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생 동안 초라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고 작은 것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생 동안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느 쪽인 것 같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00억대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한 구두쇠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자이지만 돈 쓸 줄도 모르고 궁색을 떨면서 살았답니다. 죽을 때까지 아들딸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꼭 쥐고 살자고 다짐을 했답니다. 어느 날 노부부가 식당에 갔는데 밥 한 그릇과 그릇 두 개를 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밥 한 그릇을 둘로 나누더니 할아버지가 밥 먹는 것만 열심히 구경만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인이 할머니 "왜 식사하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할머니가 말하기를 "할아버지가 다 먹으면 틀니 빌려서 먹으려고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지독한 구두쇠인지라 이 할아버지가 하도 잘 못 먹어 몸이 시름시름 아팠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니 의사가 소변 검사를 하자고 오줌을 받아 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몇 시간 지났는데 이 할아버지가 큰 병에 오줌을 받아 오더라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받아 온 것입니다. 당황한 의사가 "이렇게 많이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하자 할아버지가 "그래도 적은 것보다 났죠."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통보를 받고 집에 왔다고 합니다. 너무 기뻐 가족들을 다 모아놓고 감격에 겨운 목소리고 크게 외쳤다고 합니다. "기뻐해라. 얘들아 ! 너희들 모두 건강하단다." 이 노부부가 한 번도 제주도에 구경을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결혼 50주년을 맞이하여 할머니와 제주도 구경을 가려고 갔는데 배를 타기 위해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비행기 여행 상품이 있었답니다. 그것을 본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임자, 비행기를 타봅시다." "비행기라뇨? 그게 얼만지 알아요? 50만원이에요. 50만원이라구요!" "이제 우리도 많이 늙었고, 한 번 타보자고 " 서로 옥신각신 싸웠답니다. 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를 옆에 듣고 있던 마음씨 고운 경비행기 조종사가 "제가 공짜로 비행기를 태워드릴께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비행기를 타시는 동안에 한마디도 안하시면 돈을 안받겠어요. 하지만 한마디라도 하시면 50만원씩을 내셔야 됩니다." 비행사는 이 노부부가 소리치게 하기 위해 엄청난 곡예비행을 하며 제주도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주도에 다 가기까지 비명소리 한 마디 안한 것입니다. 조종사가 웃으면서 "제가 온갖 묘기를 다 부리면서 놀래게 하려고 했는데 안 되는군요. 대단하십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아까 할망구가 밖으로 떨어질 때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50만원은 50만원이니까!"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보면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것 쌓아 놓고 이렇게 살다가 가면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가족도 주고, 직업도 주고, 교회도 주고, 나라도 주고, 재물도 주고, 건강도 주고, 믿음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주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1.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경우든 아버지께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면 참 자유가 주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면 손해 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면 삶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야 부자로 잘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품을 떠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작은 아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자라니까 아버지에게 재산을 요구합니다. 아마 둘째 아들이니까 당시 풍속에 따르면 아버지 재산의 1/3을 상속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며칠이 안되어 모든 재산을 돈으로 바꾸어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아버지 품을 떠나면 참 자유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 돈이면 행복이 보장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나면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참으로 재미있게 살 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품을 떠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유가 아닙니다. 노예가 되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는 노예보다 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쾌락도 한 때였습니다. 돈 있을 때였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친구는 커녕 쥐엄열매 하나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가 있고,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이 보장되고, 하나님을 떠나면 쾌락이 있고, 하나님을 떠나면 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나라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남북을 보십시오. 그래도 하나님 품에 있는 사람이 많은 남한은 세계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20개 잘 사는 나라에 속했습니다. 신앙을 죽이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은 어떻습니까? 평양에 교회가 부흥될 때는 남한 보다 잘 살았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풍요롭고 행복합니까? 참 자유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인간다운 삶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할 것 같고 하나님을 떠나면 참 자유를 누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흉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스도예프스키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행복을 원하시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신 분이었습니다(12). 아버지는 풍족하신 아버지입니다(17). 아버지는 언제나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20). 아버지는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입니다.(22-24) 그래서 자식이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리가 먼데도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한 번도 잘못을 추궁하지 않습니다. 종들에게 좋은 옷을 가져다주고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며 즐거워합니다. 왜요 한 가지 이유입니다. 죽은 아들 살아났기 때문입니다(24). 이것이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어떤 아들입니까? 돈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히 여긴 아들입니다. 인륜과 도덕과 같은 삶의 중요한 원칙들을 우습게 여기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돈을 중히 여긴 아들입니다. 그렇다고 돈의 진정한 가치는 안 아들도 아닙니다. 돈을 땀 흘려 번 적이 없고 아버지의 것을 허랑방탕하게 육체의 쾌락만을 추구하다 탕진한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입니다. 거지가 된 아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용서해 주고 받아주십니다. 아버지는 새로운 언약의 표시로 가락지를 끼워 줍니다.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겨줍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부터 이 신발 신고 새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말입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탕자처럼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 아버지에게 가면 살길이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전환은 생각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은 이대로 살면 주려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가면 풍족한 삶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면 살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방향이 잘 못되면 속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삶의 목표를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던 발걸음을 아버지께로 향해지는 것입니다. 물질 지향적 삶, 쾌락 지향적(13)을 품꾼이라도 좋으니 아버지 안에 있는 삶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아버지의 간섭을 귀찮게 여겼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는 삶의 방식에 동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유가 제한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구속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호등이 걸리적거린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새가 날개가 걸리적거린다고 다 잘라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날아가는데 공기가 저항이 된다고 진공상태를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기가 물 때문에 참새처럼 날을 수 없다고 물 없는 육지로 뛰어 오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물마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방식을 거슬리면 불행과 죽음이 따르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식을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그 방식을 떠나면 인간은 불행해집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에는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목동에서 팔려갔으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절망을 계곡에서 뒹굴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퍼진 영어 단어가 오케이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코크(코카콜라의 별칭) 코카콜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1백 95개국에서 생산되며, 세계 청량음료시장의 4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카콜라가 이렇게 유명한 회사가 되는 데는 어떤 전환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 G 캔들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의지력이 나약해 주위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금주선언을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그는 벼락같은 마음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캔들러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아내는 바로 그 시간에 남편의 `금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답니다. 이 부부는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캔들러는 아내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알코올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기도의 능력으로 술을 끊은 것입니다. 캔들러는 그때부터 수입의 10%를 철저히 헌금했으며 그 이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절망의 늪에서 하나님을 향하면 인생의 대 전환점이 이루어집니다. 그 전환점을 통하여 180도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고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장사로 살아야 했을 텐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곳을 떠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았을 법한데 호렙산 떨기나무 불 가운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민족을 해방시키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다윗에게도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그저 목동으로 살 수밖에 없는 시골 소년이었지만 형님들 밥을 싸가지고 갔다가 골리앗과 싸워 단판에 승리를 거둠으로 일약 스타가 되어 결국 40년 간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물고기 배속에서 요나는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바울에게도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완전이 인생이 변화되어 세계를 향하여 선교의 포문을 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면 보장된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간음하다 걸려 현장에서 돌에 맞아 죽을 여인도 받아 줍니다. 절망의 계곡에서 뒹굴지 말아야 합니다. 쾌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 희망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2.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함께 형제자매 됨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성경에는 탕자 한 명이 더 나옵니다. 집에서 떠나지 않고 일한 형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모범생입니다. 탈선한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잔치를 합니다. 큰 아들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형제가 5월 5일 감사 헌금 1000원씩을 했습니다. 동생은 공부를 못하고 형은 공부를 잘하였습니다. 형은 감사 제목을 이렇게 썼습니다. “동생을 바보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생도 감사헌금을 했는데 “하나님 감사해요 우리에게 많은 좋은 지능을 주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나이다. 아멘”이라고 썼습니다. 이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동생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면 한 번도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동생을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종도 당신의 동생이라고 말합니다(27). 아버지는 이 내 아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찾은 아들이라고 기뻐합니다(24) 그런데 3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불결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방인, 창기, 세리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함께 즐거워할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타락했고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볼품없고 아무리 가정에 망신을 시키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 사랑해야 할 사람이고 함께 관계를 누려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식구들은 모두가 함께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우리 형제자매들입니다. 도토리 키 제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숫자가 클수록 대우를 해주는 나라가 있었답니다. 그 나라에는 1.5와 5가 살았는데, 1.5가 5보다 작아 항상 1.5는 5에게 깍듯이 대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1.5가 5를 못 본체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화가난 5는 1.5보고 "1.5야~ 너 왜 나 못 본체하고 지나가?" 그러자 1.5는 웃으며 "나 어제 점 뺏다" 점 빼면 15입니다.
이 큰 아들은 29절에 아버지의 명을 어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리고 동생을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기준이 아닙니다. 자신의 윤리적인 기준으로 동생을 판단하고 속상해 합니다. 자신의 신앙적 기준, 자신의 믿음으로 기준으로 남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먼저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을 마태복음 23장 13절에서는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큰 아들은 자기 의의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불평합니다.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동생은 비난합니다. 이것은 영적 교만입니다. 영적 교만은 악덕 가운데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영적으로 교만하면 영적 통찰력이 사라집니다. 적국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동생은 적국이 아닙니다. 아군입니다. 나와 동역자는 적군이 아닙니다. 아군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비난하고 화살을 쏩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심판자가 되어 정죄합니다. 교회를 어렵게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신앙생활 최고 잘한다고 생각하고 늘 교인들을 비판하고 목사님이 신앙생활을 잘못한다고 흉보는 어느 집사님이 죽어 천국에 갔답니다. 그런데 천국 입구에 엄청나게 많은 시계가 걸려 있고 그 시계 밑에는 사람들의 명패가 일일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여기에 걸려있는 시계는 자신이 세상에서 살 때 나쁜 일을 한 만큼 시계 바늘이 빠르게 돌고 있다." 고 말해 주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집사님은 자기 교회 장로님 권사님 시계를 찾아보았답니다. 빨리 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시계를 찾아보니까 역시 빨리 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자신의 시계를 찾아보자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제 시계는 어디 있습니까?” 물었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는 말이 "당신의 시계는 너무 빨리 돌고 있어서 모세 할아버지가 지금 선풍기로 쓰고 있소!"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를 바라볼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으로 다른 영혼을 섬겨 보면 목자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 얀시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앞부분에 자신이 들은 한 친구 실화를 적고 있습니다. [창녀 하나가 나를 찾아왔네. 울먹이며 하는 이야기가 두 살 된 자기 딸을 변태섹스를 밝히는 남자들한테 돈을 받고 팔아왔다는 거야. 딸의 몸을 한 시간만 팔면 자기가 하룻밤 버는 것보다 수입이 좋다나. 마약 먹을 돈을 대려면 어쩔 수 없다더군. 교회에 가서 도움 받아 볼 생각은 안 해 봤냐고 겨우 물어 봤지. 그 얼굴을 훑고 지나던 완전 충격의 표정, 평생 못 잊을 걸세. "교회요! 거긴 뭐 하러 가요? 그러잖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 비참해질 거예요."] 교회가 은혜를 일어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교회만이 은혜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도 흰두교도 유교도 은혜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물 한 방울 속에 해의 모습이 숨어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은혜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말합니다.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 우리는 은혜로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상대의 조건을 보고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웃을 형제로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형제됨을 누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언젠가 제가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오승재씨가 쓴 "소설 우리 예수님" 중에 "제일 교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교양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입니다. 아주 잘 지어졌습니다. 문화시설이 있습니다. 헌 누더기를 걸치고 왼팔이 없는 누더기 옷을 입은 거지가 봇짐을 걸머진 채 교회 들어옵니다. 안내를 보던 남집사님이 떠밀어냅니다. "나 예배보러 왔소." "이런 꼴로 예배보면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송집사는 백 원짜리 하나 쥐어 주고 보내려고 합니다. 이 때 부목사가 "어디서 왔소"라고 물어봅니다. "예배 보는 데 어디서 온 게 무슨 상관이요, 나 집이 없는 줄 뻔히 알지 않소." "누구소개로 왔소" "거리에서 예수 믿으라라는 말 듣고 왔소" 들여보냈습니다. 송집사은 헌금 훔치러 왔으니 보내자고 합니다. 그 주변에는 아무도 앉지 않습니다. 부목사가 나가면서 인사합니다. "와 주셔셔 감사합니다." "정말이요. 그럼 다음 일요일에 많은 친구들을 데려 오겠소." 다음 주 헌금 시간 헌금바구니를 그 앞에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헌금할 수 없소." 당회는 구제비 주고 못 오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거지아이 "우리 아저씨가 목사님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다리 밑 가마니로 가리고 사는 천막에 희끄무레 죽은 시체 같은 몸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듯 소리 없이 한 쪽 손을 들려고 하였습니다. 손에는 꼬기꼬기 꾸겨진 100원 지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가를 말하려다가 끝내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웠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미워하는 친구가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일가친척이 이 거지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 자, 세상의 실패자들이 모두 우리의 형제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다말, 라합, 밧세바, 사마리아 여인 이런 사람을 받아들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한 여인입니다. 라합은 기생이고 창녀입니다. 밧세바는 남편 몰래 왕과 잠자리를 한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 번 갈아치웠습니다. 이런 사람들 우리 하나님이 다 받아들였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품고 인정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상식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도 주님 안에서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마땅합니다(32). 우리 형제는 경쟁의 대상도 자존심 상하게 하고 수치당하게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형제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3. 우리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은 은혜로 우리는 주어진 것을 함께 나누기 원하십니다.
작은 아들 탕자는 아버지가 준 재산을 가지고 자신만 위해 사용하다가 거지가 되었습니다. 큰 아들 탕자는 많은 것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없는 거지로 온 동생 소 한 마리 잡아 잔치한다고 역정을 내고 있습니다. 자기 받은 유산 다시 나누어 준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내 것 조금만 나누어 주어도 서운한 게 인간입니다. 내가 하는 일 인정받지 못하면 섭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본질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 초월해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것 생각해 보면 다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내 것되는 것 아닙니다. 어짜피 써야 하고 쓰지 못하고 죽으면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받은 자격 없는 나에게 무조건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은혜는 자격을 따지지 않습니다. 은혜는 내 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벤자민 워필드 "은총이란 자격이 없는 자에게 공짜로 내려지는 하나님의 호의다"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은혜받는 사람이 사랑 받을 만한 어떤 일을 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상대방의 반응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작용합니다. 은혜란 일방적인 것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고 받을 만한 일도 한 일이 없고 되갚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것은 내가 마땅히 받아야 대가를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는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고 은혜로 매일 밟고 다니는 땅 내가 만든 것 아닙니다. 등산 하는 산, 마시는 물, 산소 내가 만든 것 아닙니다. 함께 누리니까 얼마나 풍요롭고 좋습니까? 좋은 것은 나누면 배가 되고 힘든 것은 나누면 반이 됩니다. 한 사람이 다 가지려고 하면 서로 비교하게 되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러면 정작 누리지를 못하고 모으는데 일생을 다 보내어 버립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큰 아들이 왜 나눔의 기쁨, 누림의 기쁨을 갖지 못하고, 누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분노할까요? 말은 아버지가 부당하게 대한다고 말하며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29). 왜 허랑방탕한 동생은 소를 잡아 주고 성실한 나는 염소 새끼도 안 잡아 주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31절에 내게 있는 것 다 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생에게 나누어주기 싫은 것입니다. 동생이 돌아온 것이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인정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만 무대의 중앙에 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이기심입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행복해지고 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더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안전해진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버는 기쁨, 모으는 기쁨도 크지만 나누는 기쁨 잘 쓰는 기쁨은 더욱 큰 것입니다. 은혜로 우리는 나에게 주어지 건강을 나에게 주어진 지식을 나에게 주어진 명예를 나에게 주어진 권력을 나에게 주어진 믿음을 나에게 주어진 사랑을 나라에게 주어진 물질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도계(Thermometer)처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온도 조절장치(Thermostat)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외부의 것에 의해 내려갔다 올라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방안 온도를 따뜻하게 맞추는 사람입니다.
앞에 이야기 한 그 지독한 구두쇠 할아버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제주도 가다 할머니 잃고 그 충격으로 이곳 저곳 몸이 아팠답니다. 몸 한곳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곧 죽을 것 같아 큰 맘 먹고 병원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답니다. 얼마나 택시비가 아깝겠습니까? 그런데 대절한 택시가 막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가는데 갑자기 부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고 막 내려가자 구두쇠 할아버지가 기사에게 소리쳤답니다. "멈춰요.... 멈춰!" "어쩔 수가 없어요. 사고예요." "그렇다면 최소한 택시 미터기라도 멈추시오!"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겨우 택시가 멈추고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났는데 “영감님,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의사가 이렇게 묻자 영감님은 눈빛이 갑자기 살아나더니 되물었답니다. “진찰비 안 받으면 가르쳐주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끝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쉽게 변합니다. 나이가 들면 참 변하기 쉽지 않습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혼자만 너무 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누리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한 누림은 같이 누리는 것입니다. 언제가 새로 등록한 집사님 가정을 심방 가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교회보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교회에 등록합니다.” 그런 원칙으로 신앙생활한다는 것입니다. 참 귀한 말입니다. 내를 필요로 하는 곳에 시간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물질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재능을 내어 놓을 때 가장 가치있게 쓰임받습니다. 우리 교인들 보면 멀리서도 교회에 나와 충성 봉사하는 성도님들을 봅니다. 함께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비난 받는 창기와도 하나님 나라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소외된 세리와도 하나님 나라를 같이 누려야 합니다. 빈털터리 된 탕자와도 함께 누려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전쟁하며 싸우길 원치 않습니다. 함께 더불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의 철강와 앤드류 카네기는 "상속은 자식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망치게 하는 것이다. 저 세상으로 돈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1919년 사망할 때까지 전재산(4억9천2백만달러)으로 3천개의 도서관을 설립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했습니다. 코넬대학과 각종 사회단체에도 아낌없이 기부했습니다. 자식에겐 단 한푼도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가정용품 유통업체인 미국의 홈 디포사 공동창업자 케네스 랑곤은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부는 거름과 같아서 쌓아두면 썩은 냄새를 풍기지만 뿌려주면 많은 것들을 자라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록펠러에 이어 역대 미국 2위의 부자였던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와 존스 홉킨스, 릴랜드 스탠퍼드, 이즈라 코넬 등 미국의 부호들은 세상을 떠나며 재산 대부분을 대학에 기부했습니다. 그들의 유산은 대학을 통해 수많은 인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6)"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어려운 사람과 함께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집 떠난 탕자도 집 안의 탕자도 용서하고 사랑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