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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4) 당연함의 착각에 들려온 음성(요한복음19:25-27)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749 추천수:0 218.147.218.173
2026-05-10 13:06:23

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4) 당연함의 착각에 들려온 음성

요한복음19:25-27

오늘은 우리 열린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워진 지 29주년이 되는 감사한 주일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지난 29년을 돌아보면, 기쁘고 평안한 날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답답한 날도 있었고, 눈물로 버텨야 했던 시간도 있었고, 앞이 보이지 않아 기도밖에 할 수 없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를 붙드신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선하신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시간 속에서 한순간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때마다 길을 여시고, 막힐 때 지켜주시고, 부족할 때 채워주시고, 흔들릴 때 붙들어 주셨습니다. IMF와 금융위기, 코로나 등 많은 대외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예배로 함께 해 주시고, 기도로 자리를 지켜주시고, 물질과 재능과 시간의 섬김으로 헌신해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교회 설립 감사 주일인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오늘은 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 4번째로 당연함의 착각에 들려온 음성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29년 걸어온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의 봄날을 지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마음의 태도는 모든 것을 당연함이라는 상자에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 건강하게 걷는 것,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것, 배우자가 내 곁에 있는 것, 자녀가 집에 들어오는 것,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 언제든 전화하면 받을 사람이 있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들이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폐부로 스며드는 신선한 공기, 대지를 적절한 온도로 데워주는 태양의 온기, 그리고 땅을 딛고 설 수 있게 붙들어주는 중력의 안정감까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 중 단 하나라도 어긋나는 순간, 우리가 누리던 평범한 일상은 즉시 불가능한 기적이 됩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37세가 되기까지 결혼하지 않는 아들이 있었답니다. 아들이 직장에 출근하려고 식탁에 앉았는데, 밥과 국 대신 하얀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답니다. 겉면에는 [사직서]라고 적혀 있었답니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입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수신: 사랑하는 아들.

발신: 너의 엄마.

본인은 지난 37년간 귀하의 수면을 지키는 야간 경비원, 무급 가사도우미, 전속 요리사, 감정 쓰레기통, 그리고 무이자 대출 은행으로서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코어 시스템(관절 및 허리)의 급격한 노후화와 감정 배터리의 완전 방전으로 인해, 더 이상 해당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통보합니다. 이에 오늘 부로 '엄마'라는 직책에서 사직하고자 하오니 재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추신: 그동안 밀린 퇴직금은 굳이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우리가 이런 사직서를 받는다면 어떠시겠습니까?

우리는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을 마치 평생 고장 나지 않는 '무료 자판기'처럼 여겨왔다는 사실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쾌락 적응'이라 부릅니다. 아이가 아주 비싼 최신형 스마트폰을 샀다고 가정해 봅시다. 첫날은 기스라도 날까 봐 조심조심 만지고, 예쁜 화면을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합니다. 그런데 딱 한 달 지나면 어떻습니까? 그냥 '스마트 폰'일 뿐입니다.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도, 새 차를 사도 그 기쁨은 길어야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쾌락 적응'입니다. 인간의 뇌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기쁨이나 은혜를 경험해도, 그것이 매일 지속적으로 주어지면 곧바로 자극을 느끼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어느새 '감사'해야 할 것을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카페에서 무료 와이파이가 1분만 끊겨도 짜증을 내면서, 평생 무료로 주어지는 내 심장의 뜀박질이나 부모님의 희생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무서운 본성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화려한 봄날을 즐기면서, 그 봄날을 만들어주기 위해 혹독한 겨울의 눈보라를 온몸으로 막아낸 부모님의 희생을 마치 공기나 중력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당연함의 착각을 깨뜨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계십니다. 숨이 끊어져 가는 극한의 고통 속에 계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자기 고통에만 갇혀 있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를 보셨고, 어머니를 존중하셨고, 어머니를 끝까지 책임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사랑을 다시 보게 하고, 사람을 기능이 아니라 인격으로 대하게 하며,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책임으로 살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1. 십자가는 우리가 익숙하게(당연하게) 지나치던 사랑의 얼굴을 다시 보게 합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19:25)

우리 성도님들이 영화감독이 되어 이 골고다 언덕을 카메라 렌즈로 비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카메라는 십자가 위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헐떡이는 아들 예수님의 얼굴을 비추다가, 이내 렌즈를 아래로 내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오열하는 한 여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이 아기였을 때, 시므온이라는 선지자는 마리아를 향해 섬뜩한 예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2:35). 33년이 지난 지금, 그 무서운 예언은 십자가 아래서 끔찍하게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이 짧은 한 문장 안에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아들이 있고, 십자가 아래에는 어머니가 서 있습니다. 아들은 피를 흘리고 있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들의 고통도 크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도 대신 아파 줄 수 없고, 차라리 내가 그 자리에 섰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저 서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현대 뇌과학은 인간에게 '거울 신경세포'가 있어 타인의 고통을 볼 때 내 뇌에서도 동일한 통증 부위가 활성화되어 타인의 고통을 동일하게 느낀다고 말합니다.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거울 신경은 절대적입니다. 못이 박힌 것은 아들 예수님이지만, 망치 소리가 울릴 때마다 마리아의 심장에는 그보다 더 잔인한 대못이 수백 번 꿰뚫고 지나가는 고통이 임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당하는 것이 더 낳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도 아이가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차라리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아픔을 대신 져 주려 하지 않지만, 부모는 자식의 아픔을 대신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감을 넘어선 '신경학적 일체'입니다. 자식이 아프면 엄마가 더 아프다는 말입니다. 지금 골고다 언덕을 보십시오. 로마 군병이 무자비한 쇠망치로 아들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에 대못을 때려 박습니다. 뼈가 부서지고 신경이 끊어지는 비명소리가 언덕을 울립니다. 이때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뇌와 신경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십자가형은 질식사입니다. 숨을 쉬기 위해 못 박힌 발에 체중을 싣고 몸을 억지로 끌어올릴 때마다 채찍에 찢긴 아들의 등허리가 거친 나무에 쓸립니다. 아들이 숨을 헐떡이며 질식해 갈 때, 마리아의 거울 신경 역시 맹렬하게 반응하며 마리아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몸에서 수분이 말라가며 피를 토할 때, 마리아의 마음은 십자가에 함께 매달려 갈가리 찢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우리 인간의 잔혹함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는 '타자의 얼굴'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고유하고 아파하는 '존재'를 보기보다는 철저히 '나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가', '기능'으로만 취급한다고 말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사람으로 보지 않고 기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삶을 바쳐 키워낸 부모님을 그저 '나를 뒷바라지해 주는 스폰서', '내 아이를 대신 키워주는 무급 베이비시터', '필요할 때 언제든 뽑아 쓰는 ATM 기계'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철저히 '기능'으로 소비합니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인간의 잔혹함이라고 말합니다.

그 기능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원망의 화살을 쏩니다. "엄마는 왜 남들처럼 나한테 집 한 채 못 해줘?", "아빠,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구식 충고를 들어요?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교회 같이 나가자고 하는 엄마에게 왜 엄마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이렇게 모르냐고 짜증과 원망의 말들을 쏘아댑니다. 자식을 향해 열려 있는 부모의 그 예민한 거울 신경세포에 끔찍한 대못을 박습니다. 부모 역시 상처받고 아파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를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우주보다 커서 남을 돌아볼 여유가 단 1%, 아니 0.0001%도 없는 완벽한 이기심이 허용되는 그 극한의 고통의 한가운데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 극도의 고통 속에서 억지로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십니다.

자신의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에 예수님은 눈을 감아버리지 않으시고, 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해 준 '어머니라는 유용한 기능'의 껍데기를 벗겨내십니다. 그리고 평생 아들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다가, 이제 아들을 잃고 가슴이 산산조각 나 영혼이 핏빛으로 물든 '한 연약한 인간, 상처 입은 여인'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십니다.

나의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부모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우리를 향해, 십자가의 예수님은 "네 이기심과 효율의 안경을 벗어라. 그리고 부모를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방향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통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사명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부모를 그저 아직 건강하신 분”, “가끔 연락드리면 되는 분”, “늘 내 편인 분정도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늙어 가는 몸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계신 분, 말은 안 해도 외로움을 품고 계신 분,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두려움을 안고 계신 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효도의 시작은 거창한 행동이 아닙니다. 다시 보는 것입니다. 부모의 늙어감을 보고, 부모의 외로움을 보고, 부모의 침묵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눈을 바꿉니다. 그전에는 당연했던 것이 십자가 아래에서는 감사가 됩니다. 그전에는 익숙했던 것이 십자가 아래에서는 눈물이 됩니다.

 

2. 십자가는 부모를 기능이 아니라 존귀한 인격으로 대하게 합니다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어머니의 얼굴을 직시하신 예수님의 첫 마디는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갑니다. "여자여, 보소서." 죽어가는 마당에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하십니다. 유교적 정서로는 대단히 불효막심해 보입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헬라어 '귀나이'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공생애의 시작인 가나 혼인 잔치와 공생애의 완성인 십자가 위에서 하셨습니다. 당시 여성을 천대시하던 때에 상대방을 한 인격체로서 높여 부르는 공손한 표현으로

첫째, 구속사적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창세기 315절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 목수 요셉의 아들이나, 마리아가 배 아파 낳은 육신적 아들로 그 나무에 매달려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의 죄를 짊어지고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만왕의 왕으로 우뚝 서 계신 것입니다. 혈연을 넘어선 구속의 완성을 선언하는 호칭입니다.

 

둘째, 인문학적이고 심리학적인 해방의 의미입니다. '귀나이'라는 호칭은 마리아를 향한 위대한 독립과 해방의 선언입니다.

"마리아여, 당신은 지난 33년 동안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했다는 무거운 짐, '예수의 엄마'라는 꼬리표를 달고 평생 가슴 졸이며 살았습니다. 이제 그 역할의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은 더 이상 나를 챙기고 책임져야 할 도구가 아닙니다. 당신은 내가 십자가에서 흘리는 이 피로 구원받아야 할 존귀한 성도이며,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선 고귀하고 독립된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꼬리표를 떼고 독립된 인격체로 예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평생, 직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다 은퇴한 60대 아버지가 있습니다. 퇴임식을 마치고 감사패 하나를 들고 집에 돌아왔는데, 가족들의 반응이 싸늘합니다. 아내는 당장 줄어들 생활비와 연금을 걱정하고, 취업 준비생 아들은 자기 용돈이 끊길까 봐 짜증이 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아버지, 30년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이 가족에게 아버지는 철저히 '돈 벌어오는 ATM 기계'라는 기능이었습니다. 은퇴를 했다는 것은 곧 기계가 고장 났다는 뜻이기에, 고장 난 기계를 거들떠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하여 기능의 꼬리표를 떼고, 독립된 인격체로 예우하여야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관계를 '나와 그것(I-It)'의 관계와 '나와 너(I-Thou)'의 관계로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소유물이나 무한 제공 자판기로 볼 때, 부모는 '그것(It)'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리아를 철저하게 존중받아야 할 영적 인격체, '(Thou)'로 대우하셨습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이 성숙해지는 자아실현의 과정을 '개성화'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기 때문에,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타인(부모 포함)과 더 건강하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안타깝게도 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독립과 개성화를 핑계로 부모를 귀찮은 존재로 밀어냅니다. "나도 내 인생이 있다"며 선을 긋습니다. 개성화를 서구적인 '개인주의''고립'으로 오독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선언 뒤에 숨어, 부모와의 정서적 연결마저 귀찮은 짐으로 여겨 잘라내는 것을 독립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개성화가 아니라, 관계를 맺고 책임지는 방법을 모르는 '심리적 미성숙'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자아실현은 나이 들어가는 부모의 연약함, 그들이 가진 한계까지도 나의 역사로 수용하고 끌어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진짜 성숙한 개성화는 자녀만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 역시 부모를 '나를 끝없이 지원해 줘야 하는 사람'이라는 굴레에서 풀어드려야 합니다. 부모를 자녀의 우상화된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드리고, 상처받고 외로우며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필요한 한 명의 존귀한 개인으로, 성도로 예우해야 합니다. 부모를 기능적인 '그것'에서 인격적인 ''로 대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진짜 관계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오직 '효율성''개인의 성공'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주입합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늙고 병들어가는 부모를 돌보는 일은 청년들에게 '비효율적이고 내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겨집니다.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면서 잎사귀만 화려하게 키우려는 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존중하셨습니다. 자기의 사명이 크다고 해서 어머니의 슬픔을 작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를 다시 인격으로 대하는 회복입니다. “무엇이 필요하세요?”만 묻지 말고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를 물어야 합니다. “건강은 괜찮으세요?”만 묻지 말고 혼자 계시면 외롭지 않으세요?”를 물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언어를 바꿉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부모를 기능으로만 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쓸모로 대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3. 십자가는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책임으로 완성하게 합니다(27)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은 슬픔에 빠진 제자 요한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요한아, 보아라. 네 어머니시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와 효율성으로 굴러가는 현대 사회의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현대인들의 뇌 구조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앙은 다름 아닌 '효율성''합리성'입니다.

 

부모가 병들거나 치매에 걸리면 형제들끼리 모여 엑셀 파일로 이른바 '효도비 1/N (더치페이)' 계산을 시작합니다.

", 작년에 엄마 임플란트 비용 내가 냈으니까 이번 무릎 수술은 형이 내. 그리고 요양병원 면회는 거리상 누나가 제일 가까우니까 누나가 자주 가." 철저하게 비용과 편익을 따집니다. 내 손해가 1원이라도 생기면 언성을 높입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국가는 세금 받아서 뭐 하는 거야?"라며 핏대를 세웁니다.

합리성과 효율의 잣대로 보면 각자도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는 애초에 효율성을 따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지금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고 피와 물을 다 쏟아내며, 생물학적으로 '가장 무능력하고 비효율적인 상태'에 계십니다. "어머니, 제가 지금 죽어가고 있어서 모실 여력이 없습니다. 알아서 사십시오." 해도 누구 하나 돌 던질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절대적인 고난 속에서도 '사랑의 책임'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부 요한과 늙은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가장 강력한 영적 유전자로 묶어 버리셨습니다. 혈연과 계산을 초월한 새로운 영적 가족, '교회 공동체'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아래서 찬란하게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명령을 받은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전승에 따르면 요한은 훗날 에베소로 사역지를 옮길 때도 마리아를 끝까지 모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피도 안 섞인 남의 어머니를 향해 이 무거운 짐을 기쁨으로 졌을까요?

요한의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예수님의 뜨거운 보혈이, 요한의 머릿속에 돌아가던 이기적인 효율의 계산기를 완전히 녹여버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부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안위를 넘어 내 늙은 부모를, 더 나아가 교회의 연약한 지체들을 진짜 내 가족으로 품어낼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외로운 어른들이 있고, 홀로 견디는 성도들이 있고, 위로가 필요한 지체들이 있다면, 그 또한 우리의 책임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프로그램이 많아서가 아니라, 서로를 맡아 주고 서로의 짐을 함께 질 때입니다.

우리 나라는 65세 이상 인구는 약 1,084만 명으로 노인 인구가 전체 주민등록 인구의 약 21.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초고령 사회가 된 것입니다. 간병 살인, 간병 파산, 간병 지옥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전체 1인 가구 중 7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습니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의 약 40%가 상대적 빈곤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OECD 최고 수준). 가족 단위의 돌봄 기능이 사실상 해체되면서 요양시설 의존도가 급증했습니다. 은퇴와 사별, 신체적 노화가 겹치면서 사회적 관계망이 단절되고, 이는 곧 심각한 정서적 위기로 이어져 심리적 우울감과 고독사 문제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행정 서비스, 금융, 일상적인 식당 이용(키오스크)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시스템이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이에 적응하지 못한 노년층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기본적인 생존권과 소비의 권리마저 제약받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차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는 어르신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여야 합니다. 소외된 어르신이 있으면 내 부모님이라고 생각하고 용돈도 드리고 반찬도 해 드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성경 쓰기도 하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이 일에 동참하며 후손들에게 삶의 유산을 남겨야 합니다. 자신의 생애나 신앙의 여정을 소설이나 수필로 기록하여 남겨 다음 세대에 신앙의 유산을 전수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나무를 한 구루씩 맡아 관리하고 텃받을 일구는 사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스마트폰 기본 설정, 키오스크 사용법은 물론, 컴퓨터, 인공지능(AI)을 활용법을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행정 및 복지 길잡이가 되어 관할 지자체의 노인 복지 혜택, 치매 요양 제도 등을 어르신들이 이해하기 쉽게 안내하고 대행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여력이 있으면 교회 내 노인을 위한 운동시설을 마련하고, 노년을 함께 하는 작은 마을 만들어 천국을 가기까지 행복하게 서로 돌보며 살 수 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단지 부모님께 잘합시다라는 도덕적 권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왜 우리는 부모의 헌신을 당연하게 여깁니까? 우리의 마음이 죄로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존중하지 못합니까? 자기중심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미안해하면서도 행동하지 못합니까? 사랑보다 효율과 편안함을 더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당연한 존재가 아니었는데도 주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내가 받을 자격이 없었는데도 주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죄인이었는데도 주님은 끝까지 책임지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깊이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의 굳은 마음이 녹습니다. 그때 우리는 부모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부모를 더 존중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을 책임으로 살아내게 됩니다.

 

어떤 분이 부모님을 떠나보낸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돌아가시고 나니까 제일 후회되는 건 큰 효도를 못 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화 한 번만 더 드릴 걸, 같이 밥 한 번만 더 먹을 걸, 그 말 한마디를 조금만 더 따뜻하게 할 걸, 그게 제일 후회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시간이 남아 있을 것처럼 삽니다. 다음 주가 있을 것 같고, 다음 명절이 있을 것 같고, 다음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늘 다음으로 미루다가 놓칩니다. 그래서 오늘이 은혜입니다. 지금 부모님이 곁에 계시다면, 아직 전화할 수 있다면, 아직 찾아갈 수 있다면, 아직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직 문을 닫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아직 부모님이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을 갚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은혜의 골든타임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결단이 분명해야 합니다. 부모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부모를 기능으로 대하지 않겠습니다. 부모 사랑을 말로만 남겨 두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외로운 지체들까지도 십자가의 가족으로 품겠습니다.

 

우리 열린교회 29주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뜨거우나 관계는 차가운 교회가 아니라, 말씀은 바르나 사랑은 메마른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며 서로를 가족처럼 품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를 보시고, 존중하시고, 끝까지 맡기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의 눈을 열어 주셔서, 당연함의 착각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사랑을 책임으로 살아내는 복된 성도와 가정과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은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이 지는 것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후렴]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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