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4) 죽음의 공포라는 감옥에 들려온 음성
히브리서2:14-16
우리는 3월 한 달 동안 “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수치심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숨었지만, 하나님은 숨은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절망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무너져 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시간에는 죄책감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숨기며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자복하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듣게 될 음성은 죽음의 공포 감옥에 들려온 음성입니다.
인간이 가진 두려움 가운데 가장 깊은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히브리서는 AD 64-67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독교인을 핍박한 네로가 통치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멀리 있는 주제가 아니라 현실적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몸이 이상하여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하시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죽음의 공포가 남아 있는 삶을 지배해 버립니다.
1.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아래 종노릇하는 존재입니다(15)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
여기서 “무서워하므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보스입니다. 공포,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은 모든 두려움의 뿌리입니다. 단순한 불안감이 아니라 영혼을 마비시키는 근원적인 공포를 말합니다.
그리고 “매여 종노릇 한다”는 말은 단순히 좀 불안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에 붙들려 지배당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매여 있다(에노코스)'는 법적으로 얽매여 있거나 덫에 꼼짝없이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종노릇(둘레이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인의 명령에 철저히 지배당하는 노예 상태를 말합니다. 죽음은 모든 두려움의 뿌리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붙들고, 건강을 붙들고, 젊음을 붙들고, 관계를 붙들고, 명예를 붙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죽음과 상실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의 공포는 여러 모습으로 우리 삶에 나타납니다.
1) 무(無)에 대한 공포입니다. 존재의 소멸 즉 죽음 이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두려움입니다. "나"라는 의식이 영구히 꺼져버린다는 감각은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공포 중 하나입니다.
2) 과정에 대한 공포입니다. 죽어감(dying)에 대한 공포입니다. 죽음 자체보다 죽어가는 과정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극심한 통증, 몸의 기능 상실, 타인에게 완전히 의존해야 하는 상황, 존엄성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3) 분리에 대한 공포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 즉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과 영원히 헤어진다는 공포입니다. 이는 순수하게 자기 소멸의 두려움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슬픔과 맞닿아 있습니다.
4) 미완성에 대한 공포입니다. 삶이 끊기는 것 즉 이루고 싶은 목표, 보고 싶은 것들, 해결하지 못한 관계들이 죽음으로 인해 영원히 미완으로 남는다는 두려움입니다. 특히 젊거나 뭔가를 한창 이루어가고있을 때 강하게 나타납니다.
5) 망각에 대한 공포입니다. 잊혀지는 것 즉 죽고 나서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6) 심판에 대한 공포입니다. 사후의 결과 즉 삶 동안 저지른 잘못에 대한 심판이나 지옥가는 공포입니다.
겉으로 볼 때 사람은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어느날 죽음이 앞에 다가 오면 죽음의 공포에 매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욥기 18:14에서 "그가 의지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끌려가고"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공포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타락한 인간이 이 땅에서 아무리 부와 권력의 튼튼한 장막을 짓고 스스로를 보호하려 해도, 결국 죽음이라는 무자비한 폭군 앞에서는 억지로 끌려가야만 하는 무력한 포로에 불과함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죽음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말합니다.
이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모든 권력과 부를 손에 쥐었습니다. 세상에 그가 통제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절대 권력자도 통제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바로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철저히 무너져 내리는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죽음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죽음'이나 '장례'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서복이라는 신하에게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딸려 보내 전설 속의 삼신산에서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었지만 49살 6개월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국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는 것처럼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현대에는 과학을 통한 불로초를 찾고 있습니다. 생명 연장과 역노화 기술로 생명을 연장하려고 합니다.
현대인은 영생을 쟁취하려고 노화를 질병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노화’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들과 생명공학자들은 "노화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다"라고 선언합니다. 구글이 설립한 생명공학 기업 '칼리코'나 제프 베이조스가 투자한 '알토스 랩스' 같은 기업들은 수십조 원을 쏟아부어 인간의 수명을 500세, 나아가 영원토록 연장하려 합니다. 세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기술, 극단적인 식단과 수십 알의 영양제로 자신의 몸을 기계처럼 통제하는 '바이오 해커'들은 철저히 육체의 죽음을 지연시키려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죽음을 유예시키고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현대인들이 선택하는 또 다른 도피처는 '냉동 인간'입니다. 미국의 알코어 생명연장재단 같은 곳에서는 사망 직후의 시신이나 뇌를 영하 196도의 액체 질소 탱크에 얼려 보관합니다. "지금의 의학으로는 나를 살릴 수 없지만, 미래의 뛰어난 과학이 나를 해동시켜 병을 고치고 다시 살려낼 것이다"라는 미래 과학을 향한 맹목적인 신앙입니다. 이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무한히 유예해보려는 현대판 미라 제작과 같습니다.
디지털 영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영생 추구는 육체를 아예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 기억, 자아를 컴퓨터 데이터로 변환하여 클라우드에 '업로드' 하려는 시도입니다. 늙고 병드는 고깃덩어리(육체)를 벗어버리고,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기계 몸이나 메타버스(가상현실) 속에서 디지털 데이터로 영원히 존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으로 인간의 수명을 150년, 아니 500년으로 늘려 놓는다 한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사형수가 머무는 감옥의 평수를 조금 넓히고, 사형 집행일을 며칠 연기한 것'에 불과합니다. 생물학적 수명이 늘어난다고 해서 죽음과 심판에 대한 영혼의 근원적인 공포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현대 과학의 영생 프로젝트는 죽음을 그저 '생물학적인 고장'이나 '해결해야 할 기술적 오류'로만 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이 보여주듯, 죽음은 세포가 늙어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과 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 죽음이, 결국 육체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죽음이란 단순한 호흡사, 심장사, 뇌사, 세포사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죽음이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이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 이 단절은 생명의 단절과 교제의 단절을 낳고 생명의 단절은 영적 죽음, 육적 죽음, 영원적 죽음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교제의 단절은 영적 소경, 죄의 지배, 친죄성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수명 연장은 참된 영생이 아니라, 고통과 허무함이 가득한 타락한 세상에서의 '끔찍한 연명'일 뿐입니다. 영혼 깊은 곳에 자리한 심판에 대한 근원적 공포는 과학 기술로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15,14)
1) 누구를 죽음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십니까?(15)
15절 하반절을 보면 “...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자들(호소이)이니다. "~하는 자는 누구든지 빠짐없이 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은 단어 안에는 두 가지 거대한 신학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타락한 인간 실존의 '보편성'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입니다. 왕이든 노예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철학자든 무지한 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빠짐없이 다(호소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 아래에서 종노릇하며 살아갑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 구속 사역의 '충분성'과 '제한적 속죄'입니다.
문맥(10-16절)을 주의 깊게 살피면, 여기서 구출 받는 '모든 자들'은 세상의 모든 인류(보편 구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10절의 '많은 아들들', 13절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 그리고 16절의 '아브라함의 자손(택함 받은 언약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백성이라면, 그가 얼마나 깊은 죽음의 공포와 절망의 감옥에 빠져 있든지 간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호소이)'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건져내신다"는 은혜의 선포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놓아 주려 하심이니"(아팔락세)에서 '놓아 주다'는 빚을 갚아주어 감옥에서 풀어주거나, 적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위대한 해방입니다.
2) 누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켰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주어가 “그도”입니다. 그는 누구이겠습니까? 9절을 보세요.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이십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디모데후서 1:10)
여기서 '사망을 폐하시고'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효력을 완전히 정지시키고 무효화하셨다는 뜻입니다. 한 국가의 악법이 폐지되면 더 이상 그 법으로 사람을 처벌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죄의 죗삯인 사망'이라는 영적 사형법은 성도에게 영원히 폐지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썩지 아니할 부활 생명의 법 아래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내가 진실로 진실로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3)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켰습니까?
(1) 우리와 같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고통을 당했습니다(14)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14절 상)
이 절망적인 겨울의 한복판에, 밖에서 굳게 닫힌 감옥 문을 부수고 거룩한 구원자가 침투하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이 죽음과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혈과 육'은 찢기고 병들고 끝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과 부서지기 쉬운 상태를 상징합니다. 원문을 보면 우리는 이 상태에 숙명적으로 영구히 갇혀 있습니다(완료형). 그런데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생명의 주님이, 특정한 역사의 시점에 자발적으로 이 취약한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 세상으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부정과거형).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왜 굳이 '죽을 수 있는 몸'을 입으셨습니까? 성경은 명확하게 답합니다. 죽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위대한 역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죽으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혈과 육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십자가의 의미를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이사야 53장 5-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께서 나를 대신하여 찔리시고, 찢기시고,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형벌 대속).
(2)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음과 죽음의 공포를 주는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4절 하)
사탄은 우리 죄를 참소하며 '사망'이라는 무기로 우리를 협박하는 검사의 권리를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절의 '멸하시며'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르게오는 사탄의 존재를 완전히 없앴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무기를 무력화시키고 기능을 정지시켜 버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이라는 사탄의 무기를 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그 가슴을 열고 맞으셨습니다. 마귀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예수님을 죽음으로 찔렀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파괴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오히려 죽음의 배를 터뜨려 버렸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이라는 독약을 직접 마심으로써 죽음 자체를 해독해 버리셨습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사망'은 이제 총알이 없는 빈 총, 공이치기가 뽑힌 수류탄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사탄(뱀)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육체적 죽음) 치명상을 입힐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박살 내실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완벽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와 죽음이 있는 이 세상에서 죽음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살 수 있겠습니까?
3.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굳게 붙들고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야 합니다(16-18)
1) 내 노력을 내려놓고 주님의 '붙드심'을 신뢰하십시오.(16)
세상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합니다. 의학과 과학으로 죽음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하거나(회피), 철학을 통해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며 마음을 다스리려 하거나(체념), 종교적 고행을 통해 사후 세계의 보상을 얻어내려(공로주의)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죽음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잠시 동안 진통제로 해결방법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항구적이 되지 못합니다.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여기서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에필람바네타이)는 단순히 옆에서 가볍게 손을 거들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의 멱살을 강하게 움켜쥐어 물 밖으로 끌어올리거나, 도망치는 자를 거칠게 꽉 붙잡는 '맹렬하고도 역동적인 구조 행위'를 의미합니다. 죄와 사망의 바다로 뛰어들어 가라앉는 우리의 손을 ‘꽉 움켜쥐셨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마귀들)이 아니라 흙으로 지음 받아 끊임없이 넘어지는 연약한 우리를 결코 놓치 않으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수님 만이 우리를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영원한 천국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2)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대제사장을 바라보십시오(17).
죽음의 고통과 공포 과정을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을 진짜 믿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인내하여야 합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마땅하도다"(오페일렌)는 '반드시 ~해야만 했다'라는 강한 필연성을 띱니다. 왜 성자 하나님께서 굳이 굶주리고, 피곤하며, 피 흘리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셔야만 했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 책임지는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속량하려 하심이라" (힐라스케스다이)이 단어는 '화목제물'을 뜻합니다. 단순히 죄를 덮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심판을, 죄 없는 제물이 대신 다 받아내어 그 진노를 완전히 가라앉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사를 집례하는 대제사장이신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찢어 바치는 화목제물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를 향해서는 우리의 끝없는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며,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분의 공의와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100% 만족시키신 '신실한' 분이십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세상에 무단 침입했던 '사망'이,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영원히 불못으로 추방됩니다. 이것이 역사의 종착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의 낡은 육신은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것이며,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영원히 폐기될 것입니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텅 빈 무덤이 보증하는, 결코 취소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진리가 인생의 겨울을 지나는 우리 성도님의 심령에 견고한 닻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부활의 소망으로 삶의 모든 두려움에 맞서십시오.(18)
우리는 죽음의 공포과 고통 앞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하며 능히 우리를 도우실 예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첫 번째 아담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페이라조'에 참담하게 실패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역시 광야의 '페이라조'에서 원망하며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표자이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척박한 광야에서,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 이 '페이라조'를 완벽하게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고난이 주는 극심한 고통의 무게를 우주에서 가장 뼈저리게 경험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공포를 능히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는 “위험에 처한 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그를 구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서도 우리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은 마인드컨트롤이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객관적인 복음의 진리 위에 나의 영혼의 닻을 내릴 때 주어지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선물입니다.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의 구주께서 이미 너의 독침을 꺾으셨고,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
이 위대한 선포가 여러분의 심령에 새겨질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돈과 건강과 명예에 매달리던 노예의 삶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을 기꺼이 남을 위해 내어주는 '참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소유와 성취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늙어감과 질병 앞에서도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이별의 슬픔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춥고 매서운 겨울, 병실의 적막 속에서, 혹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두려움 속에서 죽음의 공포가 여러분의 영혼을 짓누를 때마다, 십자가와 빈 무덤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이 장엄한 음성을 들으십시오.
죽음 앞에 무(無)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에게 '무(無)'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하고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꺼지는 촛불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품으로 이주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장 25-26절)
죽음 앞에 과정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까? 통증, 존엄성의 상실,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쇠약함은 참으로 두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끔찍한 쇠약함과 수치, 극한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친히 통과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그 골짜기를 먼저 통과하신 선한 목자께서 우리의 쇠약해진 손을 꽉 붙들고 계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죽음 앞에 분리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혹은 떠나보내야 하는 단절의 고통은 인간에게 가장 큰 슬픔입니다. 죽음은 무자비하게 관계를 끊어냅니다.
그러나 죽음도 끊을 수 없는 단 하나의 끈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먼저 떠난 자나 남겨진 자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을 뿐 영원히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장차 부활의 아침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완벽하게 재회할 것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4절)
죽음 앞에 미완성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까?
우리는 삶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완성해야만 내 존재가 의미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아직 해놓은 게 없는데"라며 절망합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완성은 내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 우리를 향한 구원과 영원한 가치는 이미 100% 완성되었습니다. 내 삶이 중간에 끊기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안에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벽한 '미션 클리어'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장 6절)
죽음 앞에 망각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까?
인간은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업적을 남기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이름을 떨치려 합니다. 그러나 결국 시간은 모든 것을 지워버립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을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기셨고,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를 지워도, 하나님은 영원토록 나를 기억하시고 부르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이사야 49장 15-16절)
죽음 앞에 심판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까?
모든 두려움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사실 이 '심판'에 대한 영적 본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그 두려운 심판과 형벌을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덮고 있기에,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대는 우리에게 '정죄의 자리'가 아니라 수고했다고 안아주시는 '영광과 상급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법적으로 심판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장 1-2절)
이 6가지의 맹렬한 공포는 결국 "죽음이 끝이다" 혹은 "내 행위로 심판받는다"는 세상의 거짓말에 속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 모든 거짓말의 사슬을 끊어버리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죽음의 과정이나 이별의 슬픔, 잊혀짐과 미완성의 두려움에 흔들릴 때마다, 이미 심판을 이기시고 생명으로 저를 꽉 붙들고 계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이 놀라운 복음의 음성이 질병과 늙어감,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심령에 굳건한 반석이 되기를,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부활의 소망으로 오늘을 담대히 사랑하며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죽음을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6.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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