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열린말씀 열린설교

열린설교

게시글 검색
참 자유(참 해방) (롬8:1-4)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6254 추천수:15 112.168.96.71
2011-08-14 10:41:42

참 자유(참 해방)
로마서8:1-4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인, 일본인, 한국인 셋이 자유 우방이라고 사이좋게 아마존을 탐험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원주민들이 나타나 잡아갔답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외치자 마음대로 영토를 침범했으니까 곤장 100대를 때리고 견디는 자는 살려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냥 맞으면 다 죽으니까 원하는 것을 엉덩이 위에 올려놓고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답니다. 먼저 미국인에게 곤장을 치면서 원하는 것을 물었답니다. 그러자 엉덩이 위에 매트리스 10장을 깔아달라고 했답니다. 70대쯤 때리자 매트리스가 다 찢어져 나머지 30여 대를 고스란히 맞았답니다. 다 맞고 나서 그 미국인은 "역시 난 창조성이 뛰어난 민족이야."라고 말했답니다. 일본인 차례가 되었는데 미국인을 보고 일본인은 방석 100장을 올려놓아 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100대를 맞고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답니다. 일본인은 "역시 난 모방성이 뛰어난 민족이야"라고 말했답니다. 이제 드디어 꾀 많은 한국인 차례가 되었답니다. 추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한국인이 말하기를 “일본놈을 자기 엉덩이 위에 올려놓고 때리라고” 했답니다. 세계 많은 사람들이 일본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놈이라고 무시합니다. 일제를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2/3이상이 되는데도 학습되어 일본을 왠지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축구를 해도 일본은 이겨야 속이 시원합니다. 35년간 일제로부터 삼천리 반도가 강점당하고 정치적 자유와 주권을 잃고 수난을 당한 민족적 감정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일이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6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그동안 우리민족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정치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세계에 한류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우리나라 신앙인은 30만 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천만 명 넘었습니다. 인구 성장에 비하면 엄청난 부흥의 역사입니다. 1949년 인구가 2018만이었는데 지금은 5000만이 넘었습니다. 인구 성장은 약 2배쯤 성장했는데 기독교의 성장은 33배의 성장입니다. 1955년 4월 태국에 처음으로 최찬영, 김광명 선교사 부부를 파송함을 시작으로 169개국에 선교사 2만 2014명 파송하는 선교 대국이 되었습니다.
경제 규모도 엄청난 성장을 하였습니다. 1953년 13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액(GDP)은 세계 220개 국가 중에서 11,12위를 차지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평균 수명이 42년에는 45세였는데 지금은 77세를 넘었습니다. 대학교도 47년에는 학생 수 2만 학교 24개였는데 344개가 되었습니다. 전화 가입자도 46년에는 3만 6천명이던 것이 지금은 개인이 모두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동차도 48년에는 1만 5천대이었던 것이 지금은 1천 5백만대가 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국제 정세를 해방 때나 비슷하고 남북은 분단되어 전쟁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해방은 되었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일본 무역 의존도가 22.3%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수출로 아무리 흑자가 나도 일본에게는 대일 무역적자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품, 소재, 기계류 등 자본재의 대일 의존도가 높습니다. 요즈음 한류가 일본에 불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문화의존도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제 잔재가 전국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일본만화가 청소년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독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합니다. 갖는 수모를 겪으셨던 정신대 할머니들 지금도 데모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구속하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를 기원합니다. 미국의 헨리는 "내게 자유를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요!"라고 외쳤을 정도입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4대 자유 즉, 어디서나 말할 수 있는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는 자유, 어디서나 결핍으로부터 해방 받을 자유, 어디서나 공포로부터 보장 받을 자유를 외쳤습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 해방, 참 자유는 무엇일까요?

1. 참 해방은 정죄로부터 자유입니다(1)./정죄는 끝이 났다./무죄선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참 해방은 정죄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정죄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확정을 짓는 것입니다. '세금' '부채'를 의미합니다. 즉 죄의 삯, 죄의 부채를 의미합니다. 부채가 있는 분들은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자유롭지 못합니까? 어디에나 쫓아다니며 괴롭히지 않습니까? 밥맛이 없어지고, 협박당하고, 도망당하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경련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동반자살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빚이 우리의 삶을 무겁게 짓누릅니까? 빚을 갚기 전까지는 끝까지 쫓아다니며 괴롭힙니다. 죄로 말미암아 정죄를 당하면 그렇습니다. 죄의 무게는 엄청납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이 정죄합니다. 가족이 나를 정죄합니다. 가장 친한 남편이, 아내가, 부모가 나를 정죄합니다.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정죄합니다. 기억이 정죄합니다. 과거가 자신을 정죄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 과거를 보라, 너의 추잡한 인생을 보라 네가 예수 믿는다고 웃기지 말라. 위선 떨지 말라.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는 더러운 인간이야. 너의 과거를 폭로하면 너는 얼굴 내밀고 사람들 앞에 서있을 수 없어. 고상한 채 하지 말고 그저 질퍽하게 살아.” 조롱하고 정죄합니다.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용기를 꺾어 버리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정죄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습니다. 누가 정죄하며 “그래서 어쩠다”고 반문하면 됩니다. 그 정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다 받아버렸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아시지 않습니까? 공소 시효가 소멸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정죄 상태에서 해방 시켰습니다. 법정적으로 너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포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심판하지 않고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평안히 가라'고 하신 선포와 같이(요8:11) 우리가 어떤 죄를 졌다 해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고 기억지도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 43:25)”
누가 정죄로부터 해방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ter)가 종교개혁을 할 때였답니다. 자기 서재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귀가 나타났답니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 본 루터는 기가 질렸답니다. 앞이 캄캄했답니다. 맥이 탁 풀렸답니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기록해 놓았답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리기까지 했던 죄를 다 적은 놓은 것을 보았답니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주었답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요사이 지은 죄를 다 기록해놓았답니다.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고 물었답니다. 루터는 "그렇다."고 대답했답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런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바로 살아! 너 이 죄 값을 어떻게 할래? 이때 루터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는데 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는 말씀이 기억났답니다. 그래서 루터는 새 힘을 얻어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여있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졌답니다.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그때 마귀는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너도 예수 믿느냐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너 같은 것이 장로고 목사고 집사냐고 정죄합니다. 우리의 과거가 우리를 정죄하며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2. 참 해방은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입니다(2).
참 해방은 무엇이겠습니까? 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로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말씀합니다.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율법의 선고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죄의 결과로서 오는 사망의 원리 사망의 법칙입니다. 모든 인류는 '죄와 사망의 법'에 묶이었고, 속박되었고, 사망의 언도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무기력해 집니다. 아무리 지식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권력 있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고상한 지성의 소유자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도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 "아,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는 저 세상이 무섭다.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이 어둠 속으로 그냥 덥석 뛰어 들어가는 것 같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도 폐수종으로 입원하여 죽음을 맞이할 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인생들을 가장 억압하고 포로로 잡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의학의 발달은 단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의 시간을 연장해 줄 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듯이 죽음은 인간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심리학자 헤르만 파이펄은 심상 투사 테스트를 해 본 결과 "쉰을 넘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심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몰두"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이 죽음의 공포와 이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신 것입니다. 무엇으로 해방을 시켜 주었습니까?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복음을 말씀합니다. 율법은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복음은 구원하여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새 번역에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중생의 사역을 성취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감화 감동시켜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하고 입술로 시인하게 합니다.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바로 사망에서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에서 해방되어 완전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신앙인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죽음의 순간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죽음의 순간 권능과 영광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서머나교회의 폴리캅 할아버지는 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다가 인생 말년에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핍박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모조리 찾아 처형하는, 참으로 참혹한 그 시대에 폴리캅은 신앙으로 성도를 격려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갔습니다.
그들은 폴리갑을 넘어뜨리면 많은 성도 역시 배신을 할 것으로 생각하여 작은 다락에 기거하는 폴리캅을 찾아 체포하였습니다. 그 때 핍박자들은 너무나도 실망했습니다. 마침내 찾아 놓고 보니 그냥 두어도 곧 죽을 것 같은 보잘 것 없는 늙은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차피 죽을 때가 다되었는데 부모같은 당신을 우리가 죽여서 무엇 하겠소, 그러니 우리들에게 당신이 믿는다는 그 예수를 한번만 모른다고 부인하시오. 그러면 즉석에서 풀어주리이다'고. 타 일렀습니다. 그 때 폴리캅이 당당하게 대답하기를, '이 나쁜 놈들 주님을 모독하여도 분수가 있지 나더러 무슨 못된 짓을 하라고 수작들인가? 아니 나더러 80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나를 부인하신 일이 없는 주님을 내가 이제 와서 모른다고 부인하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도리어 호통을 쳤답니다. 그리고 그는 장작더미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코미디 전방대 사회를 보신 코미디계의 대부격인 김경태 장로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은 죽음 앞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나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셨으니 오늘 내가 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최선의 사건이다" 하고 감사히 받아 들였답니다. 그래서 본인이 장례식 순서를 다 짜고, 누가 설교하고, 누가 무엇을 하고, 절대 상복은 입지 말고 했답니다. 그는 연예인이었기에 옷이 많았답니다.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옷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옷들을 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라하고, 그 중 제일 낡은 옷을 자기한테 입혀달라고, 그것을 입고 가겠다고 했답니다. 부인이 그건 안된다고,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니까 장로님은 웃으면서 그러면 나더러 벌거벗고 가라는 말이냐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하나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목사인 사위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숨이 차서는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하다가 돌아가셨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서 있는 사도 바울의 벗진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3. 참 해방은 율법의 요구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참 해방은 무엇이겠습니까?
3절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4)”
참 해방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도덕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하지 말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으로 다가옵니까? 하지 말라는 것만 있습니까? 하라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공경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선을 행하라” 얼마나 많은 하라는 명령이 있습니까? 율법은 이것들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지키라고 합니다. 이것을 지켜야 진정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100% 지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고백이 나옵니까?
우리 보다 훨씬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7장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왜 이런 고백이 나옵니까?
7장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5)”
7장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9)”
두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속사람은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겉 사람은 원치 않는 것을 행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원함은 있지만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바로 죄도 안 짓고 욕심도 없어지고 갈등도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심령 속에서는 두 법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입니다.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무게도 느끼지 못합니다. 갈등도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런 갈등은 지속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완벽하십니까? 저는 부족합니다. 어제 아침에 교회 현관에 있는 나무를 보니까 벌레가 갈가 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잡고 있는데 양목사님께서 출근하였습니다. 제가 벌레 잡는 것을 보더니 같이 잡을 줄 알았는데 저에게 “왜 잡아요 그것도 먹고 살도록 놓아두어야지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목사님 성자 같아서 그렇게 말하지만 범인이라 생명이지만 죽이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내가 아끼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얼마나 많아요. 어떤 사람은 적을 죽였다고 훈장 받지만 어떤 어머니는 아들 죽었다고 통곡하지 않아요. 어제 설교 준비를 하는데 대학 후배 자매가 찾아 왔습니다. 대학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저를 아들에게 소개하면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이라고 소개했데요. 그러니까 아들이 어머니 몰래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갔데요. 그러고 어머니에게 말하더래요. “잘 생긴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뭐 그렇게 그 목사님을 좋아하냐”고 그래서 그 자매가 아들에게 말했데요. “너는 얼굴만 보냐? 속을 보아야지” 제가 그 말을 듣고 그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속도 별로 잘 생기지 않았다고 숨쉬는 것이 죄라고” 우리 다 연약합니다. 얼마나 쉽게 분노하고 얼마나 쉽게 자기를 드러내고 얼마나 쉽게 의를 포기합니까?
믿음 좋은 사람도 흔들립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하늘의 불을 불러 이방선지자 850명을 무찔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세벨이란 여자 한 사람이 두려워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우리의 힘으로 율법의 능력으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고 살지만 얼마나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이런 부담으로부터 어떻게 해방시켜주십니까?
3절 4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4)”
하나님은 하시나니에 밑줄을 그으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일을 하셨습니다.
벧전1:19“우리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보내어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셔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이루십니까?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냐고 질문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26)” 구원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 성숙도 우리의 신앙적 사명도, 우리의 성화도 우리 하나님께서 해 주시면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거나 패배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
광복 66주년을 맞이했지만 아직도 우리의 주변국 환경은 8·15해방 당시와 비슷합니다.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중화사상을 앞세워 역사왜곡을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북한 핵 문제가 해소된다고 해도 중국의 팽창적 외교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우경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자기 영토라고 합니다. 동해를 ‘일본해’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전략을 다시 짜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역사 전쟁과 영토 분쟁, 민족주의와 군비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 사회는 각종 사회 갈등이 폭발 직전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회·경제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빈부의 차이 확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심화, 수출산업과 내수산업의 불균형 확산 등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신이 부패해 지고 있습니다. 경제 제일주의, 쾌락 만능주의, 파괴적인 이기주의로 정신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광복이 되선 해도 한국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민족의 고난을 대신 지고 국민을 계몽시키는 교육과 백성의 삶을 윤택게 하는 의료 선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에 의해 많은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로였고 김구 선생님도 기독교인이었고 건국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여운영 선생님도 신학을 공부한 전도사였고 건국 준비위원회 지방 위원들은 대부분 목사나 장로가 할 정도였습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개회될 때 임시의장 이승만은 단상에 올라가 사회봉을 잡고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개회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일동 기립한 가운데 이윤영 의원(목사)가 기도하였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誠心)으로 감사하나이다...” 하나님 의지하고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불어 버리면 모든 것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시고 역사를 주관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쓰임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 속에 영원한 군주도 영원한 제국, 영원한 정권도 없습니다. 사람도 사상도 정치 제도도 영원하거나 절대화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구속 역사를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광복 6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신앙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참 해방, 정죄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참 해방,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참 해방, 율법의 요구로 부터의 자유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참 해방을 우리 민족과 열방에게 전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8.14
SNS 공유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