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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5) 버림받음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마태복음27:45-4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35453 추천수:2 218.147.218.173
2026-03-29 13:21:25

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5) 버림받음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

마태복음27:45-46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본 가장 춥고 외로웠던 인생의 겨울은 언제였습니까? 육체적인 질병이나 경제적인 어려움도 크지만, 우리 영혼을 가장 얼어붙게 만드는 고통은 아마도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고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순간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에게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도 나는 혼자인가하는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손절'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메시지를 보냈는데 읽지도 않고 지나갈 때, 함께 있어도 나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할 때, 사람은 단순히 기분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아픔을 느낍니다. 사실 이 두려움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히 살아가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나는 사랑받지 못할지 모른다”, “나는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버림받음'은 그저 마음속의 막연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사회 이면에서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벌어지는 현실입니다.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한 해 동안 차가운 길거리나 베이비박스에 완전히 버려지는 갓난아기가 88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가족에게 버려지고 방치되는 노인 학대 건수가 한 해에 7천 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한창 사랑받아야 할 우리 아이들 중 무려 1만 명(하루 27명 꼴) 이상이 교실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는 '집단 따돌림(왕따)'의 지옥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부부는 어떻습니까?

오늘 한국 사회에는 공식 통계로도 한 해 88천 쌍의 부부가 이혼한다고 합니다. 하루로 계산하면 약 241쌍입니다. 그러나 통계에 잡히지 않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함께 살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버림받은 채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이혼정서적 버림으로 같은 집에 살아도 혼자이고, 같은 밥을 먹어도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버림받은 사람의 마음에는 슬픔만 오는 것이 아니라, 충격과 수치심과 분노와 외로움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오늘 예수님이 버림받은 장면이 나옵니다. 4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군병들은 잔인하게 주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군병들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모욕과 조롱을 거침없이 가하였습니다. 주님의 옷을 벗겨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고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습니다. 손발에 잔인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야비한 무리들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향하여 머리를 흔들며 조롱하였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강도들도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께 욕을 퍼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 유다, 베드로에게 철저하게 버림을 당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 군병들, 무리에게 버림받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죄를 대신 지신 대속적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적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권력을 지키려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안위를 챙기려는 정치인에게, 기대가 꺾이자 분노한 대중들에게, 형을 집행하는 로마 군인들에게, 그리고 3년을 함께한 가장 믿었던 제자들에게까지... ,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완벽하고 철저하게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부터 3시까지 조용히 침묵하셨습니다. 3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왜 버리셨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처절한 고통을 견디고 견디다가 한계에서 토하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절규이며 슬픈 비명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멸망하는 죄인이 부르짖는 통곡의 탄식을 하신 것입니다. 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 버림받아야만 했습니까?

 

1. 예수님은 왜 버림받으셔야만 했습니까?

온 우주에서 가장 거룩하고 완벽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버림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1)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부르실 때의 호칭을 자세히 보십시오. 예수님은 평소에 기도하실 때 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태초부터 단 한 번도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부자 관계가 끊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만큼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My God)!"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 예수님은 사랑받는 '아들'로서 아버지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재판장'의 무서운 진노 앞에 선 '죄인'의 신분으로 서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 베드로전서 222절은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라고 말씀하고, 히브리서 415절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단 1그램도 없는 완벽하게 깨끗한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죄인으로 서 계십니까?

법정에서 일어난 일을 상상해 보십시오. 무서운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사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판사복을 벗고 내려와 그 범죄자의 수의를 대신 입고 사형장으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진짜 범죄자에게는 무죄를 선고하고 풀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535절과 6절에서 이 위대한 교환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버림받음은 자기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단지 고통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교만, 우리의 음란, 우리의 미움, 우리의 거짓, 우리의 하나님 없는 삶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잘못으로 버림받으신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내 자리에 서서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내가 받을 '심판과 저주'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버림받으셨습니다.

본문 4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유대 시간으로 제육시는 낮 12, 제구시는 오후 3시입니다.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날씨 변화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둠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대낮에 임하는 흑암은 항상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우주적인 심판을 상징했습니다(8:9). 애굽에 내렸던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 재앙'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진노의 잔을 쏟아붓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단지 사람의 미움만 당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은, 그저 너무 아프고 외로워서 감정적으로 투정한 것이 아닙니다. 원어인 헬라어로 '버리다(엔카탈레이포)'라는 단어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철저히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고,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무서운 뜻입니다.

로마서 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셔서 죄를 그냥 눈감아주실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사망의 심판을 누가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높은 건물의 꼭대기에 설치된 '피뢰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캄캄한 밤, 수만 볼트의 무시무시한 벼락이 집을 향해 내리칠 때, 피뢰침이 그 모든 벼락을 혼자 다 맞아냅니다. 피뢰침이 새까맣게 타버리는 대신,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하게 살아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주적인 피뢰침이 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생명과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완벽하게 끊어지는 '지옥의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내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진노의 벼락, 우리가 받아야 할 버림받음의 저주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다 맞아주셨습니다. 내가 식당에서 밥을 다 먹고 나갈 때 5만 원을 내야 하는데, 내 친구가 이미 내 밥값 5만 원을 계산했다면 식당 주인은 나에게 다시 돈을 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미 값이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3)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품으로 데려가기 위해'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무서운 버림받음을 당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단지 벌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찢어지고 끊어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다시 영원히 이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 318절은 이 위대한 목적을 정확히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의 목적은 단지 죄책의 제거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으신 이유는,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멀리 떠났던 죄인을 다시 아버지 품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의 자리에 서신 것은,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고아처럼 내쫓기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시편 221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고난받는 의인의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시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끝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시기 위해 철저히 버림받으셨습니다

 

2. 예수님은 버림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우리가 믿었던 친구나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면 어떻게 반응합니까? 보통 세 가지 중 하나입니다. 나를 버린 사람을 향해 분노하고 복수하거나, "나는 쓰레기야"라며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아니면 버림받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버리고 사람들에게 굽신거리는 노예가 됩니다.

그렇다면 온 우주에서 가장 끔찍하게, 믿었던 제자들과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에게까지 철저히 버림받으셨던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1) 예수님은 버림받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침묵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믿음이 무너졌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제 다 끝이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라고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은 있었지만 불신앙은 아니었습니다. 고통은 있었지만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외침은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편 221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편은 버림받은 것 같은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침내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외침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말씀을 붙든 기도이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매달리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성경은 이런 믿음의 기도를 예수님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시편 13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하박국 선지자도 그랬습니다. 하박국 1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욥도 그랬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눈물과 질문을 쏟아 놓았습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고통이 너무 커서 질문은 했지만,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절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또 히브리서 57절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참된 믿음은 모든 것이 잘 이해될 때만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도 그래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버림받을 때, 기도하십시오. 상처받을 때, 기도하십시오. 이해되지 않을 때, 기도하십시오. 눈물이 날 때, 기도하십시오.

 

2)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당할 때 복수가 아니라 용서로 반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떠났고, 사람들은 조롱했고, 군병들은 수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절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상처받으면 쉽게 말합니다. “두고 보자.” “나도 갚아주겠다.” “절대 용서 못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큰 상처의 순간에 용서로 가장 큰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지 죄 사함의 사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3년 반 동안 먹여주고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철저히 배신당하고 버림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침을 뱉고 조롱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향해 침을 뱉고 조롱했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십자가 위에서 "이 배신자들아, 두고 보자!"라고 저주를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찌르는 자들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버린 자들의 뺨을 때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조롱과 배신을 온몸으로 흡수하시며 용서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도 버림당할 때 예수님처럼 하려고 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버림당할 때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으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채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653절을 보면, 예수님은 당장에라도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불러 자기를 찌르는 로마 군인들을 싹 쓸어버리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훌쩍 뛰어내려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슈퍼스타가 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18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예수님은 억지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버림받은 희생양이나 패배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버림받음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예수님 스스로 버림받는 그 무서운 자리를 선택하고 끝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으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버림받을 때마다 사람을 원망하고 나를 미워하며 사명을 회피하며 무너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은 가장 끔찍하게 버림받으신 그 순간에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시며, 자발적으로 생명을 내어주시며 인류 구원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3. 버림받음의 감옥에서 벗어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내일 직장에 가면 모든 동료가 나를 좋아해 줄까요? 직장에서 늘 승승장구할까요?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상처를 받을 수 있고, 가정에서도 외로울 수 있고, 세상에서는 여전히 오해와 배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버림받음의 공포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1)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영원한 수용에 닻을 내리십시오.

누군가 나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사람의 반응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838절과 39절은 선언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무시당할 때, 거절 당할 때, 외로울 때, 버림받았을 때 이 말씀을 붙드십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나를 밀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하나님은 밀어내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나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오해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내 가치를 몰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피 값으로 나를 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인정이 없을 때 무너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합격 여부는 이미 십자가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받아들여진 존재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이라는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르고 저와 우리 성도님을 "내 사랑하는 자녀"로 완벽하게 받아주셨습니다. 대통령이 나를 경호하고 인정해주는데, 동네 골목 대장이 나를 무시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망합니까? 아닙니다. "그래, 너희들이 내 성적과 외모를 보고 나를 무시해도 괜찮아.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실 만큼 나는 눈부시게 존귀한 사람이야!" 이 십자가의 배짱을 가지십시오. 사람들의 얄팍한 '좋아요'에 목숨 걸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합격' 판정 안에 평안히 머무르십시오.

이번 한 주간,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2) 나를 버린 사람을 향한 복수 대신 복음으로 용서하십시오.

우리를 배신하고 버린 사람을 향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분노하고 앙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43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것은 단순히 "네가 착한 사람이니까 꾹 참고 용서해라"는 도덕적인 권면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사실 하나님을 가장 처절하게 배신하고 무정하게 버렸던 장본인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내 맘대로 살겠다고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은 내게 복수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나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내가 그 엄청난 배신을 저지르고도 조건 없는 용서를 받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찌르고 버린 그 친구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용서는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손에 들고 있던 보복의 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내 힘으로는 못 합니다. 그러나 나를 용서하신 은혜로 저 사람을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사명을 가지고 내 곁에 버림받은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십니오.

십자가를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변화 중 하나는, 이제 다른 사람의 외로움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복음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인정받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인류 구원에 있습니다. 성도의 궁극적이며 공통적인 사명은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해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소외된 사람 곁으로 갑니다. 혼자 있는 친구를 봅니다. 늘 말이 없는 성도를 봅니다. 상처받아 움츠러든 지체를 봅니다. 그리고 외면하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 건네십시오. 같이 밥 한 끼 하십시오. 안부를 물으십시오. 기도해 주십시오. 누군가의 겨울에 작은 봄이 되어 주십시오.

직분자 중에는 복음 전하여 생명을 구원사역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못다니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교회의 부정적인 이야기만 합니다. 이런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있는 교회가 교회냐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화평과 희락이라고 했는데 가는 곳마다 의를 무너뜨립니다. 가는 곳마다 희락을 없애 버립니다. 가는 곳마다 화평을 파괴해 버립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하며 다 이루었다고 고백한 예수님처럼 누구에게 버림을 당한다 할 지라도 주님이 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내게 먼저 다가오셨듯이, 이제 우리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의 삶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생의 겨울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거절당하고, 기대했던 관계가 무너지고, 내 마음이 버려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오늘 본문을 기억하십시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임한 어둠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들려온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외침은 패배의 외침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을 이루시는 대속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심판을 담당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신 믿음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이 버림받으셨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영원히 버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심판을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셨기에, 우리도 인생의 겨울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평가에 인생을 맡기지 마십시오. 복수의 칼을 움켜쥐고 살지 마십시오. 버려진 이웃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이번 한 주간 이렇게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한 번씩 고백하십시오. 용서하기 어려운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외로운 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십시오.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 모두를 버림받음의 감옥에서 건져 내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담대히 살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버려두지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쉽게 흔들리고,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며, 때로는 상처 때문에 분노와 자기 연민에 빠졌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담당하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그 사랑을 오늘 다시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 예수님이 버림받으셨기에 우리가 영원히 버려지지 않는다는 복음의 확신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옵소서.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닻을 내리게 하시고, 상처의 자리에서 복수하지 않고 용서하게 하시며, 우리 곁에 외롭고 소외된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사랑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이번 한 주간도 십자가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시고, 우리의 말과 행동과 관계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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