는 평생을 아들을 불쌍히 여기며 살다 그를 불쌍히 여기며 죽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도 아들이 밟혀 눈을 제대로 감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장애인을 볼 때 저주받은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죽었어도 늙은 그를 그래도 누군가 동정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메고 성전 미문에 가져다 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엇하기 위해서입니까?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 그래도 그에게 동전 몇 개라도 던져주는 동정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남의 동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동정이란 어려운 처지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으로 딱하고 가엾게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산 사람입니다. 베드로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정받는 인생에 익숙해진 사람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합니다. 그때 그는 동전 몇 개를 줄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나를 보라고 했을 때는 물질적 동정을 바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돈은 없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물질적 동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씀을 듣고 믿어 그 인생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라게 여기며 놀랐습니다. 놀랍게 여기며의 여기며(에플레스데산)은 물이 컵 주둥아리 끝까지 차 있는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놀람이 가득찼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기이함과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동정받던 인생이 사람들을 심히 놀라고 놀라게 하는 인생으로 일어났습니다. 놀라움(엑스타세오스)는 황홀경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 ‘엑스터시(ecstasy)’의 어원입니다. 무엇으로 놀라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기적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사람,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동정받는 인생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베푸는 인생으로 변한 것입니다.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메아리는 큰 것입니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실패한 과거 경험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포기하며 앉은뱅이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40년간 해보았는데 안된다고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생을 포기해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능력이 없고 이제까지 해보았지만 잘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는데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부부가 부부 됨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자녀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자녀를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사업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이상한 길로 나간다고 해도 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고, 몸이 점점 약해지고 건강에 자신이 없다고 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기도를 포기해서도 안 되고 아무리 전도해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전도를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에서 목자, 구역장, 권찰, 각부 부장, 성가대원, 주방, 청소, 남 여전도회 임원, 교사, 직분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감당하지 못했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여건 나빠졌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 일이 잘되지 않을 때,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내내 언덕길일 때, 자금은 얼마 없고 빚은 많을 때, 웃고 싶어도 한숨 지어야 할 때, 걱정이 마음 가득 차 있을 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한때는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 그 예수님께서 앉은 뱅이에게도 오셔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내가 힘없다고 예수님이 힘이 없으신 것 아닙니다. 내가 무능하다고 예수님이 무능한 것 아닙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예수님이 실패하신 것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말처럼 나에게 금과 은 아무것도 없어도 나에게는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에 이름으로 나는 일어 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40년 되지 않던 일도 기적적으로 되어질 수 있습니다. 40년 동안 도망자로 살던 모세, 장인 집에서 목동으로 살았던 모세가 80살 되던 어느날 민족 지도자로 우뚝 서서 자신의 백성을 애굽 노예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작년까지 해보고 해보아도 여전히 앉은뱅이 마음, 앉은뱅이 경기, 앉은뱅이 신앙, 앉은뱅이 가정이라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엽도 어느 날 큰바람을 만나면 강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일 일로 베드로는 무엇을 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베드로가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그런 기적을 나타낸 것처럼 주목했습니다. 자신의 권능과 경건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19절 크게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너희들도 회개하고 믿으면 주님 앞에서 새롭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4장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날 예수 믿은 사람이 남자만 약 5천명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성도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동정 받는 인생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간증하는 인생으로 변해 내 인생으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오는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우리는 올 한 해 구걸하는 입에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입으로 일어나야 합니다(2,3,5,8,9).

이 사람이 매일 출근하는 곳은 어디에 있습니까? 수많은 시간을 머물러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 사람의 인생의 시간은 주로 어디에서 머물러 있었겠습니까? 성전 미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배드리러 가는 성전 미문입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구걸을 합니다. “한 푼 줍쇼” 구걸하기 위해 날마다 성전 미문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하는 말이 구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한 말 중 가장 많이 한 말은 구걸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말은 각인력과 견도력, 성취력이 있어 그 말이 자신을 지배해 버립니다. 안된다고하면 될수 없다고 각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나쁘다고 하면 나쁜 사람으로 각인해 버리는 것입니다. 버클리 대학 매리언 다이아몬드 박사는 "부정적인 자극이나 메시지를 계속해서 접하면 두뇌에 미세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해 신체의 신호까지 나쁘게 바뀐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뇌는 척추를 지배하고 척추는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각인되느냐 부정적으로 각인되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집니다. 테네시 주의 작은 마을에 한 아이가 살고 있었답니다. 그는 체구가 작고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였답니다. 마을 어른들은 자녀들이 그 아이와 노는 것을 금했답니다. 늘 외톨이로 지냈는데, 12세 때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호기심이 생겨 교회에 갔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 늦게 갔다 일찍 나오곤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혜를 많이 받고 감동의 여운이 남아 앉아 있다 교인들 틈에 끼어 나오게 되었답니다. 그때 마주친 목사님이 말했답니다.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모두 멈춰버렸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네 아버지를 닮았잖아.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당황하여 빠져나가는 아이의 등을 향해서 목사님은 또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꼭 훌륭한 사람이 되라!" 그 아이는 세월이 흘러 주지사가 된 벤 후퍼입니다. 그는 그때의 일에 대하여 "그날은 바로 테네시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라고 고백했답니다. 구걸하는 말을 계속하다 보면 구걸하는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구걸인생을 살다보면 늘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날마다 불만,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마다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말만 하면 못하겠다고 안 된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겠다고 너무 힘들다고 말합니다. “아멘”이 없습니다. “예”가 없습니다. “하면된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안되었는데 어떻게 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집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도 불만 불평을 말하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지난번 예배당 난방 공사를 했는데 감사보다는 너무 더웁다고 불평합니다. 현관문 공사를 했는데 왜 색유리를 끼워 어둡게 했느냐고 불평합니다. 왁스를 칠해 놓았는데 미끄럽다고 불평합니다. 맛있는 커피를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나는 다방 커피 좋아한다고 불평합니다. 그런 말을 하신 분은 없겠지만 이런 실제적인 예를 들면 성도님 가운데는 제가 야단치기 위해 누구에게 듣고 야단치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한다고 오해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임직자 투표를 하면 목사님이 나를 임직자가 되지 못하게 했다면 늘 입에 불평과 불만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석 교인 5천여명이 되는 목사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그 교회도 임직 투표를 하고 나면 신앙생활 잘하던 5-6 가정이 목사님 불평 원망하며 교회를 떠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방문을 발로 차 상하게 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떠나지는 않는데 그의 부인 권사가 사모를 원수 삼아 분풀이를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선천적인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처럼 사람들 중에는 말에 장애가 있어 교회에 무슨 말을 해도 오해하고 왜곡해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보십시오. 그는 다리를 사용할 수 없었지만, 물건을 수리할 수 있는 손은 성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나 그림 잘 그립니다. 내 그림 사가세요”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두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는 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지고 온통 구걸만 합니다. 손도 구걸하는데, 눈도 구걸하는데, 입도 구걸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습니까?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성전으로 들러가면서”와 “하나님을 찬송” 했다는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한 성전에 들어가서 찬양을 하였습니다.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찬송함을 보고”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 보시기 바랍니다. 구걸하는 소리만 듣던 사람들이 그 입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그는 성전 가까이 왔지만, 성전 문에서 들어가 한 번도 진정한 찬양하지 못한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주신 입으로 성전 문 앞에서 구걸만 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찬양하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구걸하던 말을 찬양하는 말로 바꾸고 일어나야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을 감사하고 만족하는 말로 일어나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긍정적인 말로, 소극적인 말을 적극적인 말로, 비관적인 말을 낙관적인 말로 바꾸어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라고 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건건 불평과 원망, 시비를 합니다. 부정적인 언어를 달고 삽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때 하나님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말대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지었습니까?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찬양받으시기 위해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12절, 14절을 보십시오. 왜 우리를 택하였습니까?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삼아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 영원한 천국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공통되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찬양합니다(행 16:25).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0장10절 “내가 온 것은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천국가는 삶을 사는 인생이 되었으니 올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차원의 인생으로 일어나 도약하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있었던 신체적 장애, 언어적 장애, 경제적 장애, 사회적 장애, 정신적 장애, 신앙적 장애를 예수님 안에서 해결받고 일어나 뛰며 찬양하며 간증함으로 수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인생으로 변했듯이 우리도 올 한 해 더 주저 앉지 말고 일어나 걷고 뛰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구걸이 베품으로, 한탄이 환희로, 절망이 희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원망이 찬양으로, 불안이 평안으로, 질병이 건강으로 일어서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슬픈 마음 있는 자 몸과 영혼 병든 자 누구든지 부르시오 예수 이름 부르시오 그 이름을 믿는 자 그 이름을 부르는 자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그는 구원 얻으리 예수 예수 능력의 그 이름 예수 나 외쳐 부르네 예수 예수 구원의 그 이름 예수 나 외쳐 부르네 예수 그리스도

 

은과 금 내게 없으나 나 가진 것 너에게 주니 능력의 이름 예수라 그 이름을 붙드시오 그 이름을 믿는 자 그 이름을 외치는 자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그는 주의 영광 보리라”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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