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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의 늪에서 해방되길 원합니다.(시34:4-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10939 추천수:5 112.168.96.71
2005-06-12 12:13:30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의 늪에서 해방되길 원합니다.
시편34:4-10

지난 한 주간동안 은혜 가운데 금식기도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기도 드리고 와서 몸무게를 달아보았더니 6kg이 빠졌습니다. 많은 돈을 드려 다이어트를 원하시는 분은 한 주가 금식기도를 드리고 오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대부분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하시는 분은 산에 올라가 저녁에 홀로 기도를 드립니다. 지금은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해도 별 두려움이 없이 기도를 드리지만 저는 10 대 때에는 산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이 참 두려웠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겨울에 추풍령에 있는 기도원으로 한 주간 금식 기도를 갔는데 눈이 참 많이 왔습니다. 산에 올라가 바위의 눈을 치우고 무릎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환상 중에 큰 구렁이가 나타나 기어왔습니다. 머리가 일어서는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아마 그 때 느꼈던 두려움의 기억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도 산에 가서 홀로 기도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에 대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고 사람들에게 심각한 어려움을 당한 분은 대인 공포가 있을 수 있고, 낙방의 경험을 한 사람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고, 입냄세 많이 나는 사람은 입냄세 공포를 가질 수도 있고, 높은 곳에 올라가 현기증 나는 고통을 당한 분은 고공공포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의 경험으로 인한 두려움은 그 순간으로 끝이 나야 합니다. 순간의 공포가 계속 지속되어 공포증, 공황장애까지 가서는 안됩니다. 한 때 두려웠던 경험이 삶의 양식이 되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한 때 두려움이 생각을 지배해 버려서는 안됩니다. 한 때의 두려운 경험이 자신의 미래를 지배해 버리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사람은 두려움의 늪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두려움은 감정이기 때문에 뜻하지 않는 대상, 사건이나 상황을 만나면 누구나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마음의 씨앗이 되어 자라고 나쁜 열매를 맺어 평생동안 비현실적인 두려움에 쌓여 살면 안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모욕했을 때 화를 내는 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늘 화를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은 화를 내는 것이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누군가와 헤어져서 슬픔을 느끼는 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항상 우울한 사람이 되는 것은 슬픔이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게 합니다. 그런데 늘 두려움을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비행기도 타지 못하고,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군중 앞에 나가지도 못하고, 어떤 일을 시도하지도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두려움이 삶의 양식이 되어 버린 경우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두려움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너무 자주, 너무 강하게, 또는 너무 오랫동안 느끼는 사람은 두려움이 단순히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 경우입니다. 두려움이 하나의 사고방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두려움이 병적인 상태가 되면 두려움은 광장공포증, 사회공포증과 같은 공포증, 공황 반응, 불안 반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같은 정신병의 한 유형이 되고 맙니다. 이런 병적 공포증에 걸리면 넓은 장소인 시장, 사람이 많은 거리, 극장, 밀폐된 장소(엘리베이터, 지하철, 버스, 비행기, 다리 위 및 터널 속)에 가지 못하고 홀로 있으면 죽을 것같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회피합니다. 고소공포증, 질환공포증, 죽음공포증 등과 같은 심각한 만성 공포증 환자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공포증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잠재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왜곡된 대인관계를 가지게 합니다.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성공 이론가인 나폴레옹 힐은 공포의 실체에 대해 "공포는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하고, 모든 상상을 파괴하며, 모든 자신감을 꺾어 버리고, 모든 열성을 지워버리며, 모든 의욕을 없애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과 불행에 빠뜨리고 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조직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앨런 다운스는 "리더여, 두려움을 극복하라"라는 책에서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 조건은 "자신의 재능을 신뢰할 것, 자신의 열정을 추구할 것, 두려움을 물리칠 것" 이 세 가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이라는 것이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재능의 숨통을 죄고 있는 것이 공포라고 합니다. 그는 공포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상태공포(state of fear)'와 '특질공포(trait of fear)'입니다. 상태공포는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여 피해를 볼 뻔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이런 공포는 우리의 내면 세계나 삶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의 특질공포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재하는 어떤 위험과도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자유로이 떠다니며, 생각과 행동을 흐리게 하여 모든 에너지를 소진케 하고 일어날 필요가 없었던 위험을 일어나게끔 만드는 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한한데 실제 자신에게 나쁜 일일 일어날 것으로 상상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마음속 상처에서 태어나고, 내버려둔다면 계속해서 자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의 삶과 의사결정에 색칠을 하고 모든 행동을 좌지우지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재능의 숨통을 죄는 7가지 공포 "무능의 공포, 거부에 대한 공포, 결핍의 공포, 현실의 공포, 미지의 공포, 권위의 공포, 나이의 공포" 등을 깨어 버리는 사람이 리더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린다 새퍼딘은 "두려움이 나를 망친다"라는 책에서 두려움은 사람을 수동적이고 소심하게 하고, 늘 경계심을 품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자신이 없게 만들고, 매사에 비판적이게 하여 자신을 망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 같은 두려움은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롭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두려운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두려운 감정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사고 방식이 되고 두려움이 삶의 양식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두려움의 늪에 갇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시편을 기록한 신앙의 용장 다윗도 두려움의 늪에 갇힐 평생 무기력하게 살 뻔한 사람입니다. 그는 10대 때 골리앗과 싸울 때 참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거구 장신 골리앗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 물매와 돌로 쓰러뜨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당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의 인기가 자신보다 더 높아지니까 권력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도망을 갔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이 두려워 가드 땅까지 도망갔습니다. 이 사건이 삼상 21장 10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사울을 두려워하여 가드 땅으로 피신하였는데 12절을 보십시오. 아기스의 신하들이 왕에게 보고합니다. "그 나라의 왕 다윗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이 춤추며, '사울은 수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하며 찬양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심히는 히브리어로 "메오드"라고 쓰여있습니다. "매우, 빠르게, 전적으로, 열렬하게" 두려워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담대했던 다윗의 신앙의 저항력을 한순간에 약화시켜 버렸습니다. 13절 이하를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비굴해 져 버렸습니까? 신앙인의 담대함은 한순간에 살아져 버렸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미친 시늉을 하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서는 발작을 일으키고 성문짝에 글자를 되는 대로 써 갈기기도 하며 수염에 침을 흘리기도 하였(공동번역)"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미친놈이라고 왕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절박하고 심각하며 충격적인 두려움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기억이 공포증이 되고 공황 장애가 되어 평생 그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두려움이 그의 평생을 지배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한 때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두려움의 늪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사고 방식이 되고 두려움이 삶의 양식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당시 어떻게 다윗이 두려움의 늪에 빠지지 않았는가가 오늘 시편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표제를 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지요. 바로가 이집트 왕의 이름의 총칭이듯 이 아비멜렉은 당시 그 나라 왕의 이름의 총칭이기 때문에 아비멜렉은 아기스 왕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를 상고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고 오늘도 갖가지 은사를 주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1. 두려움의 늪에 갇히지 않으려면 분리(단절)될 때 홀로라고 계속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존재의 불안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분리되어 홀로 있을 때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을 연구한 미실딘 박사는 인간의 두려움은 영아기의 3대 기초적 두려움의 연장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떨어지는 두려움(Fear of falling) 둘째, 큰소리에 대한 두려움(Fear of loud noise) 셋째, 버려지는 두려움(Fear of being abandoned)이 영아기 3대 기초적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영아기의 떨어지는 두려움은 성인이 되면서 실패의 두려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오는 사고와 사건에 대한 두려움이 된다고 합니다. 큰소리에 대한 두려움은 어른이 되어도 비판에 대한 두려움, 폭력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버려지는 두려움은 인간 최대의 내적 두려움으로 고독과 불안이 주는 두려움, 헤어지는 두려움, 미지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등으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분리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녁에 홀로 걸어가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일찍 아이들을 홀로 잠자게 하지 않으면 초등학교 다니는데도 두려워 홀로 자지 못합니다. 우리집 아이들 어릴 때를 보면 새벽기도 나오면 어느새 깨서 두려워 울다가 이웃집에 가서 자는 때도 있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분리의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처음 두려워한 것은 아담입니다. 죄짓고 두려워 도망간 아담이 하나님께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0)"라고 고백합니다. 요나도 죄를 짖고 도망가 두려워합니다. 베드로도 죄짓고 도망 두려워합니다. 분리 공포입니다. 떨어지는 두려움, 버려지는 두려움입니다. 요즈음을 양심들이 많이 황폐화되어 죄 때문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죄를 지면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형벌 받을 것에 대하여 두려워합니다. 신앙인들은 주일만 잘 안 지켜도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지키지 않아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는데 나도 그런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이런 식의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이런 죄의식이 나를 계속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합니다. 이 때 두려움은 회개하라는 재촉장이고 양심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그 어떤 죄도 다 용서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분리의 두려움 중에는 절박한 상황에서 분리되어 나 홀로 밖에 없구나 생각할 때 오는 두려움임니다. 이 두려움이 오늘 다윗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입니다. 버려졌다는 두려움입니다.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단절되고 끝나는구나 라고 생각할 때도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이 때 어떻게 해야 두려움의 늪 속에 빠져 들어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과 싸울 때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기스 왕 앞에 심각한 두려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두려움의 늪에 갇히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 두려움으로 이렇게 미치광이처럼 되었는데 지나보니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은 시편을 통해서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시 34:4)" 부르짖을 하나님이 바로 다윗과 함께 계셨습니다. 절박한 상황에 나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아이들이 밤길을 홀로 갈 때 두렵지만 아버지와 함께 가면 두렵지 않듯 어디에서나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가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건강할 때도, 질병에 걸려 있을 때도, 부도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성공했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는 야곱에게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말씀합니다. 야곱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쫓기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가 돌아가시고 모세 대신 민족을 인도하여 가난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라고 말씀합니다. 큰 과업을 놓고 두려워 망설이는 분이 있습니까? 여호수아의 하나님의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 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삼하 7:9)"라고 말씀합니다.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는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시간적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면 우리는 어떤 경우도 홀로가 아닙니다. 홀로라고 생각하며 두려움의 늪에 갇혀서는 안됩니다. 더욱이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두려움이 있을 때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께 나아가 구합니다. 두려운 문제가 있으면 그것 묵상하며 자꾸 두려움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지 말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 구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의 늪으로 빠지지 않게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2. 우리가 두려움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능력부족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능력의 불안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능력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과도한 일을 만나면,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두려움의 늪에 갇히게 됩니다. 질병도 고칠 수 있는 질병 같으면 그렇게 심각하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다고 하면 그 때부터는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문제는 큰데 자신의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정탐군 10은 자신들을 메뚜기 같다고 말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성읍은 크고 견고하고 사람들은 거인인데 자신들은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비교하며 절망합니다. 원망합니다.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 14:8)"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관점과 자신들의 능력만 보는 관점은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신앙이 약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능력만 바라보며 스스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을 비하하고 메뚜기 컴플렉스에 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인은 주신 사명을 바라보며 밥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가 능력이 없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두려움의 늪에서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사울은 왕입니다. 대단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도망자인 초라하고 부족한 자신의 능력만 본다면 두려움의 늪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스도 이방왕입니다.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도망자입니다. 사울에게 협조하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독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입니다. 그런데 지나보니 두려워할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오는 성경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34:6)"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34:5)" 저희는 다윗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가족이고 직원들입니다.
다윗은 당시 곤고한 자입니다.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는 자입니다. 가난한 자입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도망자인 자신을 끝까지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며 믿고 지지해 준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까지 수치를 당할 처지입니다. 그러나 능력의 한계로 심히 곤고한 상태에서 여호와께 나가 부르짖으니까 여호와께서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따르던 자들의 얼굴이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환난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극복할 수 없는 환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지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환난을 극복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못하는 것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계 상황을 만나면 그 일 때문에 두려워하며 두려움의 늪에 빠지지 말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는 어떤 분이십니까?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8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얼마나 복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능력없다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 1:7)"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질병을 고치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12)"라고 말씀하십니다.
닥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꾸 알량한 자기 꾀로 대처하면 계속 두려움의 늪으로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순박하고 비이성적인 것같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해 주어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38년 된 병자도 단순하고 순박한 방법으로 예수님 만나 치유받았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으면 병원을 찾아다니며 고통받으며 돈을 다 허비한 여인도 비이성적인 것 같은 예수님 옷자락 만짐으로 치유 받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두려움의 늪에서 쓰러지도록 방치하시겠습니까?
오늘도 이 시간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시기 위해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각종 은사를 주실 줄 믿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라고 말씀합니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리웠던 미우라 아야코를 보십시오. 폐결핵으로 인생의 황금기인 24세 때부터 13년 동안 침대에 누워지냈습니다. 직장암 파킨슨씨병 척추카리에스 등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무능력한 자신의 한계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만 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무능력하지만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흔 두 살에 병상에서 쓴 '빙점'이 아사히신문에 당선되었습니다.
바람만 불어도 금방 꺼질 것같은 생명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70 대까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앨런 액슬로드가 지은 "두려움은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 대통령을 지낸 루즈벨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소아마비라는 개인적인 고통, 대공황 시절의 경제적 위기,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정치적 대혼란 속에서 믿음을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모든 난관을 헤치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감과 추진력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루스벨트는 말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공포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3. 우리가 두려움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부족함 없이 주시는 하나님께 미래를 맡겨야 합니다. /미래의 두려움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 중의 또 하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지금 고난 받도 미래에 잘 된다는 것만 안다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위기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두려움의 늪에 갇히게 됩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처가 마을에서 열 명의 공처가들이 마누라들의 독살스러운 바가지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기들끼리 조직을 만들었답니다. 첫 모임을 하는데 이미 남편들의 낌새를 눈치챈 열 명의 부인들이 갑자기 그 현장을 덮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홉명의 남편은 피신하였는데 한 명만이 자진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남겠다고 했답니다. 도망가던 아홉 명의 남편들이 대표성을 그에게 부여하기 위해 그를 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들어갔는데 이미 부인들이 오기도 전에 두려워 죽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가 사스 공포에 쌓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직 질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려워 비행기도 제대로 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제 사스로 죽은 사람은 140명이랍니다. 이 숫자는 계단에서 굴러 죽는 사람은 150명보다 더 적은 수입니다. 193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를 휩쓴 대 경제공황 때 무서운 경제 파탄이 가중된 원인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 닥치지도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은행에 몰려가 돈을 찾아 버리자 은행고는 텅비게 되고 은행이 문을 닫자 사업체들이 연쇄적으로 도산을 해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공황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에게 죽을지 모르고 아기스 왕에게 죽을지 모르는 위기 상황입니다. 앞 날에 죽음이 다가올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각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9절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9)"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10)"
하나님께서 부족함없이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 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나오는 경외도 두려워하다는 말입니다. 4절의 두려움 "파하드" 사람과 상황을 두려워할 때 쓰여진 말이고 9절은 "야레"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쓰여진 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경외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경외라는 말은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문제가 아닙니다. 적이 아닙니다. 자신도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현대인이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교통 법규 어지기 않은 사람이 경찰차가 온다고 두렵습니까? 저는 구약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씀 중의 하나가 하나님 경외라고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별로 부러운 사람들이 없는데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참 부러워합니다. 저는 돈많은 사람도, 권력있는 사람도, 멋있는 사람도, 큰 교회하는 사람도, 인기있는 사람도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경외하려는 사람들 부럽습니다.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 부럽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 많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이용해 자기의 유익과 명예, 출세를 지향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지금 허리가 아파 잠시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계시지만 제가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참 좋아하시는 분 중의 한 분입니다. 참 예수님처럼 사시려고 애를 씁니다. 연세가 80대가 가까우면 대부분 노욕에 사로잡히고 현실에 안주합니다. 자기 자식 챙기고 편안히 살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흠도 있겠지만 형식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시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감동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아마 제 신앙 생활하며 두고 두고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예수 잘 믿는 체 하며 예수님은 조금도 닮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목사 위에 군림하는 조종하는 재미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분을 받았는데도 예수님 닮은 모습은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용의 대상으로 삼아 자기 출세를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목회하면서 한계를 많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회의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 많이 한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할 텐데 자기 뜻대로 다 결정하며 살며 하나님도 동의해주고 목회자도 동의해 주길 원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은 다 자신의 이용 수단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뜻에 동의해주기를 원합니다. 힘있는 자 앞에서는 벌벌 떨면서, 조그만 문제만 다가와도 그 앞에서 두려워하면서 정말 힘이 있으신 우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살아질 세상 권력, 세상의 힘 두려워하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보장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전적으로 여호와를 찾으며 살다보면 어느새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과 공포는 봄눈 녹듯이 없어질 것입니다.
학자들이 두려움을 분석해 보면 92%가 쓸데없는 두려움과 불안이라고 합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두려워할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미래는 다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리아 산에 올라갔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창 22:7-8).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아가는 모세의 앞길에 하나님은 갖가지 필요한 것으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아가는 바울의 앞에 하나님은 신실한 동역자와 후원자들을 준비해놓았습니다. 가나안 정벌을 놓고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그의 앞길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다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신 31:8)"
광야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말씀합니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신 1:33)"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바로 왕에게서 나왔을 때 바로가 마음 바꾸어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애굽의 모든 전차를 동원하고 군인들을 거느리고 추격합니다.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습니다. 백성들을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두려움과 공포에 쌓여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의 입술을 통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홍해 앞에서 절망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미래의 부확실성 앞에 두려움의 늪에 갇혀 절망하고 있습니까? 오늘 모세에게 들여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시길 바랍니다. 다윗의 앞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모세의 앞길을, 여호수아의 앞길을, 야곱의 앞길을, 요셉의 앞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만족할 수 있도록 인도할 줄 믿습니다.
홀로라고 두려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두려움의 늪에 빠져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두려움의 늪에 빠져 낙담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길 좋아하시는 우리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기까지 피와 땀을 다 흘리신 우리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면 우리에게 일어설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각종 은사를 주시길 좋아하시는 우리 성령님께서 오늘도 필요한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넉넉히 두려움의 늪에서 빠져 나오게 할 줄 믿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를 좇는 신앙생활로 참 만족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5.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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