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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침체에서 일어서기(출6:1-9)
김필곤목사 (yeolin) 조회수:7704 추천수:3 112.168.96.71
2004-07-18 15:23:16

영적 침체에서 일어서기
출애굽기6:1-9

이 시간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던질 텐데 그것이 나에게 맞으면 주보에 o 표 틀리면 x 표를 해 보십시오. (1) 요즈음 일하는데 매사 의욕이 없다( ) (2) 요즈음 성경을 읽은 적이 거의 없다 ( ) (3) 요즈음 일 주일 동안 기도한 일이 없다 ( ) (4) 요즈음 예배드리는데 기대도 감격도 없다 ( ) (5) 요즈음 매사 세상이 어둡게 보인다 ( ) (6) 요즈음 사람 만나는 것이 싫다 ( ) (7) 요즈음 몸이 나른하고 활력이 없다 ( ) (8) 요즈음 산다는 것이 의미가 없고 가끔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 ( ) (9) 요즈음 신앙 생활하면서 왜 내가 신앙 생활하는지 모르겠다 ( ) (10) 요즈음 나의 믿음이 약해졌다.( )
o 표가 8개 이상 되신 분 있습니까? 심한 영적 침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o 표가 다섯 개 이상 되신 분이 있습니까? 영적 침체의 위기를 당하고 있습니다.
경기의 침체기가 있는 것처럼 신앙인도 신앙 생활하다보면 영적 골짜기를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영적 침체기를 맞이하면 매사 의욕을 상실합니다. 믿음이 의미가 없어지고, 무력감에 사로잡힙니다. 자기 정체성이 혼돈 되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모든 세상이 어둡게 보이게 됩니다. 왜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지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몸이 연약해져 잠만 자고 싶고 활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없어집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고 성경이 읽기 싫고 예배드릴 때 영적 기쁨이 없고 지루합니다. 기도하기가 싫습니다. 조그마한 서운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고 찬양을 드려도 기쁨과 환희가 없습니다. 전도하는 것이 짜증스럽고 신앙생활에 활기가 없고 재미가 없습니다. 헌신의 마음이 없어집니다.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일에 게을러집니다. 경건생활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죄에 대하여 두려움이 적어집니다. 영적 침체에 있다는 징후들입니다. 이런 영적 침체기는 어느날 감기에 걸리듯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신앙의 영웅들에게도 찾아 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할 정도로 영적 침체에 빠진 세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와 엘리야, 요나입니다. 한 시대 참 능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200만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이끈 민족지도자입니다. 홍해를 가른 사람입니다. 돌에서 물을 나게 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물리친 사람입니다. 놀라운 기적은 나타낸 사람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 12만명을 회개시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여달라고 할 정도로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하지만 때로는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참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참 나약해져 있는 모세를 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과거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다섯 번이나 거절했던 사람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 지팡이가 뱀이되고 손을 품에 넣을 때 문둥병에 걸리는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백성들을 이끌라고 하니 되지 않습니다. 바로는 말을 듣지 않고 백성들은 모세를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은 더 강제 노동을 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백성들은 원망을 합니다. 과거에도 실패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백성을 이끌어내라고 합니다. 그때 모세가 하는 말이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결코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힘있게 일어나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인데도 불구하고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교회에 잘 나오던 사람이 어느 날 교회에 나가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성가대 잘 하던 사람이 성가대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포기하고 멀리 떠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 잘하던 사람이 어느 날 이제 해어지자는 것입니다.

1. 왜 이런 영적 침체 현상이 일어날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몇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던 일이 계획대로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중력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힘이 많이 있는 곳에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인도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계획하던 일들이 척척 잘 되면 신앙 생활도 재미가 있고 하나님의 임재를 늘 체험하는 것처럼 느끼며 교회일도 열심히 하게 됩니다. 사업이 잘되어 BMW사면 수요일도 나오고 새벽기도회도 BMW 타고나옵니다. 그러나 사업이 잘 안되고 건강을 잃고 집안이 계속 어려워지고 하면 영적 생활도 동시에 침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켜서 하신 일입니다. 계획을 세워 진행하면 바로 바로가 백성들을 풀어 주고 백성들은 모세를 따를 줄 알았는데 막상 나가 보니까 아닙니다. 모세의 고백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12,30). 바로가 오히려 더 혹독하게 백성들을 다룹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합니다(출5:21).

2) 능력의 부족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잘 이루워지지 않으면 쉽게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아! 나는 능력이 부족하구나" 자신의 능력 부족을 고백합니다. " 아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이구나" 라고 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비관하게 됩니다. 심하면 자살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입술이 둔하다고 합니다. 바로를 설득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 하나 설득하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바로를 설득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능력부족을 절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고합니다. 나는 설득할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바로가 내 말을 듣고 백성을 보내 주겠냐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모세를 최선을 다하여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결과는 혹독한 고통만 더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에게 더 상처만 주고 고통만 더해 주었습니다. 능력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 부족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영적 슬럼프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구나라고 좌절합니다.

3) 부정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계획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의 태도가 바뀌어집니다. 부정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고난이 크게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보다 사람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게 됩니다. 사명보다 현실의 문제가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태도가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비관적으로 변합니다. 모세의 마음의 상태를 보십시오. 12절을 보세요. 백성들도 듣지 않는데 바로가 어찌 듣겠습니까? 30절을 보세요. 어찌 나를 듣게 습니까? 5장 22절을 보세요.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습니까? 어찌씨가 된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됩니다.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침체라는 것은 사실보다 감정의 문제입니다.

2. 우리가 어떻게 영적 침체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1) 나의 고민 나의 어려움 나눌 대상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이 공부를 잘 하려면 공부 잘하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업을 잘하려면 사업 잘하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 잘하는 믿음의 동지들을 만나면 영적 침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어찌 어찌라고 절규하는 모세에게 내 형 아론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다고 고독해 하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이 있다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나의 고민을 가장 잘 받아주고 나의 문제를 가장 잘 들어 주시고 풀어 주실 분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입니다. 모세 보십시오. 솔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합니다. 5장 22-23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씀합니까?
모세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털어 놓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습니다. 적당히 포장하지 않습니다. 솔직합니다.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었습니까? 내가 바로에게 말하니까 더 학대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않으시렵니까? 솔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느낌들을 다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 받아 주십니다. 바로 앞에 나아가야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여 있었습니다.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한 결과가 무엇이냐는 불평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편이 되어 주지 않는 고독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인도해야 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염려가 있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털어 놓는 것입니다. 혼자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염려 걱정 근심 다 받아 주십니다. 6장 12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의식과 무의식 초의식의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질문하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자신의 초의식 세계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기록해 보십시오. "하나님 제가 오늘 자존심이 무척 상합니다. 목사님과 한 바탕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 나도 자존심 상했다. 나는 십자가에서 참 어렵게 버티었다"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알기를 원합니다. 문제 때문에 더 하나님을 멀리하고 문제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살라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라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어제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다섯분의 글들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렌드 회장인 박성수 장로의 글이 쓰여 있는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28살에 이대 뒷골목에 두평 남짓한 방에서 옷장사를 시작하여 1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써놓았습니다. 그분은 예수님 만난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대학 때 불치의 병이 걸렸다고 합니다. 점퍼가 무거워 입지 못하고 이불이 무거워 덮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기도 힘들었답니다. 근육 무력증이라는 병이었답니다. 연필도 들기 어려워 절망했다고 합니다. 무력하게 누워 지낼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 금식하며 부르짖었답니다. 자신을 도와줄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내가 결혼한 후 하반신이 마비되는 병에 걸렸답니다. 병원에서 원인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점점 몸의 반쪽을 쓸 수 없게 되었답니다. 하나님께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해 주어 깨끗이 치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97년 11월 imf의 광야을 만났을 때 회사는 부도 위기를 당했다고 합니다. 은행에서는 부도가 나기 전에 회장을 피해 있으라고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금식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해 시무식 때 목사님께서 들려주신 말씀 사43:19절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43:19)"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외국인 투자가가 현금 5억 불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2) 내 능력의 한계로 침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경제적 침체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정신적 침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 침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어찌하여, 어찌하여라고 질문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6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강한 손으로 그들을 바로에게서 해방시킬 것을 말씀합니다.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 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30절 어찌 바로가 내 말을 듣겠습니까라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 앞에 절망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7장 1절을 보십시오. 너를 바로에게 신으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바로가 너를 신처럼 볼 수 있게 강한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너 말못한다고 했는데 아론을 대언자로 세워 주겠다고 합니다. 내 능력의 한계 앞에 침체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 힘을 주시고 세워 주십니다.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우리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내 능력에 의지하면 우리는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면 우리는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 보면 비관적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하기를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9)"
모세의 지팡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홍해를 가르고 바위에서 물을 내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훌륭한 연주가에게 맡기어지면 어떤 악기 일지라고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목동이었던 다윗이 왕이되는 것입니다. 소모는 엘리사가 한 시대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겁쟁이 기드온이 기적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왼손잡이 에후도 창기로 버림 받은 기생 라합도 쓰임받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2절에 보십시오. 여호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존재와 축복의 근원, 무한하고 영원히 완전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땅을 주기로 약속하시고 넉넉히 그 땅을 주실 수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강력한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시다는 말입니다. 족장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말은 전혀 알리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이름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나타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실제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의 신음을 다 듣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무거운 짐 밑에서 우리를 빼내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분이십니다. 기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얼마 전 일입니다. 우리 교회 임직자들을 세웠습니다. 통상 교회들이 임직자를 세우면 헌금하게 하고 그 헌금을 교회 차를 사기도 하고 기도원을 사기도 하고 부지를 마련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교회다 무슨 선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 헌금하고 싶으면 자유롭게 감사 헌금하여 어려운 나라에 하나님의 교회를 기념으로 지으라고 했습니다. 중국에 교회를 짖기고 하고 중국을 기도하며 중국을 방문했는데 약속한 전도사님을 만나 보니 자신은 그곳에 교회만 짖고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취소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 짖는 것은 교회 건물 짖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복음이 증거되고 기도하고 생명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솔모몬도 엄청난 교회를 지었지만 교회 짖고 오히려 타락하였습니다. 교회 짖기 전에는 일천 번제를 드렸지만 교회 지은 후에는 성전에 가서 기도한 내용 한 번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몇주를 지나도 적당한 장소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파키스탄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기도한 내용의 교회를 짖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돈도 맡았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도서관 역할도 하고 학교 역할도 하는 교회를 짖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곳에 있는가 생각하여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잘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임직자들이 기념하여 세우는 교회이기 때문에 임직자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의견이 갈리어 한 주간 기도하게 한 후 투표를 하였습니다. 중국과 파키스탄 동 수가 나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과반수가 넘어 결정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참 신비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이 있었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단독으로 파키스탄에 교회를 짓겠다는 것입니다.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해 가신 줄 믿습니다.

3) 현실을 크게 보지 말고 사명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6,7,8,11,10)
힘을 잃어 버린 모세, 침체된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언약하신 사명을 말씀합니다. 세 가지 언약을 성취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속(6)하겠다고 합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 삼겠다(7)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백성 조상에게 약속한 땅으로 인도(8)하겠다는 것입니다. 8절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사흘길 정도 다녀오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문제에 집중하면 문제만 커지게 보이는 것입니다. 안되는 것만 보면 세상에는 안되는 것으로 가득차있습니다. 나쁜 것만 보면 교회도 나쁜 것으로 가득차게 되어 있습니다. 기분 나쁜 것만 보면 가정에도 기분 나쁜 것으로 가득차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보다 감정에 집중하면 그 감정에서 헤어나올 수 가 없습니다. 사실보다 더 중요하고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명입니다. 사명 붙들면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삶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관적이게 되어 있고 결국 좌절하여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이루어야 할 사명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좌절, 우리의 실패는 다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는 사명을 붙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각자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 붙들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건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비관적일 필요가 업습니다. 부정적인 사건은 죽을 때까지 우리 주변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으로 인하여 더 사명의식을 고취하느냐 사명감을 잃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사명을 붙드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책임 자신이 지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정을 과장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7:4)" 사명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합니다. 기업인은 기업의 현장에서, 정치인은 정치의 현장에서, 학자는 학문의 현장에서, 예술가는 예술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얼마나 오염되고 타락된 세상입니까? 할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저 침체되어 쓰러져 누워 있을 세상이 아닙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1)"
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영적 무감각에서 깨어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입니다. 깊은 영적 잠에서 깨어나라는 말입니다. 봉사의 잠, 기도의 잠, 섬김의 잠, 전도의 잠, 열정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앉아 있으면 환경을 탓하며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상한 영혼 일으켜 세워야 하고, 잃어 버린 건강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쓰러진 경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비뚤어진 인간관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왕상19:5절)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기갈과 곤비함으로 힘을 잃은 사람들이 있으면 생수의 떡을 먹고 일어서야 합니다.
병으로 쓰러져 일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까? 심리적인 병입니까? 육체적인 병입니까? 마음의 병입니까? 영혼의 병입니까?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8) 38년된 병자도 예수님 만나니까 일어났습니다.
(복음성가 683장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우리 예수님이 주신 사명 붙듣가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일어날 줄 믿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3:6절) 그 때 평생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못한 그가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우리민족의 현실을 보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19세기 말 수구파와 개화파의 싸움의 현장과 같습니다. 그 때 외국인들이 우리를 말할 때 "무능한 조정, 부패한 탐관 오리, 무지한 백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100년이 지났습니다. 세계 경쟁시대에 집안 싸움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계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니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국채 보상운동"을 하였습니다. 가락지를 뽑아서 내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나라 빚을 갚자. 둘째 학교를 세워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자 셋째 민족 자본을 육성하여 민족 기업을 세우자"라고 외쳤습니다. 신앙인들이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러주었습니까? 문화 사명과 복음 명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명 붙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연세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용재 백낙준 박사가 계십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무당이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백무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 무당 짓 하다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겠소? 자식들 멸망 받을 짓 그만하고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 화가 난 백 무당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아니 재수없게 무슨 소리야, 너나 잘 믿고 천당인지 백당인지 가라" 그런데 역사는 그 다음에 일어났답니다. 이 백무당이 잠만 자려고 하면 그 사람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자식들 멸망 받을 짓 그만하고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 이소리에 못견디어서 나중에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으로 변하였습니다. 그 가정에서 신실한 신앙인 백낙준 박사 같은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표가 달라지면 아이들의 목표가 달라집니다. 가정의 목표가 달라집니다. 사명이 달라지고 그 사명 붙들면 언젠가는 이루어집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4.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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