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기쁨을
롬15:1-6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인간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거미형 인간입니다. 거미줄을 쳐 놓고 있다 곤충들이 걸리면 잡아먹는 거미처럼 이기주의적 인간을 말합니다. 이 땅에 있으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있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둘째는 개미형 인간입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만 뭉치는 개인주적 인간을 말합니다. 어느 공동체의 발전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입니다.
셋째는 꿀벌형 인간입니다. 열심히 꿀을 만들어 자기들만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유익을 주는 이타주의적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하여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살았는데 거미형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결코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인생철학으로 삼고 살았답니다. 구두쇠처럼 살아 돈은 벌었는데 늙으니까 자식들도 손자들도 싫어하게 되었답니다. 어느날 산에 놀러 가는데 돈을 아끼지 위해 부부가 걸어갔다고 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너무 힘이 들어 할아버지에게 "영감~ 나좀 업어줘!"라고 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도 힘들었지만 남자체면에 할 수 없어 업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일평생 한 번 업혀 기분이 좋아 "영감, 무거워?"라고 하자 할아버지가 "그럼~ 무겁지! 얼굴 철판이지, 머리 돌이지, 간은 부었지~ 많이 무겁지"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기분이 상하여 할머니가 내려 달라고 하여 둘이 걷다가 항상 손해보고는 살수 없는 할아버지가 "할멈~ 나두 좀 업어줘!"라고 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할머니였지만 어쩔 수 없이 업어주었답니다. 이때 할아버지 약올리는 목소리로 "그래도 생각보다 가볍지?"라고 말했답니다. 그 때 할머니가 "그럼~ 가볍지~ 머리 비었지, 허파에 바람들어갔지, 양심없지, 싸가지 없지~ 너~무 가볍지~~"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살면서 일평생 이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하여 자신의 기쁨을 삼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더라도 자기 기쁨을 최우선시하는 사람들입니다.
1. 자기를 기뻐하는 삶 뛰어넘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이 자기를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고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교회에 다니고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밥을 먹고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영화를 보고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실을 믿게 되면 마음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늘 자신만 보다가 나이가 들어 결혼하게 되면 이제는 자기 위주의 삶이 아니라 남편을 생각하고 아내를 생각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를 생각하며 살 듯이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청춘 남녀가 같은 과에서 근무할지라도 서로 별 관심없이 지내었습니다. 오직 자기 일만 잘 하면 되었고 때때로 자기 자신에게 지시하는 것이 밉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과 직원들이 동해안에 여행을 갔는데 이 자매가 수영 미숙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별 관심도 없이 지내었던 총각이 파도의 위험을 무릎 쓰고 자신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후부터는 그 총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의 삶의 모습이 비유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어느 날 믿어졌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을 천국백성 삼아 주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 날위에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790)" 그 때부터는 이제 자기를 기뻐하는 삶의 포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이를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를 기쁘게 하게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조금 발전되면 가족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 특히 우리의 원수까지도 기쁘게 하게 살라고 요구받고 있습니다.
2.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삶의 모습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삶은 가장 먼저 어떻게 나타납니까?
1)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줍니다(1).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강한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합니다. 힘이 숭배되고 힘이 최고입니다. 힘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몰리고 힘이 있는 자가 대접받는 사회입니다. 힘있는 자가 기뻐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힘이 있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제 힘의 원리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은혜의 원리에 따라 삽니다. 비록 믿음에 있어서 자신이 강한 자일지라도 비록 경제에 있어서 자신이 강자일 지라도 비록 지식에 있어서 자신이 강자일 지라도 비록 권력에 있어서 자신이 강자일지라도 약한 자를 배려하고 약한자를 도와 주고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줍니다. 갓난 아이일수록 많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상대의 약점을 노리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약점을 담당해 줍니다.
여기서 마땅히는 원래 빚지다라는 뜻으로 단순한 권고 이상으로 반드시 해야할 의무를 말합니다. 담당하는 것은 무거운 것을 지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철저히 자기 희생을 암시합니다. 강한 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약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성격이 급함했습니다. 야곱은 욕심이 강했습니다. 바울은 건강이 약했습니다. 교회도 가정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 약점을 담당해주면 서로가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상대를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2)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기쁘게 하여야 합니다.
(1)선을 이루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한다고 악을 이루면 안됩니다. 이웃을 망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이 자기의 부하의 부인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부하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이것을 나단 선지자가 알았습니다. 그 때 다윗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나단 선지가가 가서 왕이여 그정도 가지고 뭐 마음 아파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까? 모든 것이 왕의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단 선지자는 단호하게 그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선을 이루는 기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요셉이 젊었을 때 중년 부인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그 여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루밤 잠을 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셉은 단호하게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9)"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선을 이루는 기쁨입니다. 험담하면서 맞장구치며 기뻐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남 나쁜 사람 만들면서 기뻐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교회를 파괴하면서 기뻐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서로를 기쁘게 한다고 해서 죄를 지으면서 기쁘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서로 모여 험담하면서 기뻐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비굴하게 아부하면서 기쁘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에서는 단호하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길을 택하여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엡 6:6)"-골3:22
하나님을 떠나 변덕스러운 사람의 마음을 맞추어 기쁘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편의주의로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과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서로 충돌될 때는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을 택하라는 말입니다.
(2)덕을 세우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한다고 덕을 무너뜨리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대학에 합격한 김집사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합격 축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집사님 아들은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이집사님과 김집사님 예배를 드리고 같이 나오는데 김집사님만 붙들고 아들이 합격하여 축하합니다. 계속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덕을 세우는 기쁨이 아닙니다. 말을 할 때도 그 말이 사실인가가 중요합니다. 사실이라면 그 말이 듣는 사람에게 유이을 주는가가 중요합니다. 상대에게 유익을 준다고 해도 덕을 세우지 못하는 말 같으면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3.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이유
2000년 1월 달에 제주도에 사는 조카들이 와서 에버렌드 눈썰매장에 데리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바빠서 아이들만 기쁘게 놀라고 하고 저는 교회에 와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 때 데리러 가니까 차를 타자 마자 "아빠는 불쌍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당시 제가 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제목은 "우리는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들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바다 건너 / 제주도에서 조카들이 왔다.// 5년 만에 왔다./ 비행기가 있다하나/ 그래도 바닷길이라/ 멀기는 먼가보다// 아이들 모두 눈 썰매장으로 데리고 갔다./ 같이 놀아 주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아이들만 내려 놓고 일터로 왔다.// 약속한 시간 오후,/데리러 갔다. /8살 먹은 아들이 가장 먼저 차 앞에 뛰어 와 탄다.// 차를 타자마자 아들은/ "아빠는 불쌍하다"라고 말한다./ 이유를 묻자 같이 놀지 못하고 차만 테워주니 불쌍하단다.//아들은 아직 모른다./아버지가 결코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는 사실을...(2000.1.9)
우리가 억울하게 당하고 손해보고 때로는 힘겨워 쓰러져 눈물을 흘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1)그리스도의 모범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근거는 그리스도의 모범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비굴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매를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감당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8:2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습니다.(빌2:5-8)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비방을 받았습니다.(시69:9) 백성들의 조롱을 당하였고, 로마군인들로부터 갖가지의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비방과 모독과 고통과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2)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목표를 품고 같은 뜻 같은 마음, 같은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연약한 자를 세워 한 신앙으로 한 비전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로마 교회에는 다양한 습관과 다양한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14장 2절을 보십시오. ①고기나 채소를 먹는 먹는 문제가 있었습니다(2). ②특별한 날을 거룩한 날로 지키는 문제(5) ③포도주를 마시는 문제(21)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날짜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 정죄하고 교만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유대적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음식 날짜에 대한 유대적 규정을 양심적으로 꼼꼼하게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결한 음식, 즉 동물은 규정된 방식으로 도살된 것만 먹는 코셔법에 따른 음식을 먹고 이것을 보장할 수 없어서 아예 고기를 먹지 않고(14,20) 혹시 제사에 사용된 것일까 하여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날짜에 관해서는 안식일과 유대인 명절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신앙이 아직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고기 먹는 것에서 자유로웠고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기 않았습니다. 이들이 바로 1절에서 말하는 바울을 포함하여 우리 강한 자들입니다. 아디아 포라(Adiaphora) 문제입니다.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고 생활과 목적에 따라 다르게 설명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성경에서 직접 하라 하지 말라는 규정이 없고 또 성경에 계시된 객관적 진리들에 비추어 볼 때 선악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문제들입니다. 의식문제, 관습, 문화의 차이 등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교회에 어떤 새깔의 옷을 입고오느냐? 골프를 치느냐? 피아노를 어데에 놓는냐? 커틴 색깔이 무슨색이냐? 등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15장에 와서는 이런 것으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텔레비전 본다고 싸우며 기분 나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 드린 후 산에 오른다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14장에 소개된 내용을 보십시오
(1)연약한 자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1)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받았기 때문입니다(4). 다 주를 위하기 때문입니다(6).
②연약한 자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
의심하는 바-추론, 생각, 의견, 의심, 망설이는 것을 의미-망설이는 것
구약에 금지된 고기를 먹는 것,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 포도주를 마시는 것
비판-분별, 판단, 결정, 논쟁을 의미-판단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의 망설임에 대하여 판단함으로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논쟁하지 말라는 것이다.
(2) 업신 여기지 말고 판단(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3).
자신의 의견을 절대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2)
고기 먹는다고 배교자라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젊은 이와 늙은이, 초신자 기존 신자, 복음 송 문제, 기타 문제, 악기 문제, 축도 방식 문제, 주여 삼창 문제 등 비본질적 문제로 정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셨고(3) 하나님께서 세우셨고(4) 강한 자나 약한 자나 주를 위하여 하기 때문이고(5-9)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기 때문입니다.(10-12)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오늘 15장에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고 자기를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궁극적으로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5)"
나는 수치를 당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기쁨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자존심이 상해도 나는 손해가 된다하여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할 수 있고 성경을 통해 주시는 위로와 격려(안위)로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근거는 인내와 안위와 소망을 주는 성경입니다(4-5).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할 때에 인내와 안위와 소망을 얻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 고난 당할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내를 통해 성경의 위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입니다. 소망은 말씀을 상고함으로 얻는 위로와 격려로 묵묵히 전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그런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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