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기 원합니다.
누가복음8:40-56
요즈음 임진왜란 때 23전 23승으로 꺼져 가는 조선을 구한 불멸의 이순신이 한 방송사에서 방영되고 있습니다. 시청하시는 분은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보면 축구에서 일본을 이기는 것보다 가슴이 더 후련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어느 부분이 사람을 감동을 시킵니까? 일본을 선박을 무참하게 무너뜨릴 때입니까? 어떤 경우도 좌절하지 않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보면 감동적입니다. 부하들이 자신을 무시할 때도, 적선과 비교할 때 비교가 안 되는 수의 판옥선을 가지고 있을 때도, 동료 장군들이 자신을 비난할 때도 그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할 때도 갖은 비난의 소리를 들으며 좌절하지 않고 철저히 전쟁을 준비합니다. 아직 방영되지 않았지만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도 간신배들의 모략에 의해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될 때도 그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죽음 직전에서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 번째 백의종군할 때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순신을 몰아내고 수군을 최고 지휘관이 된 원균이 일본에게 대패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납니다. 임금이 나라가 위급하자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에 재임용할 때 그는 원망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불굴의 이순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133척의 왜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려 전쟁의 방향을 조선의 승리로 다시 돌려놓습니다. 이로 인해 장병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의 사기는 다시 오르기 시작합니다. 군진(軍鎭)의 위용이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했다고 합니다. 어떤 경우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감동적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실패로 좌절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병들어 좌절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을 그만두어 좌절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고치지 못하는 습관으로 좌절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 때문에 가족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며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진전되지 않은 나의 무능함으로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신앙적인 좌절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러한 좌절로 인생을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 무기력하게 인생을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좌절은 어떤 일이 안 되는 것을 보고 자기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자신 스스로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 좌절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일어나길 원합니다. 같이 한 번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기 원합니다. 절망하지 맙니다. 우리 예수님과 함께 일어섭시다." 우리가 어떻게 좌절에서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1. 자신의 한계를 만나면 좌절하지 말고 그 한계를 예수님 만날 기회로 삼고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일을 하다 마음과 기운이 꺾이고 어떤 계획이나 일을 도중에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한계 때문입니다. 야스퍼스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죽음·병·피할 수 없는 죄 등의 극한상황(極限狀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때 인간은 심각한 유한성을 의식하고 좌절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물리적, 사회적, 개인적인 한계를 당할 때 사람들은 좌절합니다. 인식의 한계, 지식의 한계, 시간의 한계, 건강의 한계 등으로 어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때 사람은 좌절하게 됩니다. 맡은 일은 많은데 자신의 능력은 한계가 있을 때 좌절합니다. 맡을 일에 비해 무능할 때 좌절합니다.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 모세도 삶에 과부하가 걸리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주여 ...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깊은 좌절감에 빠져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능력의 사람, 성령의 사람 바울도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으로 인하여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고후1:8)”졌다고 했습니다. 극한 좌절을 맛보아야 만했습니다.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갈멜산에서 기도하여 불을 내려 승리한 엘리야도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좌절할 수밖에 없는 한계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좌절하고 포기하고 절망하며 인생을 끝내길 원치 않습니다. 한계가 다가오면 좌절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용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심히 연약한 존재입니다. 조그마한 세균만 들어와도 누워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대단한 것같지만 머리에 핏줄 하나만 터져도 실핏줄 하나만 막혀도 의식을 잃는 것이 인간입니다. 육체가 대단한 것같지만 조그마한 잘못된 세포 하나만 생겨도 쓰러져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같지만 사람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어떤 한계가 다가오면 정직하고 솔직하게 한계를 인정하고 좌절하지 말고 오히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한계를 초월하신 분을 만나면 됩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됩니다.
우리 인생의 한계, 죽음의 한계, 능력의 한계, 인식의 한계를 초월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한계가 다가오면 우리의 모든 한계를 극복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을 것입니다. 적당한 명예를 가지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부자와 권력자,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 만나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12살 나 외동 딸이 병들었습니다. 얼마나 귀엽고 애지중지한 딸이겠습니까? 당시 결혼할 정년의 나이입니다. 그 딸이 중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때 그는 어떻게 합니까? 그 문제로 인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한계 상황으로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생각합니다. 아마 그는 그 문제가 없었다면 일평생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예수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갈릴리 사람이라고 무시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회당장하면 그 당시 사회 지도층 인사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나와 겸손하게 엎드립니다. 자신의 지위 체면 명예, 예수님을 만나는 걸림돌을 다 버려 버립니다. 딸 문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겸손해 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 나와 간절히 간구합니다. 한계 상황은 좌절하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연약성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가라는 신호입니다. 한계 상황을 만나면 좌절할 것이 아니라 진정 겸손하고 간절하게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을 만나면 병든 자가 일어납니다. 절망하는 자가 소망을 갖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의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 떠난다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비타민C 박사’라는 별명이 붙은 서울의대 이왕재 교수님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기초의학을 하시는 분인지라 부모 신앙으로 교회도 다니고 교사도 했지만 신앙생활을 40여년 동안 해오면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에 대한 섭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창세기 말씀은 너무 재미없었고 통독하라고 하면 의무적으로 읽고 지나쳐버렸답니다. 그런데 결혼 9년 만에 시험관 수정을 통해 얻은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음의 위기에 처했답니다. 4년 6개월 된 어린 아이의 몸 한가운데로 중형 승용차가 지나간 것입니다. 중환자실에 놔둔 채 집으로 돌아와 밤새워 눈물로 기도 드렸답니다. 40여 년을 살면서 그때만큼 간절히 기도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동료 교수들이 같이 기도하고 서울의대 기독동문들이 같이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방사선 촬영을 한 친구 교수는 “간장의 형체가 그려지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음에도 큰 출혈이 없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며 위로하더랍니다. 담관이 파열되어 담즙이 혈액으로 흘러 들어갔을 텐데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폐와 심장까지도 큰 손상을 당했을 것인데 자동차 앞바퀴에 짓이겨진 간장이 2주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생되었답니다. 기적이 주는 비논리성 혹은 비합리성의 시비를 일거에 제거시켜 버렸다고 합니다. 교만하기 쉬운 지식집단인 서울대 의대 교수들에게까지 하나님 살아 계심을 증거한 사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분명하고 확실하게 우리의 삶을 지키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소극적인 신앙이 간증하는 신앙으로 바뀌었답니다.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던 신앙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앙으로 바뀌었답니다.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며 또한 그분께서는 그것을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기를 바라시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한계 상황이 있습니까?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라는 신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자고 하는 손길입니다.
2. 기대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좌절하지 방법을 바꾸어 믿음으로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사람이 좌절하는 이유는 어떤 것을 기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좌절합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노력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좌절합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사람이 좌절감을 느낄 때는 하는 일 마다 안되고 자꾸 일이 꼬일 때 80%로 나와 잇고 두번째가 내 능력에 한계를 느낄 때 세 번째가 집안 불화 네 번째가 쓰는 이력서마다 낙방 일 때로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좌절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기대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어떤 것을 이루지 못할 때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데도 실패하는 것은 과도한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잘못 잡았던지 잘못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 징조가 있었습니다. 하인리히는 그것을 ‘1대 29대 300’의 법칙으로 정립했습니다.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나기 전에는 29건의 경미한 재난과 300건 이상의 이상 징후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도 건너도 여리고 성도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에서 참패를 당했습니다. 아주 작은 성입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성입니다. 그런데 참패를 당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간이 범죄한 것입니다.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하고 성령 충만했던 사울왕이 완전히 몰락을 했습니다. 왕으로 하지 말아야 할 제사까지 드리고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악령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방법을 택하면 목적은 이룰 수 없습니다. 부산 가는 길을 가면서 서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착각입니다. 서울이 안나온다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방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동시에 나오는 혈루증 앓은 여인을 보십시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12 년 동안이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찾아 다녔겠습니까? 그러나 병을 더 중해 졌고 있는 것은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사람대접 받지 못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녀가 좌절하지 않고 택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입니다. 미신적인 것같지만 이 방법을 택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48절을 읽어보십시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불결하고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사람들은 사람취급 해 주지 않았지만 믿음 가지고 나아간 이 여인을 우리 주님은 딸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아들이라 딸이라 불러 주십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영혼으로 나온다할 지라도 우리를 믿음 가지고 나오면 따뜻하게 품어 주십니다.
인간적 방법으로 다 해 보아도 않 될 때 좌절하지 말고 믿음의 방법을 택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이성적 방법과 경험, 과학적 방법만 최고가 아닙니다. 믿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믿음이 미래를 바꿉니다. 믿음이 질병을 물리치게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회당장 야이로를 보십시오. 회당장 야이로가 모든 자존심 접고 겸손하게 무릎 꿇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런데 그의 기대와는 달리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12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으로 지체를 하였던 것입니다. 회장당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얼마나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까? 회당장 집에서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원통하며 얼마나 처참한 상황이겠습니까? 이 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50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일이 정말 잘 풀리지 않습니까? 진지하고 정직하게 세상 방법 한번쯤 접어보고 믿음의 방법을 선택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분별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주부편지에서 탁구 여왕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양영자 선수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지금은 M국(몽골) 선교사로 나가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하여 중학생 때 국가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테니스 엘보우라는 팔꿈치의 심한 통증으로 진통 주사를 맞지 않으면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답니다. 6년동안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해보았지만 진통주사의 효과도 떨어졌답니다. 많은 노력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은 낫지 않고 악화되어 갔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 간구해 보라는 권유를 듣고 기도원에 가 십자가에서 피흘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고, 6년 동안 고질적으로 괴롭히던 테니스엘보우가 극적으로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건으로 삶의 목적이 달라졌답니다.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제가 만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라켓을 잡게 되었답니다. 그 뒤에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시련은 닥쳐왔답니다. 간염으로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절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간절히 기도하며 연습했답니다. 86아시안게임에서 중국팀을 물리쳤답니다. 넘을 수 없을 것이라던 중국 탁구의 벽을 믿음과 기도로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올림픽 금메달을 조국의 목에 걸 수 있었답니다. M국에서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사는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은 '어리석게 산다'고 걱정하지만 그들에게 그는 고백한답니다. "예수님만이 저의 소망이시고 기쁨이요 힘이요 능력이라고 그리고 진정한 가치는 금메달이 아니라 천국의 면류관이라고"
3. 상황이 끝났다고 좌절하지 말고 모든 것을 과정으로 받아들여 끝난 상황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로 삼고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상황을 최종적인 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한 번 실패하면 그것을 전부로 마지막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애인에게 배신을 당하면 그것을 전부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하면 그것을 마지막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병들면 그것을 마지막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일하는 사람이 한 번 거절당하고 좌절하는 사람은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이 아니라고 받아들인 한 그 어떤 것도 좌절할 만큼 마지막 상황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 마저도 마지막으로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좌절합니다. 52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울며 통곡을 합니다. 회당장도 이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울리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끝이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말할 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5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정신병자 취급하며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비웃는 사람들을 보며 좌절합니까? 움추려 듭니까? 포기합니까? 아닙니다. 54절을 보십시오. "아이야 일어나라"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가 뭐라 해도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아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어나야 할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 살아납니다.
아이는 좌절하고 죽을 때가 아닙니다. 젊은이는 지금 일어나 날개를 펴야할 때입니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나면 그것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아버지 야이로나, 제자들이나, 죽은 딸이나 모두가 예수님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좌절의 상황이 아니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일 때문에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입니다.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두려움이 제거된 것입니다. 이제 이들에게 죽음이 무섭겠습니까?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결코 죽음이 무서울 수가 없습니다. 죽음도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깐 잠을 잤다 천국에서 깨어나는 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기갈과 곤비함으로 힘을 잃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교사로서 구역장으로 마을교회 목자로 가장으로 좌절하며 무기력하게 누워계신 분이 있습니까? 우리는 좌절을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왕상19:5절)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다 지쳐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0:1절) 절망하지 말고 가정에 빛을 발하게 하십시오. 일어나 세상에 빛을 발하여야 합니다. 세상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빛을 주어야 합니다.
해도 해도 안된다고 좌절하신 분이 있습니까? 어떤 사업을 해도, 아무리 자식을 잘 가르칠려해도, 아무리 습관을 고치려 해도, 아무리 기도해도 안된다고 좌절하신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좌절하며 사는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8) 지금이 우리에게 일어 날 때이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집니다.
예수를 10년 20년 믿었어도, 교회를 수십년 다녔어도 잡아끌어야 끌려오고 업어다 놔야 하는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좌절하며 무기력하게 신앙 생활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3:6절) 잠자는 신앙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과 시련은 끝이 아닙니다. 단지 더 큰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주신 기회입니다. 에베소 5:14절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고 말씀하십니다. 모진 폭풍우와 비바람의 과정없이 어떻게 나무가 거목이 되겠습니까?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십시오. 세상에서 위대하게 쓰임받은 인물들을 보십시오. 수많은 좌절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들에게 좌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좌절을 성공을 향한 과정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중국 전한의 역사학자 사마천은 정치범으로 몰려 신체의 일부가 잘리는 형을 받으면서도 비관하여 좌절하지 않고 [사기]를 남겼습니다. 제나라의 위대한 병법가 손자도 동료의 모함으로 두 다리를 절단 당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손자병법]을 남겼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유명한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는 말더듬이었지만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로 가서 조약돌을 입에 물고 연습하여 능변의 웅변가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 Thomas Edison )은 수만번의 실패에도 좌절하지 안고 갖가지 것들을 발명하였습니다. 67세의 나이에 모든 것이 다 타버렸을 때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낡은 시설과 건물에 연연하는 내 좁은 소견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청소해 주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화재를 딛고 일어서 예전보다 더 훌륭한 연구실에서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신화창조의 비밀 한국 기업의 세계 시장 공략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주)홍진 HJC, (주)하나코비, 오로라월드(주), (주)두산중공업, (주)삼성전자,(주)현대자동차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어느 기업하나 어려움 없이 일어선 기업은 없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데 결코 어떤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한계 상황을 이용하여 기술을 더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노먼 빈센트 필박사가 쓴 "생각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첫부분에 미국의 전설적인 백화점 왕 믿음의 사람 페니 이야기가 나옵니다. 필 목사님이 어느날 아흔 다섯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평생의 친구 페니(J. C. Penney)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오래 사신만큼, 인생사를 살아오면서 온갖 어려운 문제들을 겪으셨을 겁니다. 당신의 문제 해결 철학은 무엇입니까?" "노먼 목사님, 사실 나는 어떤 문제를 직면하면 먼저 감사 드립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하나하나 극복할 때마다 내가 더욱 강해지고, 앞으로 더 큰 문제를 대면할 만한 준비를 갖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문제를 발판으로 더욱 성장한다고 할까요?" 필목사님은 말합니다. "문제란 해결되기 위해 존재한다." "부정적인 사람은 문제에 짓눌린다. 반면 창의적인 사람은 문제를 해결해간다. 문제 자체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결과를 결정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 : 7).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기 원합니다. 절망하지 맙니다. 우리 예수님과 함께 일어섭시다." 우리가 어떻게 좌절에서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1. 자신의 한계를 만나면 좌절하지 말고 그 한계를 예수님 만날 기회로 삼고 일어나야 합니다.
2. 기대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좌절하지 방법을 바꾸어 믿음으로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3. 상황이 끝났다고 좌절하지 말고 모든 것을 과정으로 받아들여 끝난 상황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로 삼고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5.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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