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기쁨과 관용(빌립보서18 빌4:4-5)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755 추천수:0 220.120.123.244
2019-11-03 17:06:07

기쁨과 관용(빌립보서18 빌4:4-5)

 

어제 딸의 연주회가 있어 연주회장에 가기 위해 광화문을 지나갔습니다.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 물러가라고 사람들이 데모했습니다. 신호등이 떨어졌는데도 차가 가지 못했습니다. 시간을 맞추어 가야 하는데 파란 신호가 떨어져도 데모행렬은 멈추지 않고 도로를 무단 횡단하였습니다. 10분이 지나자 초조해졌습니다. 15분이 지나자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계속 이어지나 한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신호가 몇 차례 바꾸는데도 차를 가지 못하게 하고 데모하는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는 경찰에 항의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듯이 인간은 정치적이며 그 밑바닥에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습니다. 니체는 "이 의지가 존재의 가장 심오한 본질이며 삶의 근본 충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권력을 차지하고 하는 사람의 욕구는 대단합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어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지배욕이 강한 정치인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보다는 오직 다음 선거에만 집착합니다. 정권을 잡기 위한 갖가지 이슈를 만들어 '밀어내기(push)'와 '끌어당기기(pull)'를 통해 편을 가르고 차기 선거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 불리기에 몰입합니다. 모든 것을 권력 획득에 초점을 맞추고 패거리나 시정잡배들처럼 옳고 그름은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결정되고 사고는 흑백 논리의 감옥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순수를 잃어버리고 늘 저의가 무엇인지 추측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자기 합리화를 꾀합니다. 우리는 계속 빌립보서를 보고 있는데 빌립보서가 기록될 때 정치 지도자는 악명높은 네로였습니다. 그는 아주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붓동생을 독살하고, 정치적으로 간섭한다고 어머니와 임신한 아내를 살해했습니다. 스승인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해지자 그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덮어씌워 신앙인을 잔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그때가 아주 젊을 때입니다. 17살에 황제가 되어 14년 동안 통치하고 68년 6월 9일 31살로 자살하였으니 60-62년에 빌립보서가 기록되었다면 이때 나이는 23-25살 나이 때입니다. 나이든 하나님의 종,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권력중독에 빠진 미치광이 네로를 바라볼 때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이 개척하여 세운 빌립보 교회 교인들 가운데서도 권력투쟁을 한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2절을 보세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교회 안에서 권력다툼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이 감옥에서 이런 소식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힘있는 김권사님과 이권사님이 주방에서 서로 싸우고 그 앙금을 풀지 않고 매사 서로가 옳다고 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역자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무엇이라고 권면합니까?

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지 말고 주님 안에서 유오디아의 마음도 아니고 순두게의 마음도 아니고 겸손하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같이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의견충돌이 생기고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여인들이지만 비난하지 말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하나님의 일을 같이 하는 동역자들을 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3절 보세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 천국 가 영원히 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쁨

그렇게 권면하면서 무엇을 말씀합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강조하는가를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계속 강조하였습니다. 3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네로의 추악한 꼴을 보며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2장 17-18절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지금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하고 있고 자신이 죽을지라고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폭악한 네로를 보면서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상황을 보면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개척한 교회 교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상황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을 보고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떻든, 상황은 어떻든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하여도 주님이 그 문제보다 크고 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문제를 감싸고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문제가 주님보다 큰 것이 아닙니다. 네로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싸움이 주님보다 큰 것이 아닙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고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팔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 섭리하시는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과 환경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우리 주님을 보고 지금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옥 같은 문제를 만나도 네로와 순두게와 유오디아같은 사람을 만나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있으면 성령 충만을 받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충만케 해주십니다.(요14,15,16장)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1)”

주님 안에 있으면 기도하여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주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니라(요15:10-11)" 했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까? 그 안에 갇히지 마시고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말씀했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 . .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누가복음 6:22-23).

예수님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6장 22절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마태복음 5장 11-12절을 같이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우리 인생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일을 당하느냐는 우연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는 좋은 사람만 만나 살 수 없고, 기뻐할 수밖에 없는 좋은 일만 만나며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이 흐르다가 큰 바위를 만나면 깊이 파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 만나면 그만큼 인격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도, 힘든 일을 만나면 그만큼 영성은 깊어지고 영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무슨 일을 당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살면서 기뻐하지 못하는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을 만나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 것입니다.

 

“고단한 인생길 힘겨운 오늘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지나간 아픔도 마주할 세상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보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어진 내 삶의 시간 속에 주의 뜻 알게 하소서 하루를 살아도 기쁨으로 가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후회도 염려도 온전히 맡기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보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기뻐할 만한 조건이 있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세주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을 신뢰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불화를 초래하는 다양한 문제가 있어고, 에바브라 디도의 질병 때문에 걱정할 만한 일도 있었고, 그릇된 이단으로 싸워야 할 문제도 있었습니다. 자신도 불의한 권력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집도, 자녀도, 노후 보장도 없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계속 기뻐하고 기뻐하며(빌1:18 2:17)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밖에 있으면 고난의 환경을 보고 기뻐할 수 없습니다. 주님 밖에 있다면 감옥에 가 있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 밖에 있다면 이단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유오디아와 순두개의 주도권 다툼을 보면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주 밖에 있으면 질병에 걸렸는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주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즉 주님을 위하다 감옥에 갔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다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육체적 고통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안고 즐거움으로 생각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기쁨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들이 그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질병에 걸리고 그 질병을 위해 기도했지만 응답되지 않을 때도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세 번 기도했는데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가지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했습니다.

자신이 비난받고 있는데도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빌1:18)"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쫓겨나면서도 기뻐하였습니다.(행13:52)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고후 7:4)”

마게도냐 교회를 보십시오. 환란, 시련, 극한 가난 가운데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고후8:1-2)

베드로도 로마 황제의 악랄한 핍박을 목격하면서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1:8-9)"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환경에 지배 당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신앙인으로 주 안에서 늘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자리 어떤 사람을 만나든 기뻐하지 못할 것을 찾으면 항상 존재합니다. 그것 보며 짜증내고 슬퍼하며 살지 말고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살면 기쁜 일은 항상 있을 줄 믿습니다.

 

2. 관용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권력다툼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토에피에이케스라는 말을 번역한 말입니다. 관대함, 큰마음, 너그러운 마음이라고도 번역했습니다. 인내, 온화함, 점잖음, 분별 있음, 관대함, 양보함, 온건함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는 넓은 마음입니다. 사소한 문제에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움과 친절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옳은 일보다 무엇인가 더 큰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일단 옳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옳은 일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일보다 더 큰 일이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를 따지기 전에 더 크게 생각할 수도 있고, 더 너그럽게 봐 줄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관용에는 용서와 이해와 인내와 여유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용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용은 남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관용은 소극적인 의미로는 자신과 자신의 정신에 통제를 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제, 극기, 자기의 마음과 행동을 다스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관용은 실제로 지극히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수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수용하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관용은 인내, 쉽게 성을 내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정신과 마음과 자아를 통제해서 쉽사리 성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관용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능동적인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의 실수를 변명해 주려고 힘쓰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돕고 포근하게 해 주려고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다투는 것은 관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깍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관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인색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너그러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술먹고 푸는데 성도는 술을 먹지 않고 풀지 않는다는 말은 마음이 좁쌀처럼 좁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마음, 온유한 마음, 따뜻하게 받아주는 마음, 실수를 끝까지 따지지 않는 마음, 참지 못하는 마음, 남의 잘못을 드러내 놓고 퍼붓지 않는 마음, 어려움을 끝까지 참지 못하는 마음, 고통스러워도 너그럽게 품어주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관용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고린도후서10장 1절에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의 스타일이 관용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너그럽게 품어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시기까지 참아 주시고 할 말을 하지 않으시며 예수님의 그 전능한 능력을 다 쓰지 않으시며 고난을 견디었습니다.

 

누가 관용해야 합니까? “너희”입니다. 다른 사람의 관용을 요구하지 말고 주 안에 있는 우리가 관용해야 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용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관용해야 합니까?

모든 사람입니다. 부요한 사람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사람에게나, 거친 사람에게나, 친한 친구들에게나, 독재자들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과 모든 부분에서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업과 직업에서도 거래에서도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루디아같은 헌신적인 사람도 있었고, 점하는 귀신들린 사람도 있었으며 간수와 그 가족도 있었습니다. 싸우는 순두게와 유오디아도 있었고, 이단에 미혹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관용의 대상에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가방에 짐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가방에 들어갈 수 있는 짐만 골라 넣지 말고 짐이 들어갈 수 있는 내가 가방을 만들면 됩니다. 어떤 정치인이 어떤 직분자가, 어떤 친구가, 자녀들이, 시부모님, 특정 성향의 사람..., 내 가방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자꾸 버리지 말고 원수까지라도 내 가방에 들어 올 수 있도록 내 가방을 크게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바다가 세상을 살리는 것은 바다는 모든 것을 품어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품어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잘잘못을 따진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부족하고 어린아이였습니다. 담배 피우고 술 잡수시고 교회에 온다고 배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다 우리는 어린아이 시절이 있었고 누군가 품어주었기 때문에 신앙도 성장한 것입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품어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감당하기 힘든 사람도 품어주면 감당하는 사람이 됩니다. 관용은 깊고 차원 높게 기다리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관용을 보이라는 말은 믿음에 있어서 타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고, 비판하고, 비난하지 말고 이해하고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관용을 보이는 것이 성도의 중요한 영적 생활입니다.

 

왜 관용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시간적으로 가까이 오십니다. 사람들이 끝까지 싸우는 이유는 이 세상의 삶이 유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것이고 아니면 우리가 천국에 갑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로 살아 보았자 얼마 동안 원수로 살겠습니까? 인생은 그렇게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 정도로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쉽게 판단하지만 심판자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행동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억울함을 당하면 얼마나 당하겠습니까? 영원한 세계에 비하면 별로 큰 것이 아닙니다. 억울한 일, 부당한 일 언젠가 주님이 다 어루만져 주실 날이 옵니다. 꼭 지금 내가 정의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고 너무 독단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눈물 다 씻어 주실 날이 옵니다. 우리는 때로는 주님 때문에 우리의 정당한 권리도 포기할 정도의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사명 붙들고 주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 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공간적으로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에서 주님이 보고 계시고 우리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확 분노를 뺏어 버리고 싶을 때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 주님은 “내가 너를 용서해 주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씀할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부채를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60조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채를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이 돈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넉넉잡아 약 3천만 원쯤 되는 돈이랍니다. 종말론적으로 살면 용서 못할 것 없습니다. 품지 못할 것 없습니다. 오늘 밤 잠들었는데 눈을 뜨지 못하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 우리의 지식, 우리의 능력을 자꾸 보여주려고 하지 말고 우리는 관용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를 때 세상이 감동합니다. 세상은 날마다 데모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다툼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예수님의 너그러운 마음을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과대 망상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잘못에 대해서든지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울 방도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배를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끝없이 주도권 싸움을 하는 세상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그것 보면서 슬퍼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기쁨의 소식 복음으로 기쁨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인 마져 보수와 진로로 나누어 투쟁하면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네로같은 정권 밑에서라도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감동합니다.

끝없이 주도권 싸움을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좁은 마음으로 진영논리의 늪에 갇혀 싸우지 말고 보수도 진보도 품고,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품고,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품고,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품고, 예수님의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녹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9.11.3.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