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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3)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사도행전 16:6-10)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25460 추천수:1 218.147.218.173
2026-02-15 12:40:35

동행(3)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

사도행전 16:6-10

 

우리는 2월 동행이라는 주제로 첫 주일에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의 손을 잡고 앞서가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처럼, 인생 전체를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며 따라가면 됩니다.

둘째 주일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삶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 내 옆에서 아픔을 나누는 친구로 우리와 발을 맞추고 걸어가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다 지시고 항상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동행하십니다.

오늘은 세 번째로 바울과 동행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앞에서 이끄시며 동행한다면, 성자 하나님은 옆에서 짐을 지고 같이 걸어가시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동행해 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시지만 삼위로 존재하여 구약에는 성부 하나님이 주도적 사역을 하시고, 성자, 성령 하나님은 보조적 사역을 하신 것처럼, 신약 예수님 당시에는 성자 하나님이 주도적 사역을 하시고, 성부, 성령 하나님은 보조적 사역을 하셨습니다. 물론 성부·성자·성령은 누가 더 주도하고 누가 보조한다는 식의 서열이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삼위는 동일한 본질과 권능과 영광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구속사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시기에는 어떤 사역을 더 두드러지게 드러내시는가하는 나타남의 국면이 다를 뿐입니다.

 

이 땅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부터는 성령 하나님이 주도적 사역을 하시고,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보조적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이해하려면 배경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구조화된 최초 기반(스키마)70% 정도는 있어야 새로운 지식 30%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들어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하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경은 지혜와 계시의 영마음의 눈을 밝혀”(1:1718) 주신다고 말씀하시고 있고 진리의 성령이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16:13)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을 해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6-17) 여기서 '보혜사''곁에서 돕도록 부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성령님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분이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 속에 계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시며, 우리를 변호해 주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이 시간 바울의 삶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우리와 어떻게 동행하시는가를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서 은혜 받으시길 바랍니다.

 

1.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동행을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 동행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누구와 동행하려면 동행의 전제 조건이 무엇입니까? 동행은 '생명'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죽은 자는 걸을 수 없고, 시체는 산 자와 동행할 수 없습니다. 바울(사울)을 보십시오. 다메섹 도상 이전의 그는 하나님을 열렬히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자였고, 영적 살인자였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과 어둠인 사울은 결코 동행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던 원수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설득이나 지성으로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주권적인 창조 능력만이 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4-5절을 찾아 같이 읽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사울을 찾아오십니다. 사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를 덮치셨습니다. 이때 성령님은 사울의 강퍅한 자아를 깨뜨리시고, 그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전서에서 이 신비를 이렇게 논증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2:3)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한복음 16:13-14)

죄인 된 인간은 스스로 예수를 주라 고백할 능력이 없습니다(전적 타락).

그러므로 누군가 진심으로 "예수는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 안에서 이미 성령님이 역사하셨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은 바울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2:8). 성령께서 그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기에(36:26), 바울은 비로소 무릎을 꿇고 예수를 영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고, 성령님이 그 십자가를 내 이야기로 믿게 하셔서 동행이 시작됩니다.

 

2)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을 부여해 동행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믿게 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십니다. 법적인 관계가 성립되어야 진정한 동행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6) 성령님은 이제 자연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두려운 심판자가 아니라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친밀하게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안에 '양자의 영'이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로마서 8:14-15)

 

3)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바울의 선교는 인간의 회의나 결정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로 내려가..." (사도행전 13: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원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관적으로 믿도록 '적용'하신 것입니다. 마치 전기가 발전소에 있어도 전선이 연결되지 않으면 불이 켜지지 않듯,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2천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이지만, 성령님께서 믿음을 주실 때 비로소 그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바울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심으로, 새생명을 얻게 되고 예수님이 누리시는 아들의 권세를 받아 세계 선교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남은 생애는 '고독한 투쟁'이 아니라, '예수의 영과 함께하는 거룩한 산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혹시 "나는 바울처럼 환상을 보지도 못했고, 음성을 듣지도 못했는데 정말 성령님이 나와 동행하실까?"라고 의심하십니까?

예수님이 2천 년 전 유대 청년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믿어지십니까? 하나님을 단순한 신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를 때 마음이 편안하십니까?

그렇다면 확신하십시오. 성령님이 이미 우리 성도님 안에 계십니다. 오늘 결단의 첫 걸음은 이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동행의 출발선입니다.

우리 성도님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성령님이 성도님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으며, 성도님을 하나님의 백성 삼아 이미 동행하고 계시다는 가장 강력하고 논리적인 증거입니다. 이 확신 위에서 주어진 사명을 붙들고 동행을 시작하십시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내가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어진 사역이 내가 원하여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맡겨준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를 끝까지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자, 저와 우리 성도님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성령님은 동행의 과정에서 방관자가 아니라 주권자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방치가 아니라 거룩한 개입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행하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여기서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 전체가 아니라, 당시 로마의 '아시아 속주'를 말합니다. 현재 튀르키예의 서부 해안 지역입니다. 이 지역의 핵심 도시는 에베소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상업,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전략가였습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고 영향력 있는 도시(에베소)로 가려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선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 효율적인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6절 하반절에 "그들이... 다녀가"라고 기록합니다. 막히면 주저앉아 불평할 수 있었으나, 바울 팀은 막힌 길을 뒤로하고 다른 길(브루기아, 갈라디아)로 계속 움직였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라고 말씀합니다. 무시아는 아시아(서쪽)가 막히자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착한 경계 지역입니다. 이곳은 목적지가 아니라 통과하는 길목이었습니다. 비두니아는 오늘날 흑해 연안의 북부 튀르키예 지역입니다. 당시 비두니아는 로마의 총독이 다스리는 매우 부유하고 문명화된 지역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살고 있었고, 헬라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도시 중심 선교 전략을 가졌기에, 아시아(에베소)가 막히자 그 다음으로 유력한 도시들이 있는 북쪽 비두니아를 선택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매우 타당한 'Plan B'였습니다. "애쓰되"'계속된 동작'이나 '반복된 시도'를 의미합니다. 비두니아로 들어가기 위해 길을 찾고, 기도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거룩한 고집과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 즉 성령님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은 그들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단호하게 불허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시적 보류가 아니라 완전한 차단이었습니다. 6절에서는 '말씀 전함'을 막으셨고, 7절에서는 '이동 경로' 자체를 막으셨습니다. 남쪽(아시아)도 막히고, 북쪽(비두니아)도 막혔습니다. 동쪽은 이미 지나온 길입니다. 남은 것은 서쪽(바다, 드로아)뿐입니다. 바울도 우리처럼 당황했습니다. 기도가 막힌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은 침묵의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바울을 어디로 향합니까? 8절을 보세요.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깔대기처럼 바울의 진로를 한 곳으로 몰아갔습니다. 불가항력적 인도하심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결혼한 배우자도 다 그런 결과입니다. 사업도, 교회도, 하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른 모든 문을 닫으셨기에 이곳에 서게 된 것입니다. 드로아 앞은 바다입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내 힘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끝난 그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새로운 길(마게도냐 환상, 9)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9절을 보세요.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하나님의 빛은 인간의 어둠이 가장 짙을 때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이 잠잠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환상"은 잠결에 꾸는 막연한 꿈이 아니라, 깨어 있는 상태 혹은 영적으로 매우 명료한 상태에서 보는 객관적인 시각적 계시를 의미합니다. 마게도냐 사람은 한 번 말하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울 앞에 계속 서서 간절하게 반복적으로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환상 속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식민지 유대인)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합니다. 지리적으로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가려면 에게 해를 건너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대륙의 이동입니다. 아시아 중심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도약하는 순간입니다. 성령의 막으심은 언제나 즉시 형통으로 이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막으심은 먼저 낭떠러지로 가지 않게 하시는 사랑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길로 빚어 가시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때로는 길이 열리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먼저 빚어집니다.

 

2) 혼란이 사라지고 '거룩한 확신'이 임하도록 동행해 주십니다(16:10a)

본문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라고 말씀하는데 우리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Luke)가 드로아에서 바울의 선교팀에 합류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누가는 이방인 의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럽 선교를 위해 가장 적합한 동역자(헬라 문화에 능통한 의사)를 미리 예비해 두셨습니다.

앞서 6절과 7절에서 바울 일행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왜 막으시지? 어디로 가야 하지?"라며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인 순간, 그 혼란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인정함'이라는 단단한 확신이 자리 잡았습니다. '인정함이러라'"함께 결합하다", "종합하다", "결론을 내리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막으심 (6-7: 상황적 증거), 마게도냐 환상 (9: 계시적 증거), 동역자들(실라 디모데 누가)의 동의 (10: 공동체적 확증) 이 모든 조각들을 '함께 맞추어 본' 결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다"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상황, 말씀을 종합하여 '거룩한 추론'을 하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결과는 마음의 평강입니다. 더 이상 "이 길이 맞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 모험이 기다리지만, 내면에는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라는 흔들리지 않는 닻이 내려집니다. 이것이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얻어야 사랑받는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미 십자가로 사랑을 확정하셨기에, 성령께서 그 사랑 위에 우리의 마음을 평강으로 고정시켜 주십니다.

 

3) 주저함이 사라지고 '즉각적 순종'하게 해 주십니다(16:10b)

확신은 행동을 낳습니다. 10절에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힘쓰다는 '찾다', '구하다', '노력하다'는 뜻입니다. , 그들은 단순히 마음만 먹은 것이 아니라, 당장 배편을 알아보고 떠날 채비를 갖추는 구체적인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은 즉각적 순종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정(결론)'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즉시 실행에 옮겼습니다. 순종의 생명은 타이밍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내 계획(아시아)을 포기하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동행한 결과, 바울은 자신의 편안함을 버리고 '복음을 들고 건너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졌고, 그의 목적은 선명해졌습니다. 이것이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927절에서 노아는 "하나님이 야벳(유럽의 조상)을 창대하게 하사 셈(아시아/유대인의 조상)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예언했습니다. 바울(셈족)이 복음을 들고 유럽(야벳족)으로 건너감으로써, 이제 이방인들이 참된 셈의 장막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구약 예언의 성취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바울 팀은 자신의 계획(아시아)을 버리고,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경륜(유럽)에 자신의 인생을 일치시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코너'로 몰아넣으십니다. 사방이 막혀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계획(Plan B)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Plan A)인 서쪽 바다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거룩한 수동성'으로의 초대라고 부릅니다. 이는 서구 문명이 기독교 복음 위에 세워지게 되는 결정적인 '역사의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다 길이 막혔을 때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인생이 낭비되지 않도록 친히 간섭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막힌 길 뒤에는 반드시 열린 문(마게도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양은 시야가 좁아 눈앞의 풀만 보고 낭떠러지로 갑니다. 그때 목자는 지팡이로 양의 옆구리를 칩니다. 양은 아프고 당황스럽겠지만, '간섭' 때문에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고 푸른 초장으로 가게 됩니다. 성령님은 바울이 아시아라는 작은 우물에 갇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를 세계 선교라는 더 넓은 바다로 이끌기 위해, 바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여 '거룩한 태클'을 거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막힘의 시간'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열정을 내려놓았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하나님이 돕는다"는 공식이 깨지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나는 순종한다"는 참된 제자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막힘이 있습니까?

간절히 원했던 취업의 문이 닫혔습니까?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 깨졌습니까?

사업의 길이 자꾸 꼬이고 있습니까?

인생의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흔히 '내 믿음이 부족한가?' 혹은 '세상이 나를 억까(억지로 까다)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성령님의 동행은 때로 'No'라는 대답으로도 나타납니다. 바울에게 에베소의 문을 닫으신 것은 그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유럽이라는 더 넓은 지평을 보여주기 위한 '거룩한 브레이크'였습니다. 지금 인생길에 놓인 그 바리케이드 앞에서 울고만 있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령님이 우리의 핸들을 직접 잡고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막힌 문은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방향 전환의 신호등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열릴지까지 단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단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을 신뢰하며 순종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성령님의 간섭하심 앞에 불평 대신 감사를 드리십시오.

"주님, 내 길을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고집대로 되었다면 망했을 텐데, 주님이 막아주셔서 내가 살았습니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올 때, 막힌 문 뒤에 숨겨진 '마게도냐의 환상'이 비로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귀찮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길로 '친히 모시고 가는 중'입니다.

 

3. 성령님은 동행의 결과 우리 인생길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인생이 되로록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믿게 하시고(시작), 우리의 길을 막으시며 간섭하신다(과정)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까다롭고 힘든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결과'는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을 통해 '우리의 성공'이 아닌 '구속사의 완성'을 이루십니다. ‘내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순종하여 도착한 마게도냐(빌립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1)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16:16-18).

16절에 보십시오.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납니다. 그녀는 바울을 따라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겉으로 보면 바른말 같고 홍보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속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영들 분별함의 은사(고전 12:10)가 작동했습니다. 바울은 그 배후에 숨은 악한 영의 정체를 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6:18)

바울이 지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축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성령께 주도권을 드린 자에게, 하나님은 '예수 이름의 권세'를 위임하십니다. 바울이 아시아에 있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영적 승리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 임합니다. 내 힘이 빠진 자리에 하나님의 능력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동행하시는 성령님께서 은사를 주시니까 멜리데 섬에서 보블리오 부친의 열병을 고칩니다(28:8). 심지어 바울의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떠나갔습니다(19:11-12).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그를 다시 살려냅니다(20:9-12),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습니다(28:3-6).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성령의 은사가 삶 가운데 일어납니다. 오늘날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들에게 각종 성령의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린도전서 12:8-10) 한 평생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은사대로 쓰임받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16:22-25)

25절을 보십시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16:25) 성령과 동행하면 환경을 초월하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님과 동행했는데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고발당해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발에는 차꼬(족쇄)가 채워졌습니다. 아시아로 가려던 것을 막으셔서 순종하고 왔는데, 결과가 감옥이라니요? 보통 사람이라면 분노와 원망이 터져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충격적인 장면을 기록합니다.

기도하고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인 '희락''화평'입니다. 성령님은 바울의 내면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부어주셨습니다. 감옥의 어둠도, 매질의 고통도 성령이 주시는 평강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과 동행하면 상황이 변하기 전에 내가 변합니다. 환경은 감옥인데, 내 마음은 천국이 됩니다. 성령과 동행하면 상황이 먼저 바뀌는것이 아니라, 종종 내가 먼저 바뀝니다.’ 감옥이 천국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천국의 평강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한 자가 누리는 기적입니다. 자신과 반대의견을 가진 자를 악마로 취급하던 그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로마서 9:3)라고 고백할 정도로 사랑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참지 못하던 사람이 배신과 비난을 받아도 오래 참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비난할 때도, 그는 부모의 심정으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끝까지 충성을 합니다.

 

3) 성령의 사역이 일어납니다.(16장 전체)

성령과 동행한 결과는 구속사의 완성을 보여주는 교회의 탄생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루디아가 회심합니다(14). 자색 옷감 장사, 부유한 아시아 출신 여성, 상류층 여입니다. 유럽 최초의 여성 신자가 탄생합니다.

여종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16). 이름도 없는 노예, 귀신 들렸던 자, 사회적 최하층입니다. 영적 어둠에 묶인 자가 해방됩니다.

간수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33). 로마의 퇴역 군인 출신 공무원, 중산층, 유럽 남성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이 셋이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인종, 계급, 성별의 벽이 너무나 높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들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묶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의 시작입니다.

바울이 성령과 동행했기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는 구속사의 신비가 성취되었습니다. 성령은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나의 성공을 위해 달렸다면 바울은 유명한 강사는 되었을지 몰라도, 이런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은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역은 담을 허물고 생명을 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나와 동행하지 않는다고 외로워하십니까? 아무도 아늘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습니까? 아무도 내 곁에 없다고 두려워하십니까?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성부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인도하시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옆에서 무서운 짐을 같이 져 주시면서 예수님이 동행했듯이 우리와 예수님이 동행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성령이 시대에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고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고, 사명을 주어 동행을 시작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방관자가 아니라 주권자로 우리 인생길을 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방치가 아니라 거룩한 개입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행하십니다. 혼란이 사라지고 '거룩한 확신'이 임하도록 동행해 주십니다. 주저함이 사라지고 '즉각적 순종'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 인생의 운전자로 평생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 성도님의 인생 운전대를 성령님께 맡겨 보십시오. 계획일 틀어질 때, 삶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제가 모르는 마게도냐는 어디입니까?’ 질문하십시오. 그리고 즉각 순종하십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성령의 사역이 신비하게 우리 삶에 나타날 것입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며 우리 삶의 여백에 성령님이 써 내려가시는 '성령 행전 29'을 함께 써 내려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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