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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은 사용할수록 더 튼튼해집니다(막3:1-6)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5851 추천수:3 112.168.96.71
2005-08-21 10:45:01

근육은 사용할수록 더 튼튼해집니다
마가복음3:1-6

자신의 근육을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습니까? 운동을 꾸준히 하신 분은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겠지만 운동을 하시지 않으신 분은 근육이 발달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는 똑같은 근육일지라도 운동을 하면 근육은 발달됩니다. 근육은 사용할수록 더욱 튼튼해집니다. 상용하지 않으면 연약해 집니다. 근육뿐 만아니라 우리의 재능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마르크가 제창한 용불용설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어떤 동물의 어떤 기관이라도 다른 기관보다 자주 쓰거나 계속해서 쓰게 되면 그 기관은 점점 강해지고 또한 크기도 더해 갈 뿐 아니라 그 기관이 사용된 시간에 따라 특별한 기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기관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차차 그 기관은 약해지고 기능도 쇠퇴하고 그 크기도 작아져 마침내는 거의 없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학설이 전부 맞지는 않지만 어느 면에서는 일리가 있는 학설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쪽으로 걸어갑니다. 사람의 생각도 사용하는 쪽으로 발전됩니다. 사람의 말도 사용하는 쪽으로 발전되어 갑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향성 굴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어느 쪽을 많이 개발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을 우리는 어느쪽으로 많이 사용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죽이는 쪽으로 개발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는 쪽으로 개발합니다.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쪽으로 개발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어느 쪽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을 개발하여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생각을 죽이는 쪽이 아니라 사는 쪽으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생각은 중요합니다. 생각을 어느 쪽으로 사용하며 개발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늘 죽이는 쪽으로 생각을 고정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여인이라도 딸을 생각하는 것과 며느리를 생각하는 것은 전혀 방향성이 다릅니다.
사위가 집안일 하는 건 기특하고 아들이 집안일 하는 것은 못 참습니다. 딸이 딸 낳으면 살림밑천이고 며느리가 딸 낳으면 그래도 듬직한 건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살찌면 부은거고 사위가 살찌면 딸이 잘한거라고 말합니다. 딸네 시어머니 오실 땐 어른이 주책이 없는거고 당신이 아들집에 오는 건 당연한 거라고 합니다. 딸에게는 옷 좀 사입으라고 하고 며느리에게는 옷 많다고 구박합니다.
며느리에 대한 생각 자체가 죽이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딸에 대하여는 살리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매사 며느리에 대한 태도와 행동이 부정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이는 쪽으로 생각하면 형식주의자, 외식하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 사고방식입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와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평생을 아테네 근처의 강가에서 길가는 나그네를 괴롭히며 살아갑니다. 그는 침대를 마련해 두고, 나그네를 침대에 묶은 뒤 침대에 맞도록 키를 잡아늘리거나 발목을 잘라 사람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프로크루스테스에게 붙들린 사람은 침대 길이에 억지로 맞춰졌던 것입니다.
1)바리새인들은 죽이는 쪽으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당시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 오경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자랑스런 종교적 전통과 하나님의 율법, 모세의 율법을 수호하기 위해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 형식을 강조하다 보니까 내용과 본질보다는 형식을 강조하는 형식주의자 외식하는 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잘못된 의식구조를 가지게 되어 버렸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39개의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세칙 6개씩을 만들었습니다. 총 안식일에 관한 규례 234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합니까?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합니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2절에 보십시오. 왜 회당에 들어갑니까?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늘어갑니다.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손마른 사람을 고치니까 이들은 어떤 마음을 가집니까? 6절을 보십시오. 죽이려고 합니다. 이들의 마음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았습니까? 5절 보십시오. 이들의 마음을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음이 완악해 저 버린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진 것입니다. 돌같이 굳어진 것입니다.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진리의 수용은 전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견고하게 굳어져 버려 이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독단적인 신앙구조를 갖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죽이는 마음입니다.

2)예수님은 살리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형식보다 본질을 중시했습니다. 예수님은 형식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주신 본질을 중시하였습니다. 4절을 읽어 보십시오.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처럼 규례를 만들어 놓고도 진정 송사하려고 감시하며 악을 행하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안식일을 지키다고 말로만 하면서 사람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4차례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하였습니다. 2장 2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시비하였고 이제 그들은 덫을 쳐 놓고 예수님이 범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마른 사람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접근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안식일일지라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3)우리의 마음은 죽이는 마음이 아니라 살리는 마음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자식을 살리고 남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기업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 시대의 문화를 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형식주의와 위선의 늪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우리에게 주신 열심을 살리는데 사용하기 위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살리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다보면 모는 것을 살리는 쪽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자신이 새벽기도한다고 새벽기도를 못하는 사람을 죽이려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자신이 헌신하면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도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면 안됩니다. 자신의 경험을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사랑보다 말씀보다 우선시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회칠한무덤, 독사의 새끼들. 그리고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2. 우리의 말은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쪽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1)바리새인들은 죽이는 말을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감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손마른 사람을 고쳐 주니까 그들은 어떤 말을 합니까? 6절 보십시오. 어떻게 하여 죽일까 헤롯당과 의논합니다.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은밀하게 합니다.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늘 남의 흉을 보고 사람을 살려 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말을 합니다. 비판적인 말이 습관적으로 입술에 붙어 있습니다. 생명이 살아났으니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축하는 하지 않고 죽이려고 합니다. 더 성경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앞에 있는 마가복음 2장 18절을 보십시오. 세리 마태가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기뻐서 잔치를 베푸니까 바리새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무슨 말을 합니까?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인 마태가 돌아온 축제의 시간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잔치할 시간인데도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초를 치고 있습니다. 더 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을 보십시오. 안식일 날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을 잘라 먹으니까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주신 본질은 잃어 버리고 종교적 의식을 절대화하여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말을 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2)예수님은 살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보십시오. 3절을 보십시오. 손마른 자에게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합니다. 공개적으로 일어서게 합니다. 수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기대를 주고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의 분명한 정신을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진리를 통해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합니다. 치유의 말씀입니다. 능력의 말씀입니다. 실제적으로 회복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가 내밀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복되었습니다.

3) 우리의 말은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쪽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혀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 줍니다. 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쪽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사용할때는 죽이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깊이에의 강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주인 공으로 한 여류 화가가 등장합니다. 열심히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어느 평론가가 작품을 구경한 후 그림에 대하여 평가를 합니다. 그 평론가는 "당신 작품은 재능도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으나 아직 깊이가 부족하다" 는 말을 합니다. 이 화가는 재능도 보이고 마음에 와 닿는다는 말은 다 잃어버리고 깊이가 부족하다는 말에만 마음이 걸렸습니다. 그녀는 깊이라는 두 글자에 집착을 합니다.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깊이'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술과 약물로 혹사시킵니다. 아름다웠던 모습은 고뇌와 집착으로 엉망이 되어갑니다.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린 그녀는 결국 '깊이' 없는 자신의 그림들을 전부 찢어버리고 1백 39m의 높이에서 오래 팽개쳐 두었던 몸을 던져버렸습니다.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대부분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씨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라 말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의 영향력에 대하여"혀는 불꽃입니다. 혀에는 악이 가득 차 있어 몸 전체에 해독을 끼칩니다. 또 지옥의 불이 타오르고 있어 우리 인생의 행로를 멸망과 재앙의 화염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약 3:4-6)"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잠언 18:21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작은 시골 천주교회의 주일 미사에서 신부를 돕고 있던 한 소년이 실수를 하여 제단의 성찬으로 사용할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즉시 소년의 뺨을 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서 물러가고 다시는 제단 앞에 오지마!" 이 소년은 장성하여 공산주의자의 지도자인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큰 도시의 천주교회당에서 미사를 돕던 한 소년이 역시 성찬용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신부는 곧 이해와 동정이 어린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여 주었습니다.
"응, 네가 앞으로 신부가 되겠구나" 이 소년은 자라나서 유명한 대주교 훌톤 쉰이 되었답니다. 티토 대통령은 그 말대로 제단 앞에서 물러가 하나님을 비웃는 공산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고, 쉰 소년은 그 말대로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한 마디 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아무리 비관적이 상황일지라도 말을 할 때는 격려의 말, 용기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 긍정적인 말, 적극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살려주는 말입니다.

3. 우리의 행동은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쪽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1)바리새인들의 행동은 죽이는 쪽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쪽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잘못되니까 말도 죽이는 말을 하고 행동 역시 죽이는 행동을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송사하기 위해 은밀하게 예수님이 하는 행동을 엿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위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니까 어떤 악행을 저지릅니까?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정적인 헤롯당을 찾아가 죽일 모의를 합니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보며 안식일을 어긴다고 고소하려는 자들이 안식일에 죽이려는 모의를 합니다. 지극히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고소하여 십자가에 달아 버립니다. 죽이는 행동, 악행을 하는 쪽으로 행동이 발전합니다.

2)예수님의 행동은 선을 행하는 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위협이 다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안식일날 손 마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살리는 행동을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를 고쳐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십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3) 우리의 행동은 악보다는 선을 행하는 쪽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말을 만들고 행동을 만들고 습관을 만듭니다. 우리의 행동은 쉽게 바꿀 것같지만 죽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계속 그쪽으로 발달되는 것입니다. 살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계속 그 쪽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리고 남을 살리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손마른 사람처럼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라하면 모든 체면을 떨쳐 버리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같지만 "네 손을 내밀라"하면 말씀의 능력을 믿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변화와 기적을 체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주저해서는 않됩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고 살리는 길이면 어떤 행동이든지 실행하여야 합니다. 어떤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시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원합니다. 경제적인 손이 말라있습니까? 정신적인 손이 말라있습니까? 전도의 손이, 봉사의 손이 말라있습니까? 살리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시길 원하십니다. 살리시는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하며 죽는 생각 죽는 말 죽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죽음을 향해 가지 않아도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처지 어떤 환경일지라도 나도 살고 가족도, 교회도, 이 시대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뎀선교회 예도해 목사님이 간증집 <구름이 가면 나도 가고>를 내 놓았습니다. 자신은“원래 망가진 폐품이었으나 …폐품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라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으며(장애등급 2금) 1년 가까이를 병원 생활을 하는 등 절망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가 하나님을 떠난 지 30여 년만에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합니다. 마침 미국에 사는 매형가족이 전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작심 새벽기도를 하며 전화를 걸어 예수님 믿으라는 소식을 받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교회 문을 드나들었습니다. 몇 주간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중 뜨겁게 성령체험을 하여 치유의 기적이 일어서게 되었답니다. 한 번의 더 끔찍한 교통사고를 겪고 나서 그는 신학을 공부해 목사의 길을 들어서게 되었답니다. 그는 불교 신자였지만 어느 날 아내가 반란을 일으키고 교회에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간절히 전도하다가 자신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답니다. 예배당 내에서 담배를 피던 사람이 주님 앞에 헌신하는 목회자가 되었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삶의 모든 기준이 변화 된 그는 몸의 장애도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사용했을 때, 회복시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하나님은 “은퇴 목회자를 위한 안식처 로뎀의 집을 지어라”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10년 동안 그의 기도 제목을 하나하나 이루어 주셨답니다. 경북 의성에 임야 7000평을 매입하여 건물 3동 100평의 노인복지시설을 지었답니다. 전북 순창에도 1300부지를 매입 하게하여 로뎀의 집 2동을 지었답니다. 제주도에 3000평 부지를 매입하게 하시고 그곳에 로뎀의 집 ,로뎀 선교사 안식관 로뎀 선교센터 3동을 지어 가난한 은퇴 목회자, 목사인 남편의 사고로 일찍 홀로 된 홀 사모들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12년 동안 농촌에서 사역하면서 이일을 한 것입니다. 자신도 살고 이웃도 살리고 시대를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통해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 나도 살고 이웃도 살려야 하겠습니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욱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더욱 살리는 쪽으로 풍성하게 발전할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5.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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