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시대를 가리켜 인재 전쟁의 시대(The war of for talent)라고 말을 합니다. 모든 나라가 경제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인재에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나라가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기업도 마찬 가지라고 합니다. 우수한 인재의 발굴 및 유지가 기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탁월한 기업이 되려면 전략, 기술, 시스템이 탁월해야 하지만 결국 전략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사람이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계 초 인류 기업이라고 하는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300여 명으로 구성된 '캔디데이트 제너레이터(Candidate Generator)'라는 인재 발굴팀을 운용한다고 합니다. 만약 꼭 필요한 인재가 있는데 회사에 대한 신뢰나 다른 이유로 이직을 꺼려하면, 아예 그가 속한 회사를 사버린다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빌 게이츠의 기술자문 겸 소프트웨어 기술자인 아눕 굽타를 영입하기 위해 굽타가 다니는 회사를 통째로 인수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인재가 중요한데 어떤 사람을 인재로 취급합니까?
인재의 덕목으로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경련은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현대자동차 등 국내 굴지의 11개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을 상대로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을 조사했는데 주요 요건의 공통점은 네 가지였습니다. (1)개인 역량 (2)국제 감각 (3)원만한 대인관계 (4) 올바른 가치관 등이었습니다. 학자들은 핵심인재의 특성을 (1) 전문능력(향후 회사의 주도할 인재) (2) 변화주도 역량(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는 인재) (3) 도덕성(투철한 가치관과 조직관을 갖춘 인재) (4) 인간미(사람과 ' 운' 이 따르는 인재) 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한 시대의 인재, 위대한 민족 지도자로 사용하길 원했습니다. 모세는 이미 40년에 걸쳐 애굽 왕실에서 당대 최고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행 7:22)”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광야로 보내었을까요? 그 광야에서 무엇을 훈련시켰을까요? 모세는 아침에 일어나 양들을 끌고 밖으로 나가 풀을 먹이고 저녁이면 들어오는 그런 반복적인 생활을 40년 동안 했을 것입니다. 늘 똑같은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성경에 특별하게 기록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40년의 생활이 별로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40년 초기 생활에 아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결혼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광야의 교훈을 찾아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우리가 광야 생활에서 받아야 할 것은 인격훈련입니다(16-17)./지도자로서 인격훈련
모세가 자기 백성을 돕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완전 인생 밑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왕자였는데 이제는 도망자, 수배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졸지에 사장에서, 부장에서, 과장에서 쫓겨나 빚쟁이가 되고 쫓기는 신세, 노숙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도 믿었던 양어머니로부터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 준 줄 알았는데 역시 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에 애굽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형제인 줄 알았던 어머니가 다른 동생은 자신을 정치적 라이벌로 생각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가장 가까운 동료가 자신에게 비수를 들이댄 것입니다. 거주하는 곳이 하루아침에 왕궁에서 이슬을 맞고 잠을 자야 하는 광야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걱정 없이 살았는데 이제 당장 먹는 것이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40세까지는 대권에 대한 희망이 있었는데 이제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민족을 도우려다가 그런 꼴을 당한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배신감에 시달리면서 “두고 보라 다시는 내가 그런 경우 돕지 않겠다.”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할 것입니다.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내가 절대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나 밖에 없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간 모세를 소개하면서 성경은 첫 번째 사건으로 무엇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억울하게 당하는 7 공주를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의협심을 가지고 남을 돕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위협할 때 일관성있게 약자의 편에서 의협심을 가지고 도와주었습니다.
도망자 모세가 하루는 우물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때 미디안 제사장의 딸 일곱명이 우물로 왔습니다. 일 공주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아버지의 양무리에게 물을 먹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사막의 거친 젊은 목동들이 와서 우물가에서 차례를 기다리기는커녕 7공주를 괴롭히고 몰아내었습니다. 아마 19절을 통해 짐작해 보면 목자들은 르우엘 딸들에게 음흉한 수작을 걸어오기까기 했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모세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정의의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동은 여러 명입니다. 자신을 홀몸입니다. 위험한 상황입니다. 낯선 곳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도와 주어보았자 이 문제로 또 배신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를 또 다시 도와주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사소한 것 같지만 모세는 민족을 구원하는 큰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도망자가 되어 깊은 실의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배반당하고 바로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지명 수배자가 되어 도망가는 신세입니다. 누구를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와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광야에서 어떤 훈련을 시켰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예측이 불허한 곳입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목동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40년입니다. 화려한 궁중에서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살던 모세에게 있어서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일관성을 가지고 주어진 일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는 훈련을 모세는 광야에서 받았을 것입니다. 인격 훈련의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일관성 훈련입니다. 어떤 변화가 있어도 변질되지 않고 끝까지 선한 목표를 수행하는 능력입니다. 의의 의지를 변질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광야에서 이런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이런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바로 앞에서 쉽게 포기해 버렸을 것입니다. 9번이나 기적을 일으켰는데도 바로는 백성을 내어 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배신을 합니까? 홍해가 다가옵니다. 그 때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출14:11을 보십시오. 애굽의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춤을 추며 노래하며 기뻐합니다. 물이 없습니다. 마라에서 쓴물이 나옵니다. 또다시 모세를 원망합니다(출15:24). 신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먹을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 애굽에서는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었는데 주려 죽게 만든다고 원망합니다(출16:3). 디베랴의 반역(민11:1-3)합니다. 가장 믿었던 미리암과 아론이 지도력에 도전을 합니다(민12:1-16) 바란 광야에서는 대 반란을 일으킵니다(민13:1-15:41) 이런 일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관성있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 갔습니다. 우리는 과정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식간에 광야가 다가오면 이제 끝이라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끝까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이루어질 때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 사건으로 인생을 포기했다면 결국 성군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감옥에 간 것으로 포기했다면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 때문에 포기했다면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광주리 타고 도망나온 것으로 인해 수치감에 쌓여 선교를 포기했다면 결코 그는 1세기를 변화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시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2. 우리가 광야 생활에서 인생의 멘토를 만나 지혜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18-20)./ 지도자로서 지혜 훈련
모세는 자신을 가장 사랑했을 것으로 믿었던 어머니로부터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세상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이제까지 자신을 보호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왔던 민족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습니다. 이정도 되면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들게 됩니다. 인간이 싫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인간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고 사람을 도왔습니다. 사소한 도움이었는데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은 자신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하여 모세는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미디안 7공주의 아버지 제사장 루우엘을 만나게 됩니다.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 혹은 '전능자의 친구'란 뜻입니다. '엘'은 유일신 여호와를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 전능한 신으로 여겨져 왔던 셈족의 하나님 이름입니다. 다른 이름은 '이드로'(3:1;18:1)입니다. 아마 '르우엘'이 그의 본명이고, '이드로'는 그가 제사장이 된 후에 얻은 공식 이름일 것입니다. 본래 미디안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인생의 중요한 멘토 장인을 만난 것입니다. 루우엘은 어떤 사람입니까?
1)도덕적 기준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루우엘이 보니까 딸들이 평소보다 빨리 돌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빨리 돌아 온 이유를 물어 봅니다. 이 때 애굽 사람이 그들을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 내 주고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르우엘은 당연히 최상의 예우로 그 은혜를 갚고자 했을 것입니다. 은혜 갚기를 가볍게 여기고 자신들의 안전만을 위해 황급히 도망온 딸들을 책망합니다. 그 사람을 버리고 왔다고 말합니다. 여기 “버리다”는 말은 배반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갚아 주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광야에서 버림 받은 것 같았는데 참으로 지혜로운 멘토를 만난 것입니다.
2)품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모세는 유기불안(遺棄不安)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릴 때 친모로부터 떨어져야 했습니다. 40세가 되어 양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자기 동족으로부터도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제사장이 아버지처럼 자신을 받아 준 것입니다. 품어준 것입니다. 르우엘과 모세와의 관계는 성경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8장 1-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의 처자식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은 후에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때 모세가 달려가서 부둥켜안고 입 맞추는 대상은 그의 아내나 자식이 아니라 장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친밀한 대화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장막 안으로 함께 데리고 들어간 사람도 자신의 아내가 아닌 장인입니다.
3)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지쳐 있는 모습을 보고 백부장 오십부자 십부장을 세워 그들에게 일을 맡기라고 조언합니다.
4)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방 제사장이었지만 나중에는 하나의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 했을 때 모세의 자녀들을 데리고 모세를 방문하게 됩니다. 이때에 이드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물과 희생 제물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출18:12). 이는 이드로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또한 통치와 재판을 위해 율법과 법도를 가르치고 재덕이 겸전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십부장 제도를 제안했습니다. 율법을 아는 자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 일꾼을 삼으라고 한 것은 이드로의 신앙을 대변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런 좋은 멘토, 지혜로운 멘토를 만나게 하여 모세를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 가면 나를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결정적으로 도울 사람을 준비시켜 놓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다 떠나 버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함께 일할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다 떠나버릴 것 같았지만 주치의 마가는 끝까지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남겨 놓은 자들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 19:18)"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홀로 팔려가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보디발을 준비시켜 놓았고 보디발의 아내와 술맡은 관원장, 떡맡은 관원장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민족의 죽음 앞에 서 있는 모르더개에게 하나님은 에스더를 미지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광야에서 인생의 멘토를 만나야 합니다. 평생 나를 도와 주고 지혜를 줄 수 있는 멘토를 만나야 합니다.
3. 우리는 광야 생활에서 주어진 것의 귀중성을 아는 겸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21-22)/지도자로서의 겸손 훈련
광야에 떨어진 모세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가정도 집도 권력도 명예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이제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것 같았는데 모세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제사장 루우엘이 외로운 도망자 모세에게 자시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주었습니다.
'새'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경에 나오는 이삭의 결혼처럼 황혼이 물든 들판에서 리브가와 만나는 낭만적인 장면도 없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이나 외삼촌 라반을 위해 무료봉사하는 자기희생도 없습니다. 야곱의 결혼이나 이삭의 결혼이 모세와 공통점이 있습니다(창세기 24:10-14절, 29:1-14절, 그리고 출애굽기 2:16-22절) 에 나타나는 이삭(Isaac)과 야곱(Jacob) 모세의 결혼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고 주인공이 우물가로 가고 결혼할 여성이 우물가로 나오고 그 남자 주인공이 그 여인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그 여인이 집으로 돌아가서 보고하고 주인공이 여인의 집으로 초대되고 결국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결혼 시키려는 부모의 의도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본래의 고향도 아닙니다. 친척도 아닙니다. 모세와는 전혀 연고가 없는 곳이었고, 모세의 배우자는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삭(Isaac)과 야곱(Jacob)의 경우, 부모의 관심과 애정 속에서 철저히 계획된 채로 가정을 꾸리게 되지만 모세의 경우 이집트인 살인 사건으로 인하여 실제로는 양부모와 친부모 모두로부터 버림을 받은 상태에서 결혼을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결혼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결혼시켰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결혼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십보라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여인입니다. 앞으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끄는 민족 지도자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순수 혈통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국제 결혼을 하였다면 백성이 따라 주겠습니까? 나중에 보면 미리암와 아론이 구스 여인을 취했다고 질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흑인 아내를 둔 지도자,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큰 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결혼을 허락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모세는 국제화된 인물입니다. 당시 가장 강대국인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아마 그대로 있었으면 크레오파트라같은 대단한 여인과 결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초라한 미디안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지도자 아내로서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낮추시는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예민한 부분입니까? 십보라는 모세의 격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지위나 능력이나 모든 면에 모세와 비교해서는 부족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결혼을 통하여 모세를 낮추는 겸손의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교만했던 모세 광야의 가정 생활을 통해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낮은 삶을 통하여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무식한 아내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내입니다. 40년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누려왔던 지위, 풍요로움, 자부심, 학식 등을 실제적으로 포기해야만 합니다. 겸손하지 않는 지도자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큰 인물은 큰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십보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에게 주어진 십보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1)외로움을 감싸 주는 여인이었습니다.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었습니까?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타국에서 객” “내가 그곳에서 객이 되었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도피했던 그곳에서 이방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모세의 심정일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의 생활의 자신의 처지를 담아 지은 이름입니다. 그 외로움을 달래주고 동반자와 길 벗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초라하고 부족한 것같았지만 십보라였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십보라의 이름만 세 곳( 출2:21, 4:25, 18:2)에만 나오기 때문에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부인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나타난 내용만 보면 애굽 왕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미디안 광야의 목동이 된 모세가 광야에서 겸손해 지는 훈련을 받는 동안 그를 돌보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낳은 후 그 이름을 “엘리에셀”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18:3).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변화된 심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가 고독의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의 현장, 하나님을 더 알고 깨닫는 현장임을 고백하는 이름입니다.
2)모세의 생명을 살려주는 여인이 됩니다.
모세가 사명을 받고 출발할 때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작은 아들 할례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 그 죽음의 위기에서 모세를 구원해 낸 사람은 누구입니까? 4장 25절을 보십시오. 십보라입니다. 초라한 것 같고 잘 못된 결혼 같지만 아내는 그를 죽음에서 구원해 준 사람이 됩니다.
3)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여인입니다.
남편이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자, 편안한 미디안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그를 따랐습니다. 금의환향하는 길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남편의 동족들이 이스라엘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편을 믿고 남편을 따르기로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결국 친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에야 남편과 상봉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난을 피해 도망갔을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으로서 냉대받다가 결국 쫓겨났을 것입니다. 순수 혈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모세의 아내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국제 결혼을 한 것입니다. 미리암와 아론이 구스 여인을 취했다고 질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흑인 아내를 둔 지도자,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큰 허물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아내는 단지 이방인이고 이교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십보라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지도자로서 남편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는 현실에서, 십보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남편 곁을 떠나는 것 이었을 것입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르우엘에게로 돌아갈 정도로(18:2, 3, 4) 판단력이 있고 남편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성격이 강한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광야 생활을 통해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낮아 질 때 하나님을 매달리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낮아 질 때 작은 것도 귀중하게 여깁니다. 남아 있는 것의 귀중성을 알고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다 잃은 것 같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남겨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거름이 되고 그것이 뿌리가 되어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겸손 훈련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광야에서 우리의 진정한 우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광야에 보내었겠습니까? 우리는 직접적으로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지만 이스라엘을 광야에 보낸 이유를 보면 우리는 모세를 광야에 보낸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우리는 명쾌하게 3가지 이유 때문에 광야에 보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낮추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2). 인간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잘되면 사람은 끝없이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교만이야 말로 인간의 최고의 문제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몰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쾌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잘 났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면 그 때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아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구나!, 인생이란 내 힘으로 살 수 없구나. 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이구나" 이것이 인간입니다. 광야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답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낮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3)"서입니다.
둘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2절 하반절입니다.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위해서입니다(2).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지 아니 지키는 지 알아 보기 위해서입니다. 순종보다 더 완벽한 신앙은 없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절정입니다. 순종은 신앙의 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훈련을 25년 동안이나 광야의 방랑자로 받았습니다. 야곱은 30여 년을 광야에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다윗은 17여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바울은 3년 반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외로운 광야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낮추시고 훈련하여 마침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16).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2-4)"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의 세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마침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광야는 끝이 아니고 축복의 시작입니다. 광야는 손해가 아니가 거룩한 투자입니다. 요셉은 노예와 감옥이라는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랜 기다림의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둘 다 시작할 때의 배경은 비슷하지만 한 사람은 광야를 통과했고 한 사람은 광야를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무엇보다 진정한 우리의 멘토이신 우리 예수님을 우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