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2) 절망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
출애굽기3:9-12
오늘은 인생의 겨울에 만난 복음 2번째로 “절망의 감옥에 들려온 음성”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느 날 인생의 겨울이 다가 옵니다. 상실과 이별(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별,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꿈과 목표의 좌절(오랫동안 노력했던 일이 반복적으로 실패하거나,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현실), 관계의 단절(가족, 친구, 사회로부터 고립되거나 배신당했을 때,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질병, 재정적 파탄, 자연재해), 정체성의 위기(나는 누구인가,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 반복되는 고통(만성 질환, 빈곤, 학대) 등이 다가 옵니니다. 그려면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희망의 완전한 소멸 + 통제감의 상실 + 의미의 붕괴”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런 때 사람들은 “이제 진짜 끝났어…”, “살아봤자 뭐해…”, “다 소용없어”, “내 인생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라는 말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모세도 한때 그런 사람처럼 보입니다.
모세는 원래 미디안 광야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애굽 왕궁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당대 최고의 문명을 경험했고, 큰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은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한 자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한때 누구보다 유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건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자기 동족을 괴롭히던 애굽 사람을 죽였고, 그 일로 인해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왕궁에서 광야로, 중심에서 변방으로, 주목받던 자리에서 잊힌 자리로 밀려났습니다.
출애굽기 3장 1절은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라고 기록합니다. 자기 양도 아닙니다. 장인의 양입니다. 한때 왕궁의 사람이던 모세가 이제 광야에서 남의 양을 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깊은 절망에 빠졌다"라고 직접적으로 감정을 서술하지는 않지만, 그의 환경, 그가 남긴 고백, 그리고 행동의 뚜렷한 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깊은 절망감과 '학습된 무기력'에 갇혀 있었는지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당대 최고 제국의 심장부에서 모든 학문을 통달했던 엘리트 모세가 도망자, 수배자가 되어 장인의 양을 치며 이름 없는 목자로 살 때 절망의 증상 중 하나인 '만성적인 공허함'과 '수동적인 삶으로의 체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거대한 꿈을 꾸던 젊은이가 철저히 일상에 매몰되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도, 희망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모세는 십보라와 결혼하여 낳은 첫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짓습니다.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출애굽기 2:22)라는 뜻입니다. 이는 화려했던 애굽의 왕자라는 지위도 잃고, 자신이 구원하고자 했던 히브리 동족에게도 버림받은 채, 이방 땅에 얹혀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깊은 탄식일 수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철저한 고립감과 '존재 목적의 상실'을 자신의 핏줄인 아들의 이름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그때 모세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소명 앞에서의 병적인 자기 비하와 회피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40세 때의 모세는 동족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하려 할 만큼 의욕과 자신감이 넘쳤습니다(행 7:25). 그러나 80세에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무려 5번에 걸쳐 필사적으로 소명을 거절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 3:11)라고 하는 것은 겸손을 표현한 말처럼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자존감의 붕괴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출 4:1)라는 말은 과거 동족에게 배신당했던 기억에 사로잡혀 극도로 방어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트라우마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 4:10)라는 말은 절망감에 사로잡힌 자들이 가지게 되는 자기 능력에 대한 철저한 부정입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과거 "말과 행실이 능했다"고 증언합니다(행 7:22). 광야의 긴 고립은 모세 스스로 과거의 뛰어났던 능력조차 완전히 잊어버리고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 4:13)라고 회피합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주시고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심에도 불구하고, 통제권을 완전히 포기해 버린 마음의 단절을 보여줍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나는 무능하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미래는 더 나빠질 것”이라는 3대 핵심 믿음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인지(생각)의 왜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절망의 광야, 그 침묵의 광야, 그 잊힌 시간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절망 속에 있는 모세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같이 예배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이 세 가지 말씀을 통해 절망보다 크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절망의 감옥에서 소명(사명)을 주십니다
10절은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 말씀을 들은 모세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하나님, 저입니까?” “저를 보내신다고요?” “저더러 바로에게 가라고 하십니까?” “저더러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고 하십니까?”
오늘 이 자리에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외소와 내소입니다. 외소는 교회로 부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로 부름입니다. 친구의 전도를 받아, 부모의 강요에 의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내소는 구원에로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말씀을 듣거나 읽다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데 말씀을 들을 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지는 것도 나의 연구 결과가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으로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명에로 부르심을 하십니다. 그게 소명입니다.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소명을 주십니다. 바울에게 이방인과 이방인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꼭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족 구원일 수 있고, 자녀 양육일 수 있고, 사업일 수 있고, 교회 부흥일 수 있고, 직장일 수 있고, 세계 선교일 수 있고, 각자 사명이 있습니다. 과거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하신 분의 간증을 들어 보았는데 아들이 마약 중독이 되어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금은 복음으로 마약 중독자의 치유에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 하시는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모세에게 소명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누가 주십니까? 여기서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단어는 “내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보내어.” 하나님은 “네가 준비되었느냐”를 먼저 묻지 않으십니다. “네가 자격을 증명해 보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부여하신 분인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내가 너를 보내겠다.” 출애굽의 시작은 모세가 아닙니다. 구원의 시작은 인간의 결심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생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40세의 모세는 자기 힘으로 뭔가 해 보려 했습니다. 자기 열심으로, 자기 판단으로, 자기 의분으로 동족을 구원해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사람도 살리지 못했고, 자기 인생도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80세의 모세에게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다. 네가 너 자신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보낸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내가 하나님께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격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경력을 보고, 능력을 보고, 나이를 보고, 배경을 봅니다. 그래서 세상은 말합니다. 젊어야 하고, 실패하면 안 되고, 흠이 없어야 하며, 준비된 사람만 기회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끝났다고 여기는 사람, 심지어 스스로도 끝난 것처럼 느끼는 사람을 붙드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나이 들었습니다. 도망자였습니다.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 묻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민족 구원의 지도자로 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보내겠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가능성 위에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자꾸 자기 자격을 따집니다. “나는 실패가 많습니다”, “나는 너무 약합니다”, “나는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충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보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두려움 속에서 부르셨습니다. 엘리야를 탈진과 우울 속에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를 실패와 수치 속에서 부르셨습니다. 이사야를 죄책감과 무가치감 속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오늘의 사명은 거대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 오늘의 순종은 세상을 바꾸는 큰일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고 하루를 견디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영웅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십니다. 바로는 당시 세계 최강 제국의 왕입니다. 권력의 상징이고, 우상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모세 개인에게는 가장 두려운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가 도망쳐 나온 과거의 중심이며,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그가 가장 피하고 싶은 자리로 다시 보내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영원히 숨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무작정 몰아내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숨게 두지 않으시되, 때로는 긴 회복의 과정과 공동체의 동행 속에서 다시 현실 앞에 서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붙드시고, 다시 세우셔서 우리가 두려워하던 현실 앞에 서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네 힘으로 강해져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자기 강화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강해져서 버텨라”가 아니라, “내가 너를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더 크신 모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모세는 불완전한 중보자였습니다. 그는 주저했고, 두려워했고, 여러 번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을 때,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가 가득한 세상으로 기꺼이 오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바로 앞에 섰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냈지만,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의 애굽에서 영원히 건져 내셨습니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이 그림자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궁극적인 출애굽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소망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누가 오셨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누가 나를 보내시는가”에 있습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의 삶 앞에도 바로처럼 거대한 현실이 서 있습니까? 물질의 문제입니까? 건강의 위협입니까? 자녀 문제입니까? 관계의 상처입니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그 앞에서 우리는 쉽게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너무 약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감옥 속에 있는 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보내겠다.”
어떤 절망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이 시간 소명을 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절망의 늪에서 탈출하여 사명의 땅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절망의 감옥에서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소명으로 하나님이 부르니까 모세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 질문은 단지 겸손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너진 사람의 질문입니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의 질문이고, 오랜 침묵과 기다림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절망하는 사람의 질문입니다. 저는 실패자입니다. 저는 도망자입니다. 저는 시골 늙은 목동에 불과합니다. 저는 장인집에 더불살이하는 가난뱅이에 불과합니다. 저는 불안 장애가 있습니다. 저는 우울증이 있습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저는 대학을 나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제 끝났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이 질문은 모세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이 일을 감당합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무너진 가정을 붙들 수 있습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병든 몸으로 내일을 살아 낼 수 있습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상처 입은 마음으로 다시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늘 자기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나는 자격이 있는가. 나는 실패한 인생인가.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성취로 증명하라고 압박합니다. 좋은 직업, 돈, 학벌, 외모, 평판으로 대답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잘될 때는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다가도, 실패하면 존재 전체가 무너집니다. 성공을 정체성으로 삼으면 실패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가 되어 버립니다. 모세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모세의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원래 왕궁 출신 아니냐”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는 원래 말과 행사가 능한 사람이었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너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져라”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해답입니다. 모세는 “내가 누구입니까?”를 물었는데,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자격 위에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능력에 의해 유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자격을 대신합니다.
복음은 우리 자존감을 억지로 부풀려 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초라한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 크신 하나님께로 옮기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 앞에는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로라는 외부의 권세입니다. 또 하나는 실패와 거절의 기억이라는 내면의 상처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돈, 건강, 관계, 미래 같은 바깥 문제가 우리를 짓누릅니다. 또 어떤 때는 수치심, 자기 비난, 실패의 기억, 상처, 두려움 같은 안쪽 문제가 우리를 더 깊이 무너뜨립니다. 내가 지지를 받아야 할 가족, 그렇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가까이 있다고 다 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 상황에서 무너져 절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만 보면 못 한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하면 된다.” “장애물만 보면 못한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하면 된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값싼 위로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막연한 위로의 문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건 언약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시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임마누엘의 복이 우리에게 오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철저히 버림받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영원히 버림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끊어지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어둠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어떤 겨울 속에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대신 유기의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정말 깊은 겨울을 지나고 있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기도할 힘이 없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눈물을 참느라 지쳐 버린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 버티는 것이 너무 버거운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강하니까 버티는 것이 아니다. 네가 무너질 듯한 순간에도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기 때문에 너는 소망이 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성도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깊은 믿음의 사람도 크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플 수 있고, 마음이 무너질 수 있고, 오래 우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흔들릴 수는 있어도, 내가 너를 놓지 않는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39) 이 사실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기도로, 교회의 돌봄으로, 때로는 필요한 도움의 손길을 통해 실제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러므로 절망을 혼자 붙들고 있지 마십시오. 기도를 요청하십시오. 믿을 만한 성도에게 도움을 구하십시오. 깊은 고통이 오래 계속된다면, 목회적 돌봄과 더불어 필요한 전문적 도움을 받는 것도 믿음 없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도움의 통로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모세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자기 확신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붙드는 것은 내 결심이 아닙니다. 나를 붙드는 것은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하나님은 절망의 감옥에서 예배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절망가운데 있는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고 함께 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까?
12절 하반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 말씀은 참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출애굽의 목적을 단순히 탈출이라고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니다.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예배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바로를 위해 섬겼습니다. 바로를 위해 벽돌을 만들고, 땀을 흘리고, 울며 노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를 그 섬김에서 건져 내어 나를 섬기게 하겠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를 섬기던 인생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생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예배자의 삶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23에서는 “내 아들을 보내라 그가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단지 노예 상태 탈출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5:1에서는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해방의 목적이 단순한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예배 공동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출애굽기 7:16, 8:1, 8:20, 9:1, 9:13, 10:3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 후 하나님이 세우신 백성의 정체성은 단순한 난민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제사장 나라, 곧 예배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실 때도 예배하게 하시려고 끌어내셨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때도 성전과 제단을 회복하여 예배하게 하시려고 돌아오게 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도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구원은 언제나 예배의 회복으로 향합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천국의 모습은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도 겉으로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실상은 수많은 바로를 섬기며 삽니다. 돈이 바로가 되기도 하고, 명예와 출세와 성공이 바로가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인정이 바로가 되기도 하며, 비교와 불안이 바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늘 피곤합니다. 늘 불안합니다. 조금만 흔들려도 삶 전체가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바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늘 더 요구합니다. 더 벌라고, 더 성공하라고, 더 증명하라고 합니다. 그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안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내십니다. “이제는 바로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예배하며 살라.”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는 삶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현실을 하나님 안에서 감당하도록, 하나님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예배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감당하는 중심입니다.
왜 예배가 중요합니까? 예배는 단지 주일 일정의 한 순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세상이 “너를 증명하라”고 외칠 때 하나님이 “너는 내 백성이다”라고 선언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지친 영혼이 살아나는 자리이며, 동시에 흩어진 삶의 중심이 다시 하나님께로 모이는 자리입니다. 예배는 노예가 자유를 회복하는 자리이며, 현실을 견딜 힘을 새롭게 공급받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증거는 언제 주어집니까? 지금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입니다. 이 산에서 예배하게 된 후입니다. 모세는 지금 당장 증거를 원합니다. 지금 확실한 보장을 원합니다. 지금 모든 것이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말을 믿고 걸어가서 결국 이 산에서 나를 예배하게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다.”
이것은 믿음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모든 증거를 먼저 손에 쥐고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순종의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아, 하나님이 진짜 함께하셨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꾸 이 순서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먼저 길을 다 보여 주십시오. 먼저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십시오. 먼저 증거를 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믿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붙들고 걸어가라. 그리고 순종의 자리에서 내가 한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단지 괴로운 환경에서 건져 내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찢어 휘장을 여셨고, 죄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는 예배자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문제가 조금 줄어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데까지 갑니다. 고난이 끝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상황이 좋아지는 것만이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오늘도 세상의 바로를 섬기느라 너무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돈이 무너질까 봐 두렵습니까? 사람들의 평가가 너무 중요합니까? 성공해야만 내가 괜찮다고 느껴집니까? 비교 속에서 매일 지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을 다시 부르십니다. “애굽에서 나와 이 산에서 나를 섬기라.”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다시 말씀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주일 예배를 주변부에 두지 말고 중심에 두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삶의 옵션으로 두지 말고 목적으로 삼으십시오. 우리 영혼은 더 많은 성공으로 살아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인정으로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살아납니다. 우리 인생은 예배할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도님의 겨울은 무엇입니까?
너무 오래 광야를 걸어서 이제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게 된 분이 있습니까? 과거의 실패 때문에 다시는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분이 있습니까? 상실과 아픔 속에서 “내 인생은 여기까지다”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에게 절망보다 큰 세 가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끝난 자리에서 사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사람에게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노예 된 인생을 예배자로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말씀 앞에서 세 가지로 응답해야 합니다.
첫째, 다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붙드십시오.
고쳐야 할 질병입니까? 회복해야 할 관계입니까? 끊어야 할 죄의 습관입니까? 일으켜야 할 사업입니까? 양육해야 할 자녀입니까? 부흥시켜야 할 교회입니까? 구원시켜야 할 가족입니까? 마지막까지 붙들고 살아야 할 분명한 소명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죽음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고 갈 최종적인 사명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둘째, 출애굽기 3장 12절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을 한 주간 마음에 새기십시오. 아침에 붙드십시오. 밤에 붙드십시오. 불안이 올라올 때 붙드십시오. 눈물이 날 때 붙드십시오. 내 감정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 감정이 최종 판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붙드는 더 깊은 진실임을 믿으십시오.
셋째,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완벽해진 다음에 나오려 하지 마십시오. 강해진 다음에 나오려 하지 마십시오. 무너진 마음을 안고라도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혼자 나오기 어렵다면 공동체의 손을 붙들고라도 나오십시오. 하나님은 괜찮아진 사람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의 인생을 바꾼 것은 모세의 결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이었습니다. 모세의 절망을 깬 것은 모세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광야 한가운데서, 여러분의 긴 침묵 한가운데서, 여러분의 끝난 것 같은 자리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보내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이 음성이 우리 성도님의 절망보다 더 크게 들리기를 바랍니다. 이 약속이 우리 성도님의 두려움보다 더 깊이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도 끝난 사람 처럼이 아니라, 붙들린 사람처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혼자인 사람처럼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노예처럼이 아니라,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열기 닫기
| 쪽지 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