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봄날에 만난 복음(2) 소유의 함정에 들려온 음성
마가복음10:17-22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서 부흥사 목사님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설교했답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설교를 했답니다. 한 장로님이 그 설교를 듣고 깊이 감동하였답니다. 장로님, 집에 오자마자 아내에게 말했답니다.
"여보, 오늘 은혜 많이 받았어. 나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집 팔라고 하시면 팔 수 있을 것 같아."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돌아보며 딱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 혼자 살던 집 팔아요."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는 설교를 들은 부자 청년은 어떤 반응을 하였습니까?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세 가지 반응입니다.
첫째는 “슬픈 기색을 띠고"(스튀그나사스)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날씨가 잔뜩 흐려지고 '하늘이 캄캄해질 때'(마 16:3) 사용된 단어입니다. 청년의 마음에 짙은 먹구름이 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음을 묘사합니다. 둘째는 “근심하며(뤼푸메노스)”입니다. 이 단어는 가벼운 아쉬움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듯한 깊은 고통과 비애'를 뜻합니다. 영생이 눈앞에 있는데도, 자신이 쥔 것을 도저히 놓지 못하는 무력감에서 오는 절망입니다. 셋째는 “가니라”입니다. 생명의 주관자로부터 의지적으로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는 고민 끝에 결국 영생을 포기하고,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선택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물이 많으므로"입니다. 그가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이유를 매우 간결하고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지만, 영적인 실상은 "그 많은 재물이 그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물을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였습니다. 그에게 재물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그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세상에서 가치를 증명해 주는 '구원자'이자 '우상'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가 '청년'이라고 기록하고, 누가는 그를 '관리(관원)'라고 설명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가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젊음, 부, 권력을 모두 갖춘 사회적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돈 자체를 악하다고 하지 않으나, 돈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여 ‘신(God)’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구약에서 부는 종종 하나님의 축복으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이 되기도 합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면 마음을 뺏는 '가짜 신'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풍요를 누릴 때 하나님을 잊을 것을 가장 경계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선지자들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며 부를 쌓는 것을 영적 간음이자 우상 숭배로 규정했습니다(암 8:6).
예수님은 부가 가진 위력을 단순한 물질이 아닌,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인격적인 영적 세력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돈을 가리켜 '재물'이라는 일반 명사 대신 '맘몬'이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마6:24). 이는 재물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경배를 받으려는 '신적 인격체'처럼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막10:25)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 자체가 죄라서가 아니라, 부가 주는 안전감에 취한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할 '가난한 마음'을 갖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여기서 '근심'은 부자 청년이 떠날 때 느꼈던 바로 그 처절한 고통(뤼푸메노스)입니다.
탐심은 단순한 성격 결함이 아니라 "우상 숭배"(골3:5)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이 더 나를 안전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그 신뢰 자체가 이미 우상 숭배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상화된 부는 3대 위력를 갖게 됩니다.
첫째, 시야 차단을 합니다. 영원한 것보다 당장의 숫자에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부유한 자들은 이 세대에서 마음을 높이지 말고"(딤전 6:17)
둘째, 가짜 평안을 줍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을 줍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딤전 6:17)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마음의 고착입니다.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해 주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다 팔라고 하신 것은, 그의 재산이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그의 영혼을 칭칭 감고 있는 '밧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상화된 부는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결국 슬픈 기색을 띠고 생명의 길에서 돌아서게 만드는 가장 치명적이고 강력한 '영적 중력'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근본적으로 수전노가 아닙니다. 악덕 업자가 아닙니다. 영생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 있었고, 도덕적인 열심도 있었으며, 예수님을 향한 존경심도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님께 달려와 체면도 잊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열정도 있고 진지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유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청년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
1. 소유의 함정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와서 나를 따르라"입니다(21).
오늘날 예배드리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팔아라” 이전에 있습니다. 핵심은 “나를 따르라”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갈릴리 해변에서 생업을 위해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어부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마4:19; 막 1:17)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려던 중에 빌립을 직접 만나셨을 때도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요 1:43) 마태(레위)가 당시 손가락질 받던 직업인 세관에 앉아 일하고 있을 때도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마 9:9; 막 2:14; 눅 5:27) 부친상을 당한 제자가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할 때도 나를 따르라고 우선순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8:22; 눅 9:59)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낙향한 베드로를 찾아가 회복시키시며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요 21:19, 요 21:22)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무리를 향해서도 제자도의 핵심 조건으로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막 8:34, 눅 9:23)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려는 자에게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요 12:26)라고 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어부나 세리 같은 평범하고 소외된 자들에게도, 율법에 정통한 엘리트(부자 청년)에게도, 그리고 실패하고 무너진 제자(부활 후의 베드로)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가 특정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자신이 쥐고 있는 것(그물, 세관, 재물, 자기 목숨)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최우선 순위로 삼는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인 부르심입니다.
이 부자 청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단지 재산을 정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자신에게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Follow me, 아콜루데이 모이)”라는 명령은 단순히 좋은 가르침을 본받으라는 도덕적 권유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랍비(선생)와 제자(탈미드) 문화를 배경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이 부르심은 매우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습니다.
첫째, 주도권의 역전 (은혜의 부르심)의 부르심입니다. 당시에는 율법에 뛰어난 제자가 유명한 랍비를 스스로 ‘찾아가서’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격 없는 자들(어부, 세리 등)을 먼저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선택이나 열심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물리적이고 전인적인 우선 순위의 변화입니다. 당시 “나를 따르라”는 말은 비유나 영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생계를 유지하던 그물과 배, 안정적인 세관의 책상, 심지어 가족이라는 1차적인 안전망을 ‘물리적으로’ 뒤로하고, 머리 둘 곳 없는 떠돌이 사역자의 길에 합류하라는 실제적이고 전인적인 요구였습니다.
셋째, 운명 공동체로의 초대 (죽음의 수용)입니다. 로마 제국의 압제 하에서 예수를 주로 삼고 따른다는 것은 곧 로마 황제(가이사)와 기존 종교 기득권층(바리새인, 사두개인)과 반대되는 길을 걷겠다는 정치적, 종교적 선언이었습니다. 이는 곧 언제든 핍박을 받거나 십자가에 처형될 수 있는 ‘운명 공동체’가 되라는 목숨을 건 초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자 그대로 생업을 버리고 팔레스타인 먼지 구덩이를 걸어 다닐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첫째 자기 결정권(자율성)의 포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소비자 중심 신앙에서 제자도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셋째, 일상 속 우상들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과거나 지금이나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네가 움켜쥐고 있는 썩어질 것을 놓고, 영원한 생명인 나와 함께 걷자”는 가장 위대하고도 급진적인 사랑의 초청입니다.
따르라는 것은 현재 명령형입니다.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매일 매일, 계속해서 따르는 것입니다. 이 음성은 이 시간 설교를 전하는 저나 설교를 듣는 우리 성도님에게 오늘도 울리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은 2천 년 전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울립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하며 그래도 인생의 봄날은 재물이 가져다 주는 것야 라고 하는 성도에게도 울립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재물에 의해 시험들고 마음이 식어버린 성도님에게도 울립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속은 재물의 빈궁으로 마음이 허전한 성도님게도 울립니다. 인생의 봄날을 보내는 청년에게도, 삶의 무게를 오래 지고 온 장년과 노년에게도 울립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
그런데 이 음성을 들은 청년은 왜 따르지 못했을까요? 무엇이 그의 발을 붙잡고 있었을까요?
2. 우리는 소유가 "따름"의 문을 막아서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21-22).
왜 그는 그 음성 앞에서 돌아섰습니까? 왜 그 음성을 거부했을까요? 왜 그 음성이 독이 되었을까요?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막 10:21)
여기서 한 자지 부족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99점을 맞은 학생에게 1점을 더 채워 100점을 만들라는 의미의 가벼운 보충 과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건물로 치면 '기초'와 같아서, 그 한 가지가 빠지면 그가 쌓아 올린 나머지 99가지의 종교적 행위가 모두 무너져 내리는 치명적이고 근본적인 결핍을 뜻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한 가지'는 다음 세 가지 영적 차원을 의미합니다.
첫째, 제1계명입니다. 우상(재물)을 버리고 하나님만 참 신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19-20절에서 살인, 간음,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이웃과의 관계(십계명의 제2돌판)'에 대한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을 철저히 어기고 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에게 재물은 단순한 생활 수단이 아니라, 그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미래를 보장해 주는 '신(God, 맘몬)'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부족했던 한 가지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속의 우상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주재권(Lordship)입니다. 내 삶의 통제권을 완전히 내어드리는 전적 의존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내가 내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인생의 통제권을 자신이 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그를 가난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그토록 꽉 쥐고 있는 삶의 통제권, 돈이 주는 그 안전보장(Security)을 다 내려놓고, 이제부터는 맨몸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느냐?"라는 주재권의 이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부족했던 한 가지는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철저히 항복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셋째는 참된 보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 (따름)입니다.
"다 팔아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버리는 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21절의 결론은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입니다. 그에게 부족했던 가장 치명적인 한 가지는 율법적 행위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생이라는 '목적'은 원했지만,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세상의 보화보다 예수님을 더 큰 보화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즉, 그에게 부족했던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가장 절대적인 가치로 삼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결국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우상(재물)을 내려놓고, 예수님 그분 자체를 참된 보화로 여겨 전적으로 따르는 마음"입니다.
부족한 그였지만 예수님을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한 개인을 향해 이토록 명시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신 것은 이 구절이 유일합니다. 무리를 향한 사랑도, 제자들을 향한 사랑도 아닙니다. 바로 이 청년 한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어떤 조건과 상황에 처했다할 지라도 우리를 사랑합니다. 우리 성도님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드린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우리 성도님을 사랑하십니다. 다 나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의 결점을 보시기 전에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허세도, 자기 의도, 아직 벗지 못한 소유의 사슬도 다 보시면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족함, 허물, 단점, 위선, 욕심을 다 보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다 팔라"는 말씀은 정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미워서 쓴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아픈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미워해서 중독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봄날을 살아가는 이 청년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데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진단합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1절)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재산을 다 팔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마태에게도 니고데모에게도,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이 청년에게만 이 말씀이 필요했습니까?
그것은 이 청년에게 재물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막고 있는 문빗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배가 그 문빗장이었습니다. 레위에게는 세관이 그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많은 재물이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진단은 놀랍도록 개인적이고 정확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왜 이삭이었습니까? 이삭이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인생의 봄날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우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짜 신입니다. 미신적 사고입니다. 그것이 목자가 되고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결국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 청년은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백화점의 화려한 진열대 앞에 누이시며, 사고 싶은 것이 가득한 쇼핑몰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안락함으로 마비시키시고, 성공이라는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탐욕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비록 파산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함은, 내 주머니의 신용카드와 통장의 잔고가 나를 안위하심이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호화로운 만찬을 차려 주시고, 명품과 브랜드로 내 머리에 기름 바르셨으니, 내 허영의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할부금과 대출 이자가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영원히 돈의 노예로 살리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서 지었던 그 '슬픈 기색'과 '근심'의 정체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많이 소유할수록, 그 소유물이 결국 우리를 소유하게 됩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손실 회피 편향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10만 원을 주웠을 때 느끼는 행복의 크기보다, 10만 원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고통의 크기가 약 2배 이상 크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봄날에 주어지는 소유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방해 요소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소유가 주어지면 그것을 가지고 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소유가 거짓 목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돈이 가짜 안식처가 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면, 돈은 우리를 끊임없는 '소비와 비교'의 장소로 내몹니다. 그곳엔 화려함은 있지만 영혼의 참된 쉼은 없습니다. 돈이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한다고 했지만, 돈을 목자로 삼은 자는 주머니의 '카드'와 '잔고'가 줄어들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공포를 느낍니다.
부자 청년은 돈이 자신의 목자였기에, 진짜 목자이신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목자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가짜 목자는 결국 우리를 버리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얻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지킬 수 없는 가짜 목자를 내려놓고, 우리를 영원히 지키시는 참된 목자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간절한 초대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봄날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묻고 계십니다. "네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이 재산입니까? 자녀에 대한 집착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입니까? 노후에 대한 불안입니까? 이름이 무엇이든, 그것이 지금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발을 붙잡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함정입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영원한 봄날을 보장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잠깐의 봄날 함정을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봄날의 모든 함정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르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질까요?
3.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지킬 수 없는 것을 내어주고, 잃을 수 없는 백 배의 은혜와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21, 23-31)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시면서 약속을 합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그리하며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입니다.
하늘에서 보화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절대 빼앗기지 않는 '궁극의 안전 자산'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29-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결국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무엇이 주어진다는 것입니까? 영생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영생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생을 얻는 것은 무엇으로 얻게 됩니까?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충격을 받고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주님은 기독교 복음의 가장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아뒤나톤)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절)
여기서 '할 수 없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뒤나톤'은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부자 청년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줄 알았습니다(17). 이 젊은 부자는 영생을 계명을 지킴으로 얻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18,19). 영생을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주님을 따르는 관계인 것을 모른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자기 의에 무엇인가 한 가지를 더함으로 얻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더 할 수 없는 한 가지(돈을 버리는 것)'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7)는 말씀으로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정보를 넘어, 부부가 서로를 경험하며 깊이 신뢰하듯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갖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영생은 단순히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그분의 성품과 기쁨에 참여하는 삶의 질을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참된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존귀한 분을 얻고, 그분과 사랑의 교제를 누리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늘의 보화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라고 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영생의 최종적인 형태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3)
영생이란,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혜(구원론)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성부 하나님의 신적 생명(신론)이며,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이 땅에서 이미 누리기 시작하여(실현된 종말론), 마침내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미래적 종말론) 완전하고 전인적인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모두가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30). 이것이 인생의 봄날을 살게 만드는 가장 영원한 안전 자산입니다. 예수님은 땅의 재물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고 선언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마 6:19-20)
둘째, 썩어질 것을 ‘버릴 때’, 잃을 수 없는 백 배의 축복을 누립니다. (28-30절)
21절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집과 전토(부동산)'를 잃는 것이 두려워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반면 28절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 재산을 지키려다 결국 영원한 생명도, 참된 평안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기꺼이 버렸습니다. 여기서 '버렸다'는 뜻의 헬라어 '아페켄'은 단순히 물건을 쓰레기통에 던졌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얽매고 있던 것들로부터 결별하여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돈의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와 존재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제는 돈의 통치가 아니라 예수님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꽉 쥐고 있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결핍과 불안에 시달리며 남과 비교하는 지옥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을 것"(30절)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역설입니다. 부자 청년에게 재물은 자기를 지켜주는 '우상(신)'이었기에 주님은 그것을 해체하려 하셨고, 제자들에게 재물과 가족은 주님을 위해 '내어놓은 헌신'이었기에 주님은 그것을 영광스럽게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상으로 움켜쥐면 모래처럼 빠져나가지만, 주권자이신 주님께 내어드리면 생명의 풍성함으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현세에서 백 배나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내가 주님을 위해 1억 원짜리 집을 포기하면, 주님이 현세에서 100억 원짜리 빌딩을 주신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본문에 있습니다. 주님은 집과 전토만 100배로 주신다고 하지 않으시고, '어머니와 형제와 자매'도 100배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적인 어머니를 100명 가질 수는 없습니다. 즉, 이 백 배의 축복은 문자적인 숫자나 개인의 사유재산 증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우주적인 영적 가족, 바로 교회 공동체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자신의 집과 전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내 소유의 집은 하나도 없을지언정, 예루살렘에 있는 수만 명의 성도의 집이 곧 내가 거할 수 있는 집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선교지에 가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따뜻한 밥을 내어주며, 나를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주는 수많은 영적인 어머니, 형제, 자매들의 집과 식탁을 공유하게 됩니다. '나의 사유재산'이 '우리의 공유된 은혜'로 확장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약속하신 현세의 백 배의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물질적 축복은 제외되는 개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물질적 축복을 누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물질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과거에는 나 자신의 안전과 과시를 위해 물질을 모았다면, 이제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물질을 '사용'하게 됩니다. 소유권 이전을 통해 청지기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병상에 누웠을 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구역 식구들이 찾아와 내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해 줍니다. 내 아이가 방황할 때 주일학교 교사가 자기 아이처럼 품고 기도합니다. 가난으로 학업을 포기하려고 할 때 누군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학업의 길이 열립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장학 헌금을 드립니다. 한 번도 방문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선교 헌금을 보내어 교회를 건축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주님 안에서 누리는 '백 배의 축복'입니다.
셋째, 세상과 다르게 살기에, 거룩한 '박해'도 겸하여 받습니다. (30절)
"박해를 겸하여 받고(메타 디오그몬)." 여기서 '박해'(디오그모스)는 복수형으로 쓰였습니다. 어원은 ‘뒤쫓다, 사냥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내 의지나 실수와 상관없이, 세상의 가치관과 거꾸로 살기 때문에 외부(세상)로부터 가해지는 적대감과 물리적, 사회적 불이익을 뜻합니다. 어쩌다 한 번 겪는 큰 시련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일상 속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쫓기고 겪어야 하는 불편함과 저항'을 의미합니다. 사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 그 기록 시기는 대략 주후(A.D.) 64~70년경,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는 초대 교회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습니다. 네로 황제의 대박해가 있었습니다. A.D. 64년, 로마 시내에 대화재가 발생합니다. 성난 민심이 황제 네로를 의심하자, 네로는 그 책임을 당시 소수 종교였던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이때부터 국가 공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사냥(디오그모스)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처형 방식은 끔찍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생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씌운 뒤, 원형 경기장에 풀어 굶주린 사자나 맹견들에게 산 채로 찢겨 죽게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기둥에 묶은 뒤, 몸에 타르나 기름을 발라 불을 붙여 황제의 정원을 밝히는 야간 조명(가로등)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기에 참수형을 당했고, 마가의 영적 아버지이자 복음서의 실질적인 증언자였던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로마의 다신교 축제에 참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인류를 미워하는 자들' 혹은 '무신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이들은 길드(상업 조합)에서 쫓겨나 직업을 가질 수도, 장사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경제적 파산이 기본값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로마 군인들의 추적을 피해, 햇빛조차 들지 않는 시체 안치소인 '카타콤(지하 무덤)'으로 숨어들어야만 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12절에서 예수님은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로마 교회 성도들의 뼈아픈 현실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형벌이 두렵거나 현상금에 눈이 먼 이웃, 노예,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리스도인들을 관청에 고발하고 밀고했습니다. 내가 믿었던 가족에게 등 뒤에서 칼을 맞는 배신감은, 맹수에게 찢기는 것보다 더 큰 내면의 고통이었습니다. 마가는 지금 언제 사자 굴에 던져질지 몰라 벌벌 떨고 있는 카타콤 안의 성도들을 향해 이 복음서를 썼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영광의 왕좌에만 앉아 계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먼저 배신당하셨고, 조롱당하셨고, 가장 끔찍한 십자가에서 찢기셨다. 부자 청년처럼 땅의 보화를 지키려다 영생을 잃지 말자. 예수님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박해를 겸하여 받고"라는 말씀은, 피비린내 나는 핍박 속에서도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만드는,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한 가장 강력한 '순교의 격려'이자 '생명의 매뉴얼'이었던 것입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사자 굴에 던져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 속의 교묘한 '디오그몬(박해)'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직장에서 불의한 타협을 거절했더니 승진에서 누락되고 "너 혼자 깨끗한 척하냐"며 소외당합니다. 주일 예배를 지키기 위해 황금 같은 주말의 비즈니스 모임과 인맥을 포기하며 감수해야 하는 경제적 불이익이 있습니다.
성공과 성적만을 최고로 치는 세상에서, 자녀에게 학원 대신 예배당에 가자고 할 때 주변 학부모들로부터 받는 한심하다는 시선이 있습니다.
이 거룩한 마찰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과 내가 톱니바퀴처럼 너무 잘 맞아떨어지며 아무런 마찰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세상과 똑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방향으로 걷기 시작할 때 세상과 부딪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박해는 내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가장 확실하고도 영광스러운 증거입니다.
31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세상의 눈에 부자 청년은 가장 먼저 된 자, 성공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원한 생명을 놓쳤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가진 것 없는 촌부요 나중 된 자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생명을 얻고 영원토록 빛나는 교회의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대역전입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영원한 영생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로 다짐하고 우리 성도님들, 오늘 예배당 문을 나서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때, 여러분의 손을 한 번 가만히 내려다보십시오.
무엇을 그렇게 꽉 쥐고 계십니까?
그것이 정말 여러분을 영원히 지켜줄 수 있습니까?
봄날의 벚꽃처럼 화려해 보이지만 곧 흩어질 세상의 함정 속에서,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그거 쥐고 있으면 네가 죽는다. 나를 따르라." 지킬 수 없는 내 자존심, 내 통장, 내 불안을 십자가 앞에 내어드립시다. 내 힘의 불가능(아뒤나톤)을 고백하며, 영원히 잃을 수 없는 십자가의 은혜와 백 배의 영적 가족을 누리며, 거룩한 핍박마저도 기쁨으로 이겨내는 참된 제자의 길을 걷기로 결단합시다.
마가복음 2장 14절에 나오는 마태(레위)을 보십시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음성은 같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나 결과는 다릅니다.
이 부자 청년은 열심히 달려와 무릎을 꿇고도 돌아섰습니다. 레위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불림을 받아 일어났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열정의 크기가 아닙니다. 달려온 사람이 졌고, 앉아 있던 사람이 이겼습니다. 도덕적 수준의 차이도 아닙니다. 계명을 다 지킨 사람이 떠났고, 동족을 착취하던 세리가 따랐습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입니다. 손을 여는가, 쥐는가. 주님이 사랑을 받아들이는가? 외면하는가입니다.
레위는 세관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그의 전부였지만 내려놓았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새 이름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란 이름을 가진 마태는 세관에 묶였던 사람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유를 붙든 사람은 이름도 없이 성경에서 사라졌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관계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라"고 하시지 않고, "나를"이라고 하셨습니다. 프로그램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종교는 규칙을 줍니다. 철학은 원리를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줍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살아 있는 관계로의 초대입니다. 신앙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방향의 전환을 위하여 초대하십니다.
이 청년의 삶은 지금까지 자신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더 소유하고, 더 올라가는 방향으로. 예수님은 그 방향 자체를 바꾸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향한 삶에서 예수님을 향한 삶으로 방향을 바꾸라고 초청합니다.
예수님은 함께 가는 여정으로 초청하십니다.
"따르라"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한 순간의 결단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매일 따릅니다. 오르막에서도, 내리막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골짜기에서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함께 하자고 초청하십니다. 바울은 이 부르심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빌 3:8)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배를 버렸지만, 더 큰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영생이 있고 예수님의 품 안에서는 인생의 참된 봄날을 누리는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봄날에 우리를 사랑하시면 우리를 초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영원토록 참된 쉼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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