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3) 죄책감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
시편32:1-5
오늘은 한 때 죄책감의 노예로 살았던 다윗의 시를 통해 죄책감의 감옥에서 들려오는 음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다윗은 완벽한 왕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백성의 환호를 받으며, 왕궁에서 호화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1년여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그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삼하11장). 왕의 권력으로 모든 증거를 지웠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내면은 지옥이었습니다.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고, 영혼의 진액이 말라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어두운 감옥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자물쇠의 이름은 바로 '죄책감'이었습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도 마음 한편에도 그런 감옥이 있지는 않습니까? 오래 묻어 둔 죄가 있습니까? 여전히 말하지 못한 후회가 있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책임이 많아지고, 지나온 세월도 길어지고, 그만큼 마음속에 남는 흔적도 많아집니다.
가정 안에서 남긴 상처, 자녀를 향한 미안함, 배우자에게 하지 못한 사랑, 돌아가신 부모님께 다하지 못한 효도에 대한 후회, 믿음으로 살지 못했던 순간들, 남들에게 절대 말 못 할 치명적인 실수, 자신만 아는 반복되는 영적 실패 등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지 못한 죄와 죄책감이 우리 마음 한편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조용히 자신을 성찰할 때 '나는 위선자야'라는 자기 정죄의 어두운 방, 죄책감 안에서 조용히 무너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죄책감 자체가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죄책감은 우리의 양심을 깨우고, 잘못을 돌아보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죄책감이 회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자기정죄로 굳어질 때입니다.
그때 죄책감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32편은 그 죄책감의 감옥에서 빠져나온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죄책감의 감옥 문을 여는 복음의 열쇠를 함께 손에 쥐고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죄책감의 감옥에 갇히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1. 죄를 숨길 때, 감옥의 벽은 더 두꺼워집니다(3–4절)
죄를 숨기면 숨길수록 죄책감의 수렁에 빠지게 되고 결국 무너집니다. 유명인들이 어느 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언론에서 봅니다. 사람들은 죄를 숨기면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착각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죄를 범했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까지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 죄를 덮은 채 살아갔습니다. 겉으로는 왕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일상이 굴러갔습니다. 겉으로는 다 괜찮아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속은 전혀 괜찮지 않았습니다.
1) 영적으로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쓰인 히브리어 '하라쉬'는 단순한 침묵이 아닙니다. “귀머거리가 되다, 의도적으로 외면하다”라는 말입니다. 즉 은혜의 보좌를 향해 스스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는 '영적인 고집'을 의미합니다.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배로부터 멀어집니다. 진실한 기도가 없습니다. 입술에 찬양도 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대면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집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이사야 59장 1-2절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2) 정신적으로 종일 신음을 합니다.
'입(하라쉬)'은 굳게 닫혔지만, 마음은 '종일 신음(샤아그)'했습니다. 이 '샤아그'는 사람이 끙끙 앓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자가 표효하는 것, 짐승이 울부짖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철저히 입을 닫았지만, 마음은 고통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숨긴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덮는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길수록 더 깊이 스며듭니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마음과 몸이 먼저 압니다. 양심이 압니다. 영혼이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종일 신음하였다”고 말합니다. 낮에도 괴롭고 밤에도 괴롭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웃고 있는데, 속에서는 신음이 나옵니다. 예배도 드리고,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지만, 안쪽에서는 계속 무너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남에게 상처 준 일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반복해서 넘어지는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점점 속이 메말라 갑니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일러바치는 심장>을 보면, 한 노인을 살해하고 시신을 방바닥 마루 밑에 완벽하게 숨긴 범인이 등장합니다. 경찰이 와서 방을 다 뒤져도 흔적을 찾지 못하자 범인은 속으로 쾌재를 부릅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숨겼다고 안도하는 바로 그 순간, 범인의 귀에 '쿵... 쿵...' 하는 죽은 자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환청이었지만 소리는 점점 커졌고, 결국 죄책감과 공포에 미쳐버린 범인은 스스로 마루판을 뜯어내며 절규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하라쉬(숨김)'의 결과로 찾아오는 '샤아그(절규)'입니다.
3) 몸이 쇠합니다.
“내 뼈가 쇠하였도다(발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쇠하다'로 번역된 '발라'는 "(오래된 옷이나 신발처럼) 닳아 없어지다, 부식되다, 낡아 빠지다"라는 뜻입니다. 죄를 숨기고 있을 때, 다윗의 가장 단단한 신체 기관인 '뼈'조차 마치 산성비에 부식되듯 녹아내렸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언어이지만 동시에 삶의 언어입니다. 죄를 숨기고 사는 사람은 영혼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쁨도, 평안도, 생기도 잃어버립니다. 육체의 건강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긴밀하게 연결된 전인적 존재입니다. 창조주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죄책감이 영혼을 짓누를 때, 육신 역시 무사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갉아먹는 파괴적인 독(毒)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책감은 영혼의 노화를 촉진하고 생명력을 소진시킵니다.
4) 삶이 양심이 가책으로 피폐해집니다.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주의 손(야드)'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의 상징입니다. '누르다(카바드)'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무거운 손이 밤낮으로 나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괴롭게 한 것은 단순히 양심의 불편함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미워하셔서 누르신 것이 아닙니다. 버리셔서 누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다윗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죄 가운데 편안하게 그냥 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불편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찔릴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자꾸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데 외면할 수 없는 죄가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구나”를 들어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마음의 고통을 다 숨겨진 죄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오래된 상처 때문에 괴롭고, 어떤 분은 우울과 불안으로 지쳐 있고, 어떤 분은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성급하게 “당신이 죄를 숨겨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보여 주실 때, 그것을 외면하면 사람은 더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숨김은 치유가 아닙니다. 침묵은 평안이 아닙니다. 회피는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복을 주시고 자유를 주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셔야 하는데 죄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짓누르는 양심의 가책으로 매일 삶이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권력도 있고 부도 있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진액(레샤드)'이 빠져버렸습니다. 진액은 식물에 흐르는 수분, 혹은 인간의 몸속에 있는 "생명의 수액, 활력"을 뜻합니다. 죄는 마치 거머리처럼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달라붙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기쁨, 평안, 소망이라는 영적 활력을 모조리 빨아먹습니다. 아무리 왕궁의 화려한 음식을 먹고 푹신한 침상에 누워도, 죄를 품고 있는 다윗의 영혼은 치명적인 '탈수 증세'를 겪고 있었습니다. 죄가 주는 쾌락은 일시적이지만, 그 대가는 생명의 활력을 마르게 합니다. “여름 가뭄(하라본)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하파크ְ)"라고 고백합니다. 가뭄은 "완전히 뒤집히다, 변형되다"는 뜻입니다. 마름은 팔레스타인 지역 특유의 모든 식물을 바싹 태워버리는 "타는 듯한 한여름의 건조한 열풍"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삶이 한 줌의 재처럼 바싹 타버렸다는 처절한 묘사입니다. 다윗이 죄로 인해 겪었던 이 끔찍한 갈증과 타는 듯한 가뭄(하라본), 그리고 하나님의 무거운 손(카바드)에 짓눌리는 저주는 사실 다윗을 넘어 우리 모두가 지옥에서 영원히 겪어야 할 마땅한 형벌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떠나 죄 때문에 영원히 겪어야 할 영적인 탈수(레샤드)와 지옥의 가뭄(하라본)을 겪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천국 생활을 해야 하는데 죄와 죄책, 죄책감은 우리를 지옥처럼 살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죄를 숨기고 있을 때 우리 영혼이 경험하는 겨울입니다.
오늘 혹시 이런 분이 계십니까? 겉으로는 버티고 있지만, 속으로는 메말라 가는 분. 하나님 앞에서 피해 다니고 있는 분. 기도는 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빼고 있는 분. 주님은 오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숨지 말고 내게 오라.” “도망치지 말고 말하라.”
“덮지 말고 가지고 오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2. 십자가 앞에 항복할 때, 감옥 문이 열립니다(2절 상, 5절)
죄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면 길이 열립니다. 지옥 같은 가뭄 속에서 말라가던 다윗에게 마침내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두 가지 결단이 있었습니다.
1) 핑계라는 무화과나무 잎을 찢어버렸습니다
5절의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다윗은 죄를 덮으려는 시도를 포기했습니다. 더 이상 핑계 대지 않습니다. 더 이상 포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가지고 나옵니다.
2절에서 다윗은 이제 마음에' 간사(레미야)'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간사는 ‘위장, 기만, 속임수’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대단한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는 먼저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숨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저 사람도 잘못했잖아요.”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원래 저는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요.”
이런 말들 속에는 어느 정도 사실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회개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힘으로는 저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를 망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회개는 자기를 살리는 길입니다. 숨기면 내가 무너지고, 자백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열립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후 무화과나무 잎으로 수치를 가리고 나무 뒤에 숨었듯, 우리는 도덕적 우월감, 피해자 논리, 종교적 열심이라는 잎사귀로 내면의 부패를 덮으려 합니다.
초대 왕 사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도 "백성들이 제사하려고 좋은 양을 남긴 것입니다"라며 끝까지 상황 탓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단 한마디의 핑계도 대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구원의 위대한 역설은 이것입니다. 내가 내 죄를 덮으려(카사) 하면 하나님이 끝까지 드러내시고, 내가 덮으려는 시도를 포기하면 하나님이 보혈로 덮어주십니다.
2) 전격적으로 항복했습니다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여기서 '자복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히 정보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손을 펴다, 내던지다' 즉 내 손에 쥐고 있던 모든 방어 무기를 내려놓고 완전히 항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일1:9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회개는 "제가 이러저러한 실수를 했습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거울 앞에서 내 본성의 전적 부패를 인정하고, 모든 변명과 알량한 의로움을 하나님 발 앞에 내던지며 "당신의 심판이 옳습니다. 저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올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15:18–19)
그는 돌아오면서 훌륭한 변명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사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험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고백이 아버지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돼지 똥이 묻은 실패자의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하길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정직함, 이것만이 감옥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져서 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정직하게 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주님, 저는 지금 너무 지쳐 있습니다.” “주님, 저는 같은 죄를 또 반복했습니다.”“주님, 저는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속은 엉망입니다.” “주님, 저는 제 자신에게도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회개는 단지 마음속으로만 끝나는 일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자백했다면, 어떤 경우에는 삶의 열매도 따라와야 합니다. 상처 준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 사과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한 일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무너진 습관이 있다면 도움을 요청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 버티지 말고 믿을 만한 목회자나 공동체에 마음을 열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회개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실제 삶에서도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이 나를 꾸짖으실 것 같다.” “내가 이 죄를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실 것 같다.” “이 정도 죄를 반복한 나는 용서받기 어려울 것 같다.” 바로 그 마음 때문에 더 늦어집니다. 더 늦어질수록 더 굳어집니다. 더 굳어질수록 더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복음은 정반대의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아가는 그 자리가 바로 은혜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자백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물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회개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회개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손입니다. 빈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제 힘으로 안 됩니다” 하고 두 손 드는 것입니다.
그때 길이 열립니다. 감옥 문이 열립니다. 막혀 있던 숨이 트입니다. 메말랐던 영혼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곧' 즉시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백 방울 흘리는지 보겠다", "40일 금식해라"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입을 열어 항복하는 그 즉시, 법정에서 무죄 선언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 저는 제 힘으로는 단 1분의 거룩도 유지할 수 없는, 철저히 뒤틀리고 부패한 죄인입니다." 이렇게 핑계를 멈추고 십자가 앞에 전격적으로 항복하는 정직함, 오직 이것만이 죄책감의 감옥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3. 사함받은 자에게, 감옥 터에 봄이 시작됩니다(1절, 2절 하)
하나님은 자백하는 죄인을 복으로 덮어 주십니다. 이제 1절과 2절, 그리고 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리고 5절 끝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다윗은 죄를 자백했고, 하나님은 죄를 사하셨습니다. 다윗은 죄를 드러냈고, 하나님은 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숨기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백하는 죄인에게 “좋다, 이번에는 한 번 봐주마”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용서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죄를 주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사함을 받았다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고 있습니까?
1) 내 죄의 짐이 들어 올려져 사함받았습니다(나사)
1절을 보십시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사함을 받다'의 원어 '나사'는 "들어 올리다, 짊어지다, 멀리 옮겨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수동태 분사형으로, 외부의 힘에 의해 내 등의 짐이 제거된 상태를 뜻합니다. 허물은 단순히 도덕적인 실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반역(Rebellion)'이자 '언약 파기'를 의미합니다. 신하가 왕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향한 의도적이고 반항적인 죄입니다.
레위기16장을 기억하십시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면, 그 염소가 죄를 '짊어지고(나사)' 광야로 멀리 떠납니다.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역할을 하셨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우리의 짐을 그분이 직접 지고 골고다로 나가셨습니다.
원죄도 자범죄도 십자가 앞에서 모두 사함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9)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1서 1:7하)“
이 사실을 믿습니까?
2) 내 수치가 보혈로 덮였습니다(카사)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가려지다(카사)'는 완벽하게 덮여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구약의 지성소에는 율법이 담긴 언약궤가 있었고, 그 위를 '속죄소'가 덮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속죄소에 뿌릴 때, 하나님은 고발하는 율법이 아니라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습니다. 죄(하타아)는 궁수가 쏜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벽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과 본성적 부패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는 단순한 윤리적 결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며 거룩한 기준에 완전히 미달한 상태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반역죄와 무능력을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 시력이 나빠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아들의 피가 우리의 죄를 완벽하게 덮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의인'으로 보십니다.
3) 내 계좌에 죄가 기록되지 않습니다(하샤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정죄를 당하다'의 원어 '하샤브'는 상업적·회계적 용어로 "장부에 기입하다, 청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죄를 그에게 계산해 넣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장부를 펼치셨을 때, 거기에는 파산 선고를 받아 마땅한 죄악의 빚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재판장 하나님께서 그 빚을 우리 계좌에 기입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 그 빚을 대신 갚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고후5:19)
나의 무한한 죄의 빚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계좌로 전가(하샤브)되었고, 예수님의 완벽한 의로움은 나의 계좌로 전가(하샤브)되었습니다. 이것이 칭의의 복음입니다. 바라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형수 감방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흉악범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철창이 열리며 "바라바, 나가라. 너는 무죄다" 선언이 울렸습니다. 바라바가 반성문을 잘 써서 풀려난 것이 아닙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4)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복을 누립니다(아쉬레)
1절에서 이 모든 은혜를 깨달은 다윗은 영혼의 화산이 폭발하듯 외칩니다. "복이 있도다!" 히브리어 '아쉬레'는 단순한 서술어가 아니라 "아,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감탄사입니다. 복수 연계형으로 쓰여 '복들의 복', 즉 층층이 쌓인 충만한 복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왕좌에 앉아 권력을 누릴 때 이 탄성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극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구원의 감격에서 터져 나온 절규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무너져도 십자가 안에서 결코 빼앗기지 않는 성도의 절대적 환희, 이것이 아쉬레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절대 평안을 의미합니다. 환경이 무너져도 십자가 안에서 결코 빼앗기지 않는 성도의 절대적 환희가 바로 이 '아쉬레'입니다. 죄 사함 받은 복, 정죄받지 않는 복,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는 복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복입니다. 돈보다 큰 복이고, 건강보다 큰 복이고, 성공보다 큰 복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내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덮였다는 것, 하나님이 나를 정죄가 아니라 자녀로 받으신다는 것, 이것이 복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실제적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네가 성취해야 가치가 있다.” “네가 잘해야 사랑받는다.” “실패하면 끝이다.” “넘어지면 자격이 없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정직하게 돌아오면 된다.” “주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밀어내지 않으신다.” “십자가 아래에는 다시 사는 길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도님은 어떤 감옥 안에 계십니까?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셨는데, 나는 여전히 나를 붙잡고 정죄하는 분이 계십니까? 과거의 실수, 실패, 무너짐 때문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분이 계십니까?
남들에게 말 못 할 은밀한 죄, 반복되는 영적 실패, '나는 부족한 부모요 위선적인 신자'라는 자기 정죄 그 차가운 어둠 속에서 뼈가 마르는 겨울을 보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의 피가 네 죄보다 약하지 않다.” “내 은혜가 네 실패보다 작지 않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돌아오라.”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이것입니다. 그 감옥 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열쇠는 우리 손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물쇠가 풀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말하십시오. 기도를 거창하게 하려 하지 마십시오. 정직하게 하십시오.
“주님, 제가 이것 때문에 괴롭습니다.” “주님, 제가 이 죄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지쳤고, 무너졌고, 부끄럽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십시오.
복음을 자기 마음에 선포하십시오. 자책만 반복하지 마십시오. 회개는 자책과 다릅니다. 자책은 나를 더 깊이 감옥에 가두지만, 회개는 나를 십자가 앞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는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담당하셨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았다.” “나는 정죄의 사람이 아니라 은혜의 사람이다.”
필요한 회복의 걸음을 실제로 내딛으십시오.
죄를 자백했다면, 돌이켜야 할 방향도 분명히 하십시오.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과하고, 끊어야 할 죄가 있으면 도움을 구하고, 혼자 감당하기 어려우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신앙은 혼자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지금 정서적으로 너무 지쳐 있고, 마음의 고통이 깊은 분들은 혼자 견디지 마십시오. 목회자의 도움을 받고, 필요한 경우 전문적인 도움도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러움 속에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회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의 겨울은 여러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관계의 겨울이 있고, 실패의 겨울이 있고, 상실의 겨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차갑게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겨울 중 하나는
죄책감의 겨울, 자기정죄의 겨울입니다. 겉으로는 살아가고 있지만 속에서는 얼어붙습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내 안에서는 봄이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그 겨울 한복판에도 복음의 음성이 들린다고 말합니다. 숨기던 입술이 열릴 때, 정직하게 주께 나아갈 때, 십자가 앞에 항복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의 감옥에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게 오라.” “숨기지 말라.” “내 아들의 피가 너를 덮는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음성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복음으로 죄책감의 감옥 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메말랐던 영혼에 다시 생기가 돌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숨 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우리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복이 있도다.” “아, 나는 참으로 복된 자로다.” “내 죄가 사함받았다.” “내가 정죄받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다.” 이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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