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이라고 다 좋은 책은 아닙니다.
사사기 3 : 31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선생님이 시골로 발령을 받았답니다. 학교에서 늘 하듯이 아이들의 인적사항을 조사하였답니다. 학생 중에는 부모님이 뻥튀기 과자를 만들어서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이 계셨답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아버지의 이런 직업을 부끄러워합니다. 그 학생은 부모님의 직업을 쓰는 난에 이렇게 적어 놓았답니다. '곡물팽창업'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동과 언어 태도가 달라집니다. 미래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행동에 영향을 주는지 하버드 의과 대학에서 실험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실험 대상자 200명을 선정하여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었답니다. A그룹 100명에게는 잠들기 전에 커피 세 잔을 마시게 하고 B그룹 100명에겐 잠들기 전에 우유 세 컵을 마시게 하였답니다. 그리고 다음날 반응을 물었답니다. "어젯밤, 잠은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우유를 마신 B 그룹은 모두 편안히 잘 잤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커피를 마신 A그룹은 65%는 엎치락뒤치락 잠을 못 잤다고, 17%는 날밤을 세웠다고, 18%는 간신히 잤다고 대답했답니다. 사실은 카페인은 커피가 아니라 우유 속에 넣었다고 합니다. 생각의 결과가 그렇게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커피를 마신 사람들은 스스로 잠이 오지 않는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셨으니 잠을 못 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우유를 마신 사람들은 잠이 잘 오는 우유를 마셨으니 잠을 잘 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성도님의 직업에 대하여, 성도님이 다니는 교회에 대하여, 부모님과 자녀, 아내와 남편에 대하여, 자신의 외모와 학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비교의식, 피해의식,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 16:3)"
땅에 있는 저와 우리 성도님은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부석인 말이 아닙니다. 인사치레 말이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존귀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까?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기를 때 재롱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즐거워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것이 느껴지십니까?
다른 성경에는 우리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칭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리 민족은 별수 없이 엽전이야, 우리 교회는 어쩔 수 없어, 우리 아이는 구제 불능이야. 당신이 뭐 안다고, 우리 집은 별수 없어" 오늘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분 혹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외우시기 바랍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 16:3)"
옆에 계신 성도님께 한 번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김집사님은 존귀한 자니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이 김집사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연히 열린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이름 없는 천한 자 같아도 이 땅에서 존귀한 사명자로 불러 주었습니다./(나는 누구인가? 의 문제입니다. 신분의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3대 사사 삼갈이 나옵니다. 그에 대하여 텔레비전 자막처럼 단 한 절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2대 사사 에훗의 기사에 끼여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즈음 사사기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갈에 대한 기록은 한 절 밖에 나오지 않아 지난 주 주보에 2대 사사인 에훗과 함께 묵상하려고 수요 예배 순서에 "(사사기 강해8) 사사 에훗과 삼갈 "이라는 제목으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회개를 하였습니다. 책은 두껍다고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두꺼운 책이라고 다 좋은 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절 소개되어 있다고 가치없는 인생, 끼워넣는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은 양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은 양으로 평가될 수 있어도 생명을 결코 양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자막처럼 지나간다하여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생을 존귀한 자로 보실 줄 믿습니다. 어느새 저 역시도 세속화되어 똑같이 한 시대를 살아간 귀중한 인물인데 그저 성경에 기록된 양으로 에훗에 끼어 설교할려고 한 잘못된 제 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주일에 "두꺼운 책이라고 다 좋은 책은 아닙니다."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한눈을 팔면 이렇게 모든 것을 양으로 평가하는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잘 생긴 사람이나 조금 덜 생긴 사람이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장애인이나 비 장애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다 존귀한 자로 여기십니다.
삼갈의 기사가 한 절 나와 있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저는 계속 묵상하는 가운데 세 가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대답을 들었고 둘째는 나의 능력은 무엇인가? 셋째는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것에 대한 응답을 본문을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삼갈을 소개할 때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먼저 "에훗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갈의 아버지가 '아낫'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하나님께서 사사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아낫이 누구입니까? 가나안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아스다롯, 아세라신과 더불어 가나안의 소위 3대 여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삼갈의 아버지가 이런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은 삼갈의 아버지가 대단히 이방화되었다는 말입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권력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학력이 있으면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말하면 무당과 같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부끄러워 할 만한 집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얼마나 자아상이 구겨져 있겠습니까?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한을 품고 조선시대를 살아갔습니까? 넘을 수 없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쳤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도 택하여 사사를 삼아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냐 직업이 무엇이냐 문제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출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이 사실을 믿습니까? 사람이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하나님이 위대한 걸작품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작품이 얼마나 가치가 있습니까? 모든 예술가를 만드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모태에서부터 만드셨습니다. 어느 부모의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집안 출신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돈이 있느냐, 얼마나 아름다우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시 22:10)" 시편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 우상 장자 아들이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한 시대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주었습니다. 모세 살인자가 다윗 목동으로 간음하고 살인한 자였지만 우리 하나님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민족 지도자로 삼아 주었습니다.
노아같은 술꾼도, 야곱같은 거짓말쟁이도, 레아같이 못생겨 외면받는 자도, 요셉같이 끝없이 학대받는 자도, 기드온같이 두려워하는 자도, 삼손같이 긴 머리하고 바람피우는 바람둥도, 하나님께서 한시대 사명자로 불러 사용하였습니다. 라합같은 기생도, 요나처럼 하나님을 피해 도망한 사람도, 나오미같이 일찍이 홀로된 자도, 욥과 같이 파산한 자도, 사마리아의 여자처럼 몇차례 이혼한 여인도, 디모데처럼 병든 자도 하나님은 불러 사명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비록 부족한 것 많이 있지만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내 너를 버리지고 않으리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너를 지키시리라 약속하네"
우리 성도님과 제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름 없는 천한 자 같아도 이 땅에서 존귀한 사명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2. 우리는 능력없는 자 같아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나의 능력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능력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돈이라는 경제적 재산과 건강이라는 신체적 재산, 그리고 지식, 인격, 양심, 기술과 같은 정신적 재산으로 인생을 평가합니다. 능력이 없으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들이 있어야 쓰임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같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마른 막대기같은 사람도 사용하십니다. 삼갈을 보십시오. 삼갈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백명을 죽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갈의 직업은 농부인 듯합니다. 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려면 그래도 많은 공부를 하고 신분도 좋아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농부인 삼갈도 한 민족의 지도자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무엇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쳤습니까? 소모는 막대라고 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이나 수리아에서는 농부가 밭을 갈 때 길이 약 2.5m 정도되는 둥글고 두꺼운 막대기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농부에게 익숙한 소모는 막대기를 사용하여 그 오만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이기게 합니다. 600대 1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각종 현대무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대단히 힘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대대의 원수가 된 나라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는 블레셋에게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사울왕은 블레셋과 싸우다 아들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강력한 나라 사람들을 무기도 아닌 소를 몰고 막대기로 하나님은 물리치게 하였습니다. "나는 할 수 없어 우리 가정은 어쩔 수 없어, 우리 교회는 뻔해, 우리 민족은 앞날이 막막해"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사 돈이 없어, 실력이 없어, 가진 것이 없어, 권력이 없어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릴 때 무엇을 가지고 무너뜨렸습니까? 물매와 돌 다섯 개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5)" 물매와 돌을 사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여도 우리의 것을 사용하시는 여호와와 함께 나아가면 승전고는 울리게 될 줄 믿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렸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기적을 일으켰습니까? 어린아이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였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고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실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건강을 잃어 이제 끝이났다고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가정, 우리 아이들은 희망이 없다고 주저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소모는 막대기를 사용하셨습니다. 현재 있는 것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에게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김집사님 힘 내세요. 하나님이 김집사님 막대기를 사용하여 능력을 나타냅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J. 하드필드 박사가 자신감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넌 틀렸어. 이젠 끝났어!"라고 자괴감을 줄 때 우리는 실제 가진 능력의 30%도 채 발휘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넌 할 수 있어! 넌 특별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하는데 왜 니가 못해!"라고 자신감을 줄 때, 우리는 무려 능력의 500%까지 발휘할 수 있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같지만 소모는 막대기를 사용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주어진 재능과 건강, 물질과 인생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길 원합니다.
3. 우리 인생이 아주 미미한 것 같아도 결국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십니다.(나는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인생의 결과, 인생의 평가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평가할 때 업적으로 평가합니다. 혁혁한 공을 세우고 무대의 중앙에 선 주인공만 대단한 존재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조명받는 무대에 서있지 않다하여도 역사의 무대에서 각자 주연급 인생으로 사용하십니다. 겨울 연가로 아무리 인기있는 배용준씨라해도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는 되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는 유일하게 저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갈을 보십시오. 삼갈이 600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였습니다. 앞에 나오는 2대 사사 에훗처럼 적국의 왕을 죽여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아닙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인력인 일만명의 역사와 용사를 죽인 것도 아닙니다. 1대 사사 옷니엘처럼 갈렙이 인정하고 백성 누구나 인정할 만한 대단한 공을 세운 것도 아닙니다. 드보라처럼 장군들을 이끌고 적진에 나가 철병거(전차)를 무너뜨린 것도 아닙니다. 당시의 사사들에 비하면 600명 블레셋 사람을 죽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단 한 번밖에 그런 일을 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아마 삼갈은 이 사건 이후 다시 농사를 짖는 평범한 농부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삼갈 이후에 사사가 된 드보라의 노래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삿5:6절을 보십시오. 전국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라는 말은 블레셋의 약탈, 폭행 등으로 행인들은 큰길로 다니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작은 길로 숨어다녀야 할 정도로 무법천지이고 어려웠다는 말입다. 블레셋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고 백성들에게 평안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삼갈이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인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오. 삼갈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우리가 하는 일 미미한 것같지만 하나님께서 평가하시길 "너도 너에게 맡겨준 사역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었다"고 평가해 주십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교회에 나와서 한 번 은혜 받고 평범하게 자녀들과 사는 것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서있지 못하는 것같습니다. 목회의 현장에서 조그마한 교회를 섬기는 것 미미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큰 교회를 이루지도 못하고 조그마한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관할 수 있습니다. 분당에 유명한 목사, 수백억으로 지은 화려한 교회,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인기있는 목회자, 혁혁한 능력이 있는 목회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교회를 보면서 쥐구멍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저에게는 "미미하게 보이는 분당 끝자락 작은 교회에서 미미하게 목회하지만 그래도 김필곤 목사 너도 하나님 나라 구원 사역의 한 부분을 맡아 이루고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결과에 대하여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 앞에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저 사람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지금까지 뭘 했는가?"라고 자책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잘 된 이웃집 아들을 보며 "우리 아이들은 왜 이렇게 모자란가 다 내 탓이지"라고 자학할 필요도 없습니다. 알아 줄 만한 업적 없다고 초라하게 움추러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에게 말씀한 것처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왕하 20:5)"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이름 없는 자 같으나 한 시대 쓰임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한 달란트 받은 자로,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 받은 자로,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로 다 하나님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쓰시는 것입니다. 다섯달란트 남겼다고 더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두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다섯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똑같이 똑같은 말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 25:21)"
결과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비관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 인생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연같지 않게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주연으로 보고 계신단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크던 작던 상관이 없습니다. 무대에 올려져 있던 무대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던 상관업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만큼은 우리를 통해 하시길 원하십니다. 비록 부도를 당하기도 하고, 무능력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를 통해 결국 성취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름 없는 천한 자 같아도 이 땅에서 존귀한 사명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존귀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어떻게 사용되겠습니까?
우리는 능력없는 자 같아도 우리 하나님께서 오른 손을 붙잡고 사용해 주십니다. 우리는 무능력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아주 미미한 것 같아도 결국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4.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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